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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영의정문희류공순묘표 (領議政文僖柳公洵墓表) 166


영의정문희류공순묘표

領議政文僖柳公洵墓表

 

  금년 여름에 나의 동년인 문원군류공(文原君柳公)이 상복을 입고 나를 찾아와 곡배(哭拜)하고 말하기를 「나의 선고께서 유명하시기를 내가 죽거든 비를 세우지 말고, 다만 묘좌(墓左)에 단갈(短碣)을 세우되 성명(姓名)만 기록하라 하시기로 고자(孤子)가 울면서 유명을 받들었더니 이제 묘갈이 갖추어졌네. 그대가 오래 전부터 나의 선고(先考)를 잘 알고 있으니 대략 그 음기(陰記)를 써주면 거의 망극한 정(情)을 펴겠네.」하기로 혼(渾)이 슬피 눈물을 흘리고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살펴 쓴다.   공의 휘는 순(洵)이요, 자는 희명(希明)이니 문화인(文化人)이다. 고려(高麗) 명신(名臣) 휘 차달(車達)의 후로 대대로 고관대작(高官大爵)을 이어왔고, 고조(高祖)는 휘 만수(曼殊)이니 본조(本朝)에 들어와 벼슬이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에 이르고, 증조(曾祖)는 휘 원지(原之)이니 가정대부(嘉靖大夫)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요, 조(祖)는 휘 종(淙)이니 봉직랑(奉直郞)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이요, 고(考)는 휘 사공(思恭)이니 세자 좌세마(左洗馬)이며, 비(妣)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절도사(節度使) 휘 상직(尙直)의 따님인데 정통(正統) 신유(辛酉), 세종(世宗), 23년 1441에 공을 낳으셨다.   공이 유시(幼時)로부터 총명이 절륜(絶倫)하였는데 대부인의 성품이 지엄하여 의방으로 교육하시니 젖먹을 때부터 글 읽을 줄 알아 대의(大義)를 통달하더니 나이 약관이 못되어 학궁에 유학하며 금릉부(金陵賦)를 지었는데 사조(詞藻)가 호일(豪逸)하여 능운(凌雲)하는 기상이 있으므로 사문(斯文)의 대로들이 입을 다시어 칭탄하되 오봉루수(五鳳樓手)라고 추장(推獎)하여 명성이 경사(京師)에 진동하였다.   세조(世祖) 1459 기묘(己卯)에 공의 나이 19세로 사마시(司馬試)에 장원(壯元)하고 1462 임오(壬午)에 문과에 등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성균관주박(成均館主薄)를 배명하고 예문관봉교(藝文舘奉敎)를 겸하다가 호조좌랑(戶曹佐郞) 지제교(知製敎)로 옮기고 1446 병술(丙戌)에 연이어 중시(重試)와 발영시(拔英試)를 모두 급제하여 문망(聞望)이 더욱 융성하였다.   예종초(睿宗初)에 이조정랑(吏曹正郞)을 배명(拜命)하고 성종조(成宗朝)에 수차 예문관응교(藝文舘應敎)를 지내고 홍문관(弘文舘) 직제학(直提學)으로 전직되었다가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하였는데 하루는 대내에서 미인도를 내보이며 공에게 그 위에 시를 쓰라고 명하시었다. 공이 즉석에서 율시를 지어 썼는데 말련구(末聯句)에 이르기를 「군왕이 이로부터 성색을 멀리하시니 그림을 펴면 응당 한번 빈소를 부치시리라.」하니, 임금께서 좋다고 칭찬하고 더욱 그 뜻이 규풍하는데 있음을 가상히 여기셨다. 곧바로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를 배명(拜命)하고 승진하여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재직중(在職中) 외우(外憂)를 당하여 복(服)을 마치고 다시 홍문관 부제학을 배명했더니 얼마 후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가 소환하여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고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관직을 옮겼다.   이 해에 호서(湖西)에 흉년이 들어 공에게 진휼(賑恤)을 명하니 공이 진심으로 구호하여 완전히 살아난 사람이 심히 많았다. 