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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문희공(류순)묘지명 (文僖公(柳洵)墓誌銘) 165


문희공(류순)묘지명

文僖公(柳洵)墓誌銘

 

  하늘이 관후(寬厚)하고 박대(博大)한 자질로 사람에게 주는 것은 그 몸을 위함이 아니라 장차 대임을 내리여 설시(設施)를 넓히게 함이니 이미 그 소임을 크게 하여 그 운용을 넓히고 또 그 몸을 수하게 하고 그 뒤를 경사롭게 하니 하늘이 선한 사람에게 복을 줌이 틀리지 않으니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 류공(柳公)은 가히 하늘에서 얻어 그 몸을 선히 하고 그 보답을 받은 이라고 이를진저!   공의 휘(諱)는 순(洵)이요 자(字)는 희명(希明)이니 문화(文化)의 거벌(鉅閥)이라, 고조(高祖)는 휘 만수(曼殊)니 관직이 숭록대부(崇禄大夫)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에 이르고, 증조(曾祖)는 가정대부(嘉靖大夫)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휘 원지(原之)니 후에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증(贈)하였고, 조(祖)는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휘 종(淙)이니 후에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贈)하였고, 고(考)는 세자좌세마(世子左洗馬) 휘 사공(思恭)이니 후에 추충적덕보조공신(推忠積德輔祚功臣) 의정부령의정(議政府領議政) 문천부원군(文川府院君)에 증하였으니 그 증한 벼슬은 다 공의 훈위(勳位) 때문이라. 비(妣)는 남양홍씨(南陽洪氏)니 판경성절제사(判鏡城節制使) 휘 상직(尙直)의 따님이니 또한 명문대가라 정통 1441 신유(辛酉)에 공을 생하다.   공은 어려서 부터 기품과 도략이 숙성하고 대부인이 또 성이 엄하야 의방(義方)으로 교양하니 이유하기 전에 독서할 줄 알아 대의를 통하되 집에 서책이 없어 매양 사람을 좇아 빌려 읽고 한번 책을 얻으면 주야로 송습(誦習)하여 반드시 정숙하여야 돌려 보내더라 겨우 15세에 남학(南學)에서 공부할 때 금릉(金陵)을 부(賦)하니 그 말과 뜻이 다 노련하고 건장하니 사림(詞林)의 거수(鉅手)들이 다 추복하야 원대한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천순(天順) 1459 기묘(己卯)에 사마시(司馬試)에 으뜸으로 합격하고 1462 임오(壬午)에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보직되었다가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전배(轉拜)되었다. 성화(成化) 을유(乙酉)에 성균관주부(成均館主簿) 겸예문관봉교(兼藝文館奉敎) 호조좌랑(戶曹佐郞) 겸지제교(兼知製敎)를 역임하였고 1466 병술(丙戌)에 중시(重試)와 발영시(拔英試) 양과(兩科)에 합격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천배(遷拜)되었다. 1469 기축(己丑)에 모친상을 당하여 복을 마치고 도로 구직을 받었다가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와 전한(典翰)과 직제학(直提學)에 승진하고 이윽고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승진하였다.   성종대왕(成宗大王)이 명소하여 미인도(美人圖)를 내리시고 시를 지어 진상(進上)하라하니 공이 그 말련에 이르시기를 『군왕이 이로부터 성색을 멀리하시니 그림을 펴면 응당이 한번 빈소(嚬笑)를 부치시리라.』 하니 주상이 칭선하시고, 공인(工人)을 명하사 비단으로 꾸미어 족자를 만드니 지금까지도 장화고(藏畵庫)에 보관되었다. 문득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를 배(拜)하고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전임하다. 1479 기해(己亥)에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마치고 병조참지(兵曹叅知)를 배하였더니 계묘(癸卯)에 주상이 가선을 특가(特加)하시여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다가 돌아옴에 공조참판(工曹叅判)을 배하다. 