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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롱암공(수원)사적 (聾菴公(壽垣)事蹟) 316

롱암공(수원)사적

聾菴公(壽垣)事蹟

 

  공의 휘(諱)는 수원(壽垣)이요, 자(字)는 남로(南老)이니 호(號)는 농암(聾菴)이고 또 일호(一號)는 우유자(迂儒子)니 통덕랑(通德郞) 봉정(鳳庭)의 아들이요, 대사간(大司諫) 상재(尙載)의 손이요, 문간공(文簡公) 관(寬)의 11세손인데 숙종(肅宗) 20년 1694 갑술(甲戌)에 충주(忠州) 신당동(新堂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오(穎悟)하여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뜻 밖에 나타나더니 7세에 종조(從祖) 충간공(忠簡公) 상운(尙運)에게 나아가 글을 배움에 한번 읽으면 능히 구독을 띄고 문득 외워 잊지 않음으로 충간공(忠簡公)이 기특하게 여겨 이르기를 『어린 아이가 가히 가르치겠도다.』하였다. 15세에 백가구류(百家九流)를 널리 통하지 않음이 없어 그 고금의 치란과 득실에 대하여 변석(辨析)하기를 물 흐르듯 함으로 듣는 이가 심취하여 몸이 피곤한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어느 날 공이 무릎을 꿇고 묻기를 『사이팔만(四夷八蠻)이 다 독립국(獨立國)이 되었거든 우리는 예의의 나라이며 삼천리 땅인데 중국(中國)에 부용(附庸)되어 능히 팔을 펴지 못하는 것은 위정자(爲政者)가 치민(治民)의 근본을 궁구(窮究)하지 않고 한낱 문(文)의 말기(末技)만 숭상한 고폐(痼弊)로 연유함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충간공이 묵묵히 듣고 계시다가 이르기를 『너는 능히 성현(聖賢)의 경전(經傳)을 숙독(熟讀)하고 호연(浩然)한 기운을 잘 길러 덕을 이룬 후에 관직에 나가 정사를 의논함이 가하다.』하였다.   1715 을미(乙未)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1718 무술(戊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경종(景宗) 2년 1722 임인(壬寅) 12월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더니 이듬해 1723 계묘(癸卯) 2월에 상소로서 시폐(時弊)를 낱낱이 들어 바로잡고자 올린 그 수천백언(數千百言)이 굳세고 곧고 간절하여 간신(諫臣)의 체예(體貎)가 있었다. 그러나 도리어 대신(大臣)의 노여움을 사서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좌천(左遷)되어 미처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당하 (892) 였다. 이는 영상(領相) 조태구(趙泰耇)는 스스로 죄를 인책(引責)하여 사직해야 하고, 우상(右相) 최석항(崔錫恒) 이하 중신(重臣)들은 부탕(浮蕩)함을 즐기고 조정을 분렬케 한다고 탄핵(彈劾)한 때문이다. 4년 1724 갑진(甲辰)에 나라에서 불러 낭천현감(狼川縣監)에 임명되었다.   