병조(兵曹) · 형조(刑曹) · 공조(工曹) 등 삼조(三曹)의 참판(參判)을 역임하면서 동지(同知) 경연(經筵) 의금부사(義禁府事)를 겸임하고 성균관대사성(成均舘大司成)에 제수(除授)되었더니 임금께서 몸소 선왕(先王)에 제사지내고 제생(諸生)에게 대향연(大饗宴)을 베풀었는데 공이 관내(館內) 제생을 거느리고 차례로 서서 배복(拜伏)하고 사례(辭禮)하는데 주선(周旋)하고 진퇴하는 법도가 질서정연하니 보는 사람들이 다 그 풍의(風儀)에 감복하여 사문(斯文)의 성사(盛事)라 일컬었고 특별히 자헌(資憲)에 승자되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성종(成宗)께서 승하(昇遐)하고 연산(燕山)이 즉위하여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옮기어 춘추관(春秋館)을 겸직하면서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수하였는데 공이 실지로 사사(史事)를 주관하였다. 조금 후에 정헌(正憲)의 품계로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어 예문관제학(藝文舘提學)을 겸하다가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옮기고 곧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었더니 숭정대부(崇政大夫)에 특진(特進)하여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승진하였다. 이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승진하여 영경연(領經筵)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겸직하고 곧바로 좌의정(左議政)에 승진한지 한달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승진되었다.   당시에 국운이 불행하여 연산(燕山)이 실도(失道)하여 학염(虐熖)이 날로 번치(煩熾)하니 백성의 원성이 극심하였다. 공이 수상(首相)에 재직하여 앙화(殃禍)가 박두(迫頭)함을 즉감(卽感)하고 영화(榮華)에 욕망을 버리고 날마다 좌상(左相) 허문정공(許文正公) 침(琛)과 함께 주야로 국사에 정성을 다하여 침식할 겨를이 없었으니 이는 중산보(仲山甫)의 명철(明哲)함과 영무자(寗武子)의 우직함을 공이 이에 겸전(兼全) 함이러라. 이윽고 상천(上天)이 재앙을 후회하고 신기(神器)가 돌아와 장상(將相)이 협심하여 종사(宗社)를 안정(安定)시켰는데 공의 힘이 실로 유력하였으니 이는 정덕(正德) 병인(丙寅) 중종(中宗) 1506 원년 9월초2일이다.   상이 즉위하사 책훈에 있어 공에게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을 사호(賜號)하시고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을 책봉하였으며 관직은 옛과 같았다. 선대를 추은(推恩)하여 추증(追贈)으로 원사공(院事公)은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고, 판관공(判官公)은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 되고, 세마공(洗馬公)은 의정부령의정(議政府領議政)이 되었다.   공의 지위가 인신(人臣)으로 지극히 높았지만 더욱 겸퇴하여 의정을 사면하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리되 윤허하지 않은지 세 번이었으나 공의 청이 더욱 간절하거늘 드디어 영의정(領議政)을 바꾸고 그대로 부원군(府院君)을 책봉하였다. 1510 경오(庚午)에 치사(致仕)하니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는데 명년에 수상이 결원(缺員)되자 여러 대신(大臣)들이 숙덕(宿德)을 등용하기를 청하니 상께서 더욱 공을 신임하여 다시 수상에 임명하였다. 공이 또 굳이 사양하기 십여일을 두고 그치지 않으므로 상께서 이르시되 「문성(文城)은 기년석덕(耆年碩德)이라. 나의 의중하는 바인데 근래에 자주 질병을 핑계하고 굳이 사직을 원하니 내가 이르기를 수상의 진퇴는 가히 가볍게 하지 못하겠기로 윤허하기 어렵다 하였더니 퇴직을 원함이 더욱 간절하여 부득이 그 청을 좇아 여생을 편히 보내게 하겠다.」하시고 다시 부원군(府院君)을 책봉(策封)하셨다.   1577 정축(丁丑)에 병(病)이 침중(沉重)함에 상(上)께서 의약(醫藥)과 어선(御膳)을 하사하시고 병환이 위독하자 승지(承旨)를 보내어 문병하고 후사를 물음에 이미 기진하여 인사를 모르다가 5월30일에 졸하시니 수가 77세였다. 