이어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예(禮) 형(刑) 병(兵) 삼조참판(三曹叅判), 동지중추(同知中樞) 겸동지경연(兼同知經筵) 성균관(成均館) 의금부사(義禁府事)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 개성부류수(開城府留守)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했는데 이르는 곳마다 다 성적(聲績)이 있었다. 을사(乙巳)에 흉년을 만나 왕명을 받들고 호서(湖西)를 진휼(賑恤)함에 전활함이 많으니 백성이 다 힘입었더라, 홍치(弘治) 계축(癸丑)에 주상이 자헌계(資憲階)를 특가하시여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주시고 형조(刑曹)와 이조량조판서(吏曹兩曹判書)를 전임하여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하다.   1498 무오(戊午)에 성종대왕실록(成宗大王實錄)을 수찬하다가 사사(史事)에 연좌되어 잠간 파하였다가 수월(數月)만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배하고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叅贊) 호조판서(戶曹判書) 겸예문관제학(兼藝文館提學)을 전배(轉拜)하고 임술(壬戌)에 상이 숭정계(崇政階)에 특가하여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을 제수하시다. 1503 계해(癸亥)에 우의정(右議政)에 승진하고 갑자(甲子)에 영의정(領議政)에 전승(轉陞)하다. 때에 연산(燕山)의 혼폭(昏暴)을 만나 정치가 황폐되여 어기는 자는 죽이고 화(禍)가 그 문내까지 미치니 공이 수상(首相)으로 위를 버리고저 하되 사직을 얻지 못하고 광구(匡救)코저 하되 한갇 촉기(觸忌)되니 힘써 무마하되 항상 근심으로 마음을 상하였다.   정덕(正德) 1506 병인(丙寅)에 성상이 천운을 받들어 즉위함에 이르러 추은록훈(推恩錄勳)하고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호(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號)를 사(賜)하시고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을 봉하며 또 토전과 노복을 하사하니, 공이 의정(議政)을 사직하기를 재삼(再三)하되 비답을 내리여 윤허하지 않으셨다. 기사(己巳)에 또 고사(固辭)한대 드디어 의정(議政)은 교체하되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으로 경연사(經筵事)를 겸하도록 하시었다. 1510 경오(庚午)에 치사(致仕)하니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직함은 그대로 두다. 갑술(甲戌)에 수상(首相)의 자리가 비거늘, 대신들이 노성대신(老成大臣) 쓰기를 말하니 주상이 더욱 공을 다시 임용코저하여 공을 상위에 올리니 공이 사양하되 윤허하지 아니하다. 1516 병자(丙子)에 또 사임하기를 간곡히 하니 주상이 이르기를 『여러 조정(朝廷)을 겪은 노신(老臣)을 내 의중히 여긴 바어늘, 자주 노질을 인용하여 물러나기를 청하니 내수상(首相)의 진퇴는 가히 가볍게 할 수 없어 윤허하기 어렵다.』 하였더니 이제 애걸함이 간절하고 정의가 긴박하니 그 청함을 따라 기무(機務)를 해제(解除)하야 신양(頣養)하기에 편하도록 윤허한다.』 하시고, 부원군(府院君)을 도로 봉하다.   1517 정축(丁丑)에 병환이 침면(沉綿)하니 주상이 내의를 명하야 구병(救病)케하고 때로 어주(御厨)의 내선(內膳)을 하사하시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환후를 살피더니 5월 30일에 병이 심하여 자택에서 졸하니 향년이 77이라, 부음이 들림에 상이 크게 슬퍼하사 증부(贈賻)를 특가하시고 조문(吊問)과 치제를 의식과 같이하고 빨리 사옹원(司饔院)에 명하야 반선(飯膳)을 고치라 하시니 정원(政院)이 고기반찬 진어(進御)하기를 청하니 주상이 이르기를 문성(文城)은 여러 조정의 노성한 신하이거늘 이제 별세함을 듣고 슬퍼하여 마지않는데 육선(肉膳)을 드림을 차마 먹지 못한다 하시다. 