영조(英祖) 4년 1728 무신(戊申)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고, 13년 정사(丁巳)(1737에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나갔더니 한 달이 못되어 비변사문랑(備邊司文郞)으로 들어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승진되었다.   당시 노소로 분당(分黨)되어 각각 자기 의논을 주장하여 나와 같은 자는 군자가 되고 나와 다른 자는 소인이 되는 등 분운착란(紛紜錯亂)하여 도저히 뜻이 귀일(歸一)되지 않아 시국(時局)이 위태롭기에 이르렀다. 주상께서 근심하며 탕평책(蕩平策)을 주장하여 양당(兩黨)을 임용한지 여러 해더니 17년 1741 신유(辛酉)에 우상(右相) 조현명(趙顯命)이 공의 재지와 학문이 보통사람에 뛰어남을 아깝게 여겨 영상(領相) 이광좌(李光佐)와 비변당상(備邊堂上) 이종성(李宗城)과 같이 탑전(榻前)에 주달(奏達) 하기를 『수원(壽垣)이 귀는 비록 먹었으나 저술한 우서(迂書)는 가히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대의론(大議論)입니다.』 하였다. 주상께서 그 책을 가져오라 명하시고 열람한 후에 입대(入對)하라 명하시었는데 귀머거리라서 능히 대화(對話)로 통하지 못하고 필담(筆談)으로 그 이해와 편부(便否)를 쓰게 하셨으니 이는 특이한 예우였다. 주상께서 정원(政院)에 전하여 이르시기를 『지난번에 보내준 류수원(柳壽垣)의 책자를 어제 다 열람하였는데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문자(文字)를 아는 자는 모두 선유(先儒)의 설화(說話)를 모아서 공교(工巧)함을 찾는데 불과하거늘 이 사람은 복중(腹中)에서 나온 뜻을 썼으니 진실로 귀하다. 또 나보다 나은 것이 있으니 나는 가히 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그 행하지 못할까 두려워 처음부터 말을 내지 못했는데 이 사람은 한갓 말로 하지 않고 글로 썼으니 이는 실로 나보다 낫다.』 하시며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을 제진(製進)하라 명하시는 한편 회천법(回薦法)을 폐하였다.   이른 바 우서(迂書) 10권은 그 학교(學校), 전제(田制), 문벌(門閥), 조세(租稅), 부역(賦役), 노비(奴婢), 조폐(造幣) 등을 논하였는데 민생의 이용(利用)과 후생에 이롭게 쓰이지 않음이 없으니 진실로 전현(前賢)이 발표하지 못한 것을 확충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신이 이르기를 『국가의 쌓인 폐단(弊端)이 골수(骨髓)에 사무쳐 들었음을 평론(評論)하고 이어 변통하여 바로잡을 계책(計策)을 말함이니 비록 시용(試用)되지 못하였으나 그 견식과 언의는 일세(一世)에 뛰어난 것이라.』하였다. 31년 1755 을해(乙亥) 2월에 공이 나주(羅州)의 괘벽서(掛壁書) 사건에 연루 (893) 되고 5월 토역경하정시(討逆慶賀廷試)의 변서(變書)에 또 연루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이 때 심(沈) 확(鑊)이 형(刑)에 임하여 큰소리로 말하기를 『수원(壽垣)의 언론(言論)은 가히 나라를 위한 충성이요 대역(大逆)을 도모함이 아니었다. 내가 수원으로 더불어 함께 죽으니 나의 죽음이 영광스럽다.』라고 운운하였다.