상께서 부음을 들으시고 진도(震悼)하시어 부의를 내려 치제하고 소찬(素饌)을 들이도록 명하시니 정원(政院)에서 육선(肉膳)을 진상하기를 청함에 상께서 이르시되 「문성(文城)은 누조(累朝)에 노성대신(老成大臣)이라, 내가 예로 공경하는 바인데 지금 그가 죽음을 당하여 어찌 차마 육선(肉膳)을 먹겠는가?」하시고, 재청(再請)하여도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공이 임금에게 견중함이 이와 같았다. 처음에 대비(大妃)께서 공의 졸하심을 듣고 또한 어육을 잡숫지 않으려 하시니 상께서 진언하시기를「자전(慈殿)께서 방금 또한 미녕(未寜)하신데 소선(素膳)을 행함은 불가합니다.」고 강권(強勸)하여 중지(中止)되었다. 태상(太常)에서 문희공(文僖公)으로 시호를 내리고 이 해 8월29일 임신일(壬申日)에 양주(楊州) 고을 동쪽 무둔산(無屯山) 팔야(八夜)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공은 덕기(德器)가 숙성(夙成)한데다 함양(涵養)을 더하여 관화박대(寬和博大)한 기상과 충일한 언모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인군자(大人君子)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평소에 생활이 담연하여 기호함이 없고 오직 독서를 매우 좋아하여 비록 와병중(卧病中)이라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경사를 관천(貫穿)하고 백가서(百家書)를 궁탐(窮探)하여 의심나고 어려운 곳이 있으면 반드시 잠잠히 생각하고 깊이 연구하여 이해하고야 말았다. 더욱 자학(字學)에 정통하여 편방(偏傍) 점획(點劃)을 호리(毫釐)라도 부석(剖析)하며 의방(醫方) 지리(地理)에 이르러서도 자못 조예(造詣)가 깊었으니, 대개 공이 학문에는 하늘에서 내린 성벽이 있었고 시문을 함에 정심(精深)하고 고아하여 연구하는데 더욱 뛰어나셨다. 여러번 시석(試席)을 관장(管掌)하시되 감별이 정밀하여 일찌기 말씀하기를 「그 소작을 보면 가히 그 위인을 알 수 있다.」하셨으니 이로써 그 얻은 인물이 당세의 지명인사(知名人士)가 많았다. 자질들을 가르침에 극히 법도가 있었고 일형과 일제를 처우함에 우애가 지극하여 의복과 약물 등을 공께서 대주었고 공 또한 그를 위하여 진력하였다. 아성(雅性)이 검소하여 관직이 영상에 이르렀지만 비단옷을 입지 않고, 자제들도 화려한 의복을 입고 와서 뵙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큰 소리로 꾸짖었다.   또 유연을 즐기지 않아 벼슬길 40여년에 오직 궤장(几杖)을 내리던 연석(宴席)에 한번 풍악을 잡혔던 것 뿐이니 이는 공의 덕행이 가정에서 닦은 것이다. 한편 국정을 힘써 돕고 국법을 온순히 좇음은 국사에 기재되어 있으니 이에 덧붙여 말하지 않겠다. 공이 위난(危難)의 극함을 당하여 상상이 되었으되 능히 처변하여 그 상도를 잃지 않고 마침내 국가로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하고 영구히 복록을 누리셨으니 이 어찌 이른바「개제(愷悌)가 극진하면 신명(神明)이 부지(扶持)한다.」함이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의논하는 이들이 공을 송조(宋朝)의 왕문정공(王文正公)에게 비(比)하였는데 그러나 왕공은 태평시대를 만났거니와 공은 난세를 당하였으니 그 공명은 비록 같으나 사세의 난이가 같지 않았으니 공의 학문과 도량이 가히 고인보다 우월하다 이르겠도다.   공이 통례문사(通禮門事) 장계증(張繼曾)의 따님과 결혼하여 소생에 아들 응룡(應龍)은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훈(策勳)되어 문원군(文原君)을 봉(封)하고 지금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寜府事)요, 응대(應臺)는 군기사판관(軍器寺判官)인데 공보다 먼저 조서(早逝)하였으며, 장녀(長女)는 첨정(僉正) 안(安) 숙(塾)에게 출가(岀嫁)하고, 차녀(次女)는 현감(縣監) 이장견(李長堅)에게 출가하였다. 문원군(文原君)의 장남(長男)은 경원(敬元)이요, 차남(次男)은 경장(敬長)이니 진사(進士)에 합격했고, 판관(判官)이 생녀하니 장녀(長女)는 진사 채세영(蔡世英)에게 출가하고, 차녀(次女)는 어리며, 첨정의 생남(生男)은 애인(愛仁)과 애의(愛義)요, 현감(縣監)의 남(男)은 복남(福男)이요, 여는 유생(儒生) 경세인(慶世仁)에게 출가하였다. 일찌기 들으니 인자(仁者)는 반드시 뒤가 있다고 하니 하늘에서 공의 덕을 보답하여 후손에게 복을 주심이 어찌 이에 그칠 따름이랴? 가문의 경사가 더욱 번창하기를 가히 기대하노라.