한편 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슬퍼하여 마지 않더니, 이 해 8월 29일에 양주(楊州) 동촌(東村) 무둔산(無屯山) 팔야리(八夜里) 자좌오향원(子坐午向原)에 예장(禮葬)으로 조금도 흠결(欠缺)이 없이 안장(安葬)하니 생영사애(生榮死哀)를 아! 다 가추웠도다.   공이 천자(天資)가 순후하고 관용하며 화락하여 젊어서부터 대인의 기풍이 있으므로 사람마다 큰 그릇이 될 줄 알더라. 일즉 학문을 좋아하여 서적을 즐겨보고 게으른 기색이 없더니 연이어 삼과(三科)를 급제함에 울연히 성화를 떨치었다. 비록 직무가 번거로움에 있어도 일즉 글 읽기를 폐(廢)치 아니하고 경사에 우유(優游)하야 넉넉히 얻음이 있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또한 모두 탐색하야 빠짐이 없었으며, 무릇 책을 봄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널리 여러 책을 고증하여 날이 다하도록 연구하여 기어히 융회함에 이르고 자학에도 자못 정밀히 하며 의약과 지리에도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항상 실당(室堂)을 깨끗이 쓸고 서사를 곁에 두어 쇄연(灑然)히 포의서생(布衣書生)과 같았으며, 한번도 무익한 희희를 가까히 아니하고 문장(文章)을 함에 아담(雅淡)하고 건장(健壯)하야 고기(古氣)가 있어 속인의 과구(窠臼)에 빠지지 않았다. 성품이 또 절약하고 검소하야 의복과 기명을 다만 정결(淨潔)함을 취하고 화치(華侈)함을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명위(名位)가 극히 높았으되 자봉(自奉)이 간소하고 연유과 성악을 즐기지 않았으며, 부귀를 누린 사십여년에 다만 사궤장(賜几杖) 일연(一宴)에만 거락(擧樂)할 뿐이었다. 자제를 교훈함에 규구(䂓矩)가 있고 가정을 다스림에 옹용(雍容)하고 엄숙하야 상하가 문란치 않고, 형과 아우를 대접함에 더욱 우애를 돈독히 하야 형 위(渭)가 포천(抱川)에 살았는데 궁구(窮窶)하거늘 매양 시절에 의복을 지어 보내되 겨울이면 반드시 두텁고 따뜻함을 취하고, 여름이면 반드시 가볍고 서늘함을 취하며 무릇 생활의 도구를 군색함이 없게하고 아우 침(沉)이 항상 병객(病客)으로 약물만 의존할새 공이 친히 의서를 상고(詳考)하야 화제를 지어 구원하고 의복 기명(器皿)의 시증(施贈)을 형과 같이 하였다. 아! 공은 그 재주가 섬부(贍富)하고 덕이 후중(厚重)한 호선인(好善人)이라, 젊어서 과제에 올라 청요(淸要)에 비영(蜚英)하고 경고(卿孤)에 천력(踐歷)하야 드디어 대배하니 지위는 백료(百僚)에 어른이 되고 수는 70을 넘으되 조금도 재생(灾眚)이 없고 문내(門內)의 경사가 다함이 없어 복록이 자손에까지 뻗치었다.   배(配)는 지통례문사(知通禮門事) 장계증(張繼曾)의 따님인데 삼남이녀를 생하니 남(男) 장(長)은 응룡(應龍)이니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서 지금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문원군(文原君)이고, 차(次)는 응대(應臺)니 군기사(軍器寺) 판관(判官)으로 공보다 먼저 서거(逝去)하고, 여(女) 장(長)은 사도사첨정(司䆃寺僉正) 안(安) 숙(塾)에게 출가하고, 차(次)는 사천현감(泗川縣監) 이장견(李長堅)에게 출가하였다. 문원군(文原君)은 종실(宗室) 암성수(巖城守) 윤(綸) 의 따님을 취(娶)하여 이남을 생하니 경원(敬元)과 경장(敬長)인데, 경장(敬長)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며, 판관(判官)의 전취(前娶)는 직장(直長) 이사종(李嗣宗)의 따님이니 일녀를 생하여 진사(進士) 채세영(蔡世英)에게 출가하고, 후취(後娶)는 상호군(上護軍) 조(趙) 권(權)의 따님이니 일녀를 생하였는데 어리며, 첨정(僉正)은 이남일녀를 생하니 남은 애인(愛仁)과 애의(愛義)요, 여는 시산부정(詩山副正) 정숙(正叔)에게 출가하고, 현감(縣監)은 일남일녀를 생하니 남(男)은 복남(福男)이요, 여는 유사(儒士) 경세인(慶世仁)에게 출가하였다.   장차 장사할새 문원군(文原君)이 공의 벼슬 경력과 행적을 써서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신용개(申用溉)를 찾아 묘지를 청하거늘, 용개(用溉)가 공을 뫼시여 공에게 지우를 받음이 오래고 공의 실적을 아는 것이 자상하니 그 묘지명(墓誌銘)을 어찌 감히 사양하리요? 명에 이르노니,  
 안으로 쌓임이 두텁고 밖으로 드러남이 이에 크도다. 
 