 

聾菴公壽垣事蹟

 

公諱壽垣字南老號聾菴又號迃儒子通德郞鳳庭子大司諫尙載孫文簡公寬十一世孫 肅宗二十年甲戌生于忠州新堂洞幼而穎悟見物致思出人意表七歲就學于從祖忠簡公尙運書凡一讀能離句讀輒誦不忘忠簡公奇之曰孺子可敎十五歲百家九流無不淹貫其於古今治亂得失辨析如流聽者心醉不覺軆憊公一日跪問曰四夷八蠻皆爲獨立以吾禮義之邦三千里之地附庸於中國不能揚臂於天下者豈非由爲政者不究治本徒尙文末之痼弊耶忠簡公黙然良久曰汝能熟讀聖經善養浩氣德成然後出仕論政可也乙未中進士戊戌擢文科 景宗二年壬寅冬十二月拜司諫院正言翌年癸卯二月上疏列擧時弊而矯救之其數千百言讜直剴切得諫臣之體而反被大臣之怒出補禮安縣監未赴旋罷盖以領相趙泰耇引罪辭職右相崔錫恒以下重臣等皆稱喜習浮蕩潰裂朝著之人而彈劾故也四年甲辰召拜狼川縣監 英祖四年戊申拜司憲府持平十三年丁巳出補丹陽郡守未朞月而久爲備邊司文郞歷司諫院正言陞司憲府掌令時老少分黨各持其論同我者爲君子異我者爲小人紛紜錯亂末由歸一幾乎危國 上憂之主蕩平策任用兩黨累年十七年辛酉右相趙顯命惜公才學超倫與領相李光佐備邊堂上李宗城奏于 榻前曰壽垣耳雖聵所著迂書可謂經國濟世之大議論 上命進其册覽畢又 命入對聾不能通話俾筆談其利害便否乃異數也 上傳于政院曰頃日所進柳壽垣册子昨日盡覽而大抵我國人爲文字者不過類聚先儒說話以求工巧而此人則皆自腹 (891) 中以書之誠可貴矣又有勝於我者予則居可爲之地而懼其不行初不言之此人則不徒言之乃筆之於書此實勝於我也命製進官制序陞圖說仍廢回薦法焉所謂迂書十卷其論學校田制門閥租税賦役奴婢造幣等莫非民生利用厚生之事寔擴前賢之未發故史臣曰評言國家積弊透入骨髄而繼言變通矯救之策雖未試用而見識言議超出一世三十一年乙亥二月公辭連羅州掛壁書五月討逆慶賀庭試又連變書坐死刑沈䥃臨刑大言曰壽垣所言可以見爲國盡忠非謀大逆而我與壽垣同死我死爲榮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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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319  사월당공(시번)묘갈명 (沙月堂公(時藩)墓碣銘) 327     편집인 2012/11/29  [1165]  
318  수촌공(발)약사 (秀村公(發)略事) 326     편집인 2012/11/29  [880]  
317  농수공(정서)묘표 (聾수公(廷瑞)墓表) 325     편집인 2012/11/29  [855]  
316  학유공(추성)약사 (學諭公(樞星)略事) 324     편집인 2012/11/29  [893]  
315  예조참판공(중무)약사 (禮曹參判公(重茂)略事) 323     편집인 2012/11/29  [1058]  
314  통상공(중기)약사 (統相公(重起)略事) 322     편집인 2012/11/29  [822]  
313  귀정공(사온)묘갈명 (龜亭公(思溫)墓碣銘) 321     편집인 2012/11/29  [984]  
312  자인공(덕중)약사 (慈仁公(德中)略事) 320     편집인 2012/11/29  [798]  
311  호조정랑공(영)약사 (戶曹正郞公(泳)略事) 319     편집인 2012/11/29  [1040]  
310  박사공(성홍)약사 (博士公(聖洪)略事) 318     편집인 2012/11/29  [888]  
309  한림공(수함)약사 (翰林公(壽咸)略事) 317     편집인 2012/11/29  [833]  
 롱암공(수원)사적 (聾菴公(壽垣)事蹟) 316     편집인 2012/11/29  [921]  
307  사헌부집의공(필원)약사 (司憲府執義公(弼垣)略事) 315     편집인 2012/11/29  [997]  
306  황간공(여림)약사 (黃澗公(汝霖)略事) 314     편집인 2012/11/29  [966]  
305  병조좌랑공(일상)행장 (兵曹佐郞公(一相)行狀) 313     편집인 2012/11/29  [939]  
304  사제수사공(징구)사제문 (賜祭水使公(徵龜)賜祭文) 312     편집인 2012/11/29  [804]  
303  염재공(영)묘표 (濂齋公(渶)墓表) 311     편집인 2012/11/29  [1004]  
302  경원부사증병조참판류공(경천)사장 (慶源府使贈兵曹叅判柳公(擎天)事狀) 310     편집인 2012/11/29  [975]  
301  매돈공(광선)묘지명 (梅墩公(廣善)墓誌銘) 309     편집인 2012/11/29  [864]  
300  수초당공(현)묘갈명 (遂初堂公(俔)墓碣銘) 308     편집인 2012/11/29  [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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