진천군강혼찬

 

領議政文僖柳公洵墓表

 

今年夏吾同年文原柳公方持服哭拜余言曰吾先子有治命吾死勿竪碑但立短碣墓左以識姓名可矣孤泣而承敎今碣已具子爲先子所知久幸畧識其陰庶有以伸罔極之情也渾岀涕以悲義不敢辭謹按公諱洵字希明文化人高麗名臣諱車達之後奕世冠冕自高祖諱曼殊入本朝官至崇祿大夫議政府贊成事曾祖諱原之嘉靖大夫商議中樞院事祖諱淙奉直郞漢城府判官考諱思恭世子左洗馬妣南陽洪氏節制使諱尙直之女以正統辛酉生公公自幼聰警絶倫大夫人性嚴敎以義方未離乳哺已知讀書通大義年未弱冠遊學宮作金陵賦詞藻豪逸有凌雲之氣斯文諸大老嘖嘖稱歎推以爲五鳳樓手名動京師當 世廟朝己卯公年十九魁司馬試壬午登文科拜承政院注書成均舘主簿兼藝文奉敎遷戶曹佐郞知製敎丙戌連捷重試抜英試聞望益隆 睿廟初拜吏曹正郞 成廟朝累歷藝文舘應敎轉弘文舘直提學陞副提學一日內岀美人圖命公題詩其上公卽賦律詩末聯云君王自是疎聲色展畵猶應寄一嚬  上稱善益嘉其意在規諷也尋拜承政院同副承旨陞爲右副丁外憂服闋復拜弘文舘副提學特除全羅道觀察使召拜大司憲遷禮曹叅判是歲湖西不稔 上命公賑恤公盡心俯循全活者甚衆歷兵刑工三曹參判兼同知 經筵義禁府事除成均舘大司成 上躬祭先聖仍大饗諸生公率館官諸學生序立拜伏稱謝周旋可觀進退有度人皆服其風儀以爲斯文之盛特加資憲拜工曹判書時 成廟禮陟燕山初立移判刑曹兼帶春秋舘修  成廟實錄公實主史事俄階正憲拜吏曹判書兼藝文舘提學遷議政府左叅贊尋判戶曹特加崇政陞議政府右贊成拜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 經筵監春秋舘事尋陞左議政逾月陞領議政時國運中否燕山失道虐熖日熾萬類嗷嗷公居首相迫於禍及榮進非所欲也日與左相許文貞公夙夜盡瘁靡遑寝息此仲山甫之所以明哲寗武子之所以如愚而公乃兼之旣而上天悔禍神器有歸將相協心宗社祗定公於是乎實有力焉是正德丙寅九月初二日也 上卽位策勳賜公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號封文城府院君餘如故推恩先代追 贈院事公爲吏曹判書判官公爲議政府左贊成洗馬公爲議政府領議政公以位極人臣愈執謙退請辭議政 賜批答而不允者三公請愈切遂遞議政仍封府院君歲庚午致仕 賜几杖明年首相缺大臣請用宿德 上益倚公復相之公又力辭十日不已 上曰文城耆年碩德予所倚重比來數引疾求退余謂首相不可輕易進退難於允許今者陳乞愈切不得已勉循其請以便頣養於是復封府院君丁丑疾彌留 賜醫藥御膳病革遣承旨視候問以後事已氣乏不能省五月三十日卒壽七十七訃聞 上震悼賻祭有加命進素膳政院請進肉 上曰文城累朝老成予所禮敬今其亡也寜忍遽進肉膳再請不允其見重於 上如此初 大妃聞公卒亦欲改膳 上進言曰 慈殿方且未寜不宜行素強之乃止太常易名曰文僖是年八月二十九日壬申葬楊州治東無屯山八夜之原公德器夙成加以涵養寬和博大氣象充溢言貌人望之知其爲大人君子平居淡然無嗜好唯酷好讀書雖疾病手不釋卷貫穿經史窮探百家遇有疑難必冥搜玄討融會乃已尤精字學偏傍點劃剖析毫釐以至醫方地理亦頗用工盖公之於書天與之癖也爲詩文精深古雅咀嚼愈雋永累主試席鑑别精當嘗自言觀其所作可知其爲人以是其所得多當世知名士敎子姪極有法度處一兄一弟極其友愛衣具藥物皆仰資於公公爲之盡力焉雅性儉素官至台鼎身不着緞衣子弟有衣輕來謁者必厲聲責之又不喜遊宴宦達四十餘年惟 賜几杖一宴擧樂而已此公之德行修於家者然也其密勿廟謨溫醇典策載在國史茲不敢贅公當危難之極而身居上相能處變而不失其常卒之與國同休永享福祿豈所謂愷悌之極神明扶持者歟世之論者以公比之宋朝王文正公然王公遭遇太平而公當亂世其功名終始雖同而事之難易有不同者然則公之學問識量可謂超邁古人矣公聘通禮門事張繼曾女生男曰應龍策勳靖國封文原君今爲同知敦寜府事曰應臺軍器寺判官先公逝女長適僉正安塾次適縣監李長堅文原生男長曰敬元次曰敬長中進士判官生女長適進士蔡世英次幼僉正生男曰愛仁愛義縣監生男曰福男女適儒士慶世仁嘗聞仁者必有後天之所以報公之德祚公之後者寜止於是而已耶門慶之益繁其可待也已