 재조와 학문이 출중하고 풍운(風雲)에 기회(機會)가 있었도다. 
 
 관유(寬裕)함과 포용(包容)을 겸하니 군자(君子)의 도량(度量)이로다. 
 
 훈업과 경제로 지위는 영상(領相)에 올랐도다. 
 
 하늘이 그 선함을 복 주니 장수(長壽)의 아름다움이로다. 
 
 어진 자손이 다하지 않아 복지(福祉)가 연장하고 경사가 유방(流芳)하도다. 
 몸은 조화로 더불어 놀되 이름은 실적을 따라 천추(千秋)에 전하리로다.  
 유당(幽堂)에 지명(誌銘)을 넣으니 후인이 생각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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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159  광주공(경)약사 (廣州公(坰)略事) 167     편집인 2012/11/23  [858]  
158  영의정문희류공순묘표 (領議政文僖柳公洵墓表) 166     편집인 2012/11/23  [1015]  
 문희공(류순)묘지명 (文僖公(柳洵)墓誌銘) 165     편집인 2012/11/23  [1110]  
156  우찬성평간공(지)약사 (右贊成平簡公(輊)略事) 164     편집인 2012/11/23  [1017]  
155  선산부사공(희철)묘갈명 (善山府使公(希轍)墓碣銘) 163     편집인 2012/11/23  [934]  
154  괴산공(계분)묘갈명 (槐山公(桂芬)墓碣銘) 162     편집인 2012/11/23  [1036]  
153  영암공(희정)묘갈명 (靈巖公(希汀)墓碣銘) 161     편집인 2012/11/23  [879]  
152  홍문관부제학류공희저신도비명 (弘文館副提學柳公希渚神道碑銘) 160     편집인 2012/11/23  [1151]  
151  사제부제학공(희저)사제문 (賜祭副提學公(希渚)賜祭文) 159     편집인 2012/11/23  [985]  
150  금산군수성곡공(약)묘갈명 (錦山郡守醒谷公(約)墓碣銘) 158     편집인 2012/11/23  [1106]  
149  합천군수류공(륜)묘갈명 (陜川郡守柳公(綸)墓碣銘) 157     편집인 2012/11/23  [1056]  
148  반곡공(적)행장 (盤谷公(績)行狀) 156     편집인 2012/11/23  [897]  
147  문산군(하)약사 (文山君(河)略事) 155     편집인 2012/11/23  [1066]  
146  첨정공(인유)약사 (僉正公(仁濡)略事) 154     편집인 2012/11/23  [960]  
145  홍문교리죽계공(인홍)묘갈명 (弘文校理竹溪公(仁洪)墓碣銘) 153     편집인 2012/11/23  [1197]  
144  공조참의공(인호)약사 (工曹參議公(仁濠)略事) 152     편집인 2012/11/23  [884]  
143  안변공(인수)약사 (安邊公(仁洙)略事) 151     편집인 2012/11/23  [886]  
142  증숭정대부의정부우찬성행통훈대부사헌부감찰서산류선생 신도비명 150     편집인 2012/11/23  [1136]  
141  서산공(자미)묘표 (西山公(自湄)墓表) 149     편집인 2012/11/23  [1119]  
140  광주목사공(곡)묘갈명 (光州牧使公(轂)墓碣銘) 148     편집인 2012/11/23  [1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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