晋川君姜渾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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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159  광주공(경)약사 (廣州公(坰)略事) 167     편집인 2012/11/23  [857]  
 영의정문희류공순묘표 (領議政文僖柳公洵墓表) 166     편집인 2012/11/23  [1014]  
157  문희공(류순)묘지명 (文僖公(柳洵)墓誌銘) 165     편집인 2012/11/23  [1110]  
156  우찬성평간공(지)약사 (右贊成平簡公(輊)略事) 164     편집인 2012/11/23  [1017]  
155  선산부사공(희철)묘갈명 (善山府使公(希轍)墓碣銘) 163     편집인 2012/11/23  [934]  
154  괴산공(계분)묘갈명 (槐山公(桂芬)墓碣銘) 162     편집인 2012/11/23  [1036]  
153  영암공(희정)묘갈명 (靈巖公(希汀)墓碣銘) 161     편집인 2012/11/23  [878]  
152  홍문관부제학류공희저신도비명 (弘文館副提學柳公希渚神道碑銘) 160     편집인 2012/11/23  [1151]  
151  사제부제학공(희저)사제문 (賜祭副提學公(希渚)賜祭文) 159     편집인 2012/11/23  [985]  
150  금산군수성곡공(약)묘갈명 (錦山郡守醒谷公(約)墓碣銘) 158     편집인 2012/11/23  [1105]  
149  합천군수류공(륜)묘갈명 (陜川郡守柳公(綸)墓碣銘) 157     편집인 2012/11/23  [1056]  
148  반곡공(적)행장 (盤谷公(績)行狀) 156     편집인 2012/11/23  [897]  
147  문산군(하)약사 (文山君(河)略事) 155     편집인 2012/11/23  [1066]  
146  첨정공(인유)약사 (僉正公(仁濡)略事) 154     편집인 2012/11/23  [960]  
145  홍문교리죽계공(인홍)묘갈명 (弘文校理竹溪公(仁洪)墓碣銘) 153     편집인 2012/11/23  [1197]  
144  공조참의공(인호)약사 (工曹參議公(仁濠)略事) 152     편집인 2012/11/23  [884]  
143  안변공(인수)약사 (安邊公(仁洙)略事) 151     편집인 2012/11/23  [885]  
142  증숭정대부의정부우찬성행통훈대부사헌부감찰서산류선생 신도비명 150     편집인 2012/11/23  [1136]  
141  서산공(자미)묘표 (西山公(自湄)墓表) 149     편집인 2012/11/23  [1118]  
140  광주목사공(곡)묘갈명 (光州牧使公(轂)墓碣銘) 148     편집인 2012/11/23  [1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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