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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사월당공(시번)묘갈명 (沙月堂公(時藩)墓碣銘) 327

사월당공(시번)묘갈명

沙月堂公(時藩)墓碣銘

 

  내가 류군이주(柳君爾冑)와 우의가 좋았는데 류군(柳君)은 성품이 정성스럽고 강직하여 옛 가풍(家風)이 있었다. 내가 정주(定州) 고을을 다스릴 때 류군은 용천(龍川) 고을을 다스려 지역이 서로 가까움으로 내왕(來往)하면서 더욱 서로 좋아하였다. 어느날 그 가승을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나의 육대조(六代祖) 사월당공(沙月堂公)은 도학을 닦음이 있었는데 때를 만나지 못하였고, 문호(門戶)가 쇠잔하고 후손들이 잔미하여 세대가 오래 갈수록 사적이 더욱 없어지고 지금은 그 연보와 행록과 약간의 시문만 남아 있으니 일언을 도와주시어 남은 행적이 없어지지 않게끔 해주시기 바랍니다.』하였다. 내가 그 요 (908) 청을 중히 여기어 감히 사양치 못하고 드디어 받아서 다 살펴보고 쓰노라.   공의 휘는 시번(時藩)이요, 자는 위중(衛仲)이니 계통이 문화에서 나왔다.   고려(高麗) 때 곤산부원군(崑山府院君) 휘 익정(益貞)과 문하찬성(門下贊成) 휘 번(蕃)이 계시어 양대(兩代)에 크게 드러났었다. 3세를 전하여 휘 영계(英繼)는 조선초(朝鮮初)에 호조판서(戶曹判書)이며, 또 5세를 전하여 휘 보(葆)는 관직이 참봉(叅奉)이니 공의 증조(曾祖)이다. 조(祖)는 휘 연양(延陽)이요, 고(考)는 휘 요신(堯臣), 호 연정(蓮亭)이니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적이 드러났고 품계는 통정(通政)이며, 비(妣)는 곡성신씨(谷城申氏)니 선교랑(宣敎郞) 침(琛)의 따님이다.   공이 선조(宣祖) 1569 기사(己巳) 4월 초4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재주가 총명하고 뛰어나 7세에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읽고 9세에 곽괴헌(郭槐軒) 재겸(再謙)을 스승으로 좇아 성동(成童)이 되기 전에 여러 경서와 사서를 모두 통달하였다. 나이 18세에 개연이 도에 뜻함이 있어서 정한강(鄭寒岡) 구(逑)와 서악재(徐樂齋) 사원(思遠)과 장려헌(張旅軒) 현광(顯光)과 손모당(孫慕堂) 처눌(處訥) 같은 여러 선생을 좇아 덕행과 학업을 닦은지 수년 후에 여러 선생들이 모두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 기대하였고, 손모당(孫慕堂)은 나이를 잊고 벗으로 사귀어 더욱 많은 칭찬을 하셨다. 간간히 과거공부를 하여 수차 향시(鄕試)에 응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어버이의 뜻에 따름이지 자신의 뜻은 아니었다.   1597 정유(丁酉)에 왜란이 평정됨에 부친 연정공(蓮亭公)을 모시고 해서(解西) 시골집에 돌아와 어버이를 섬김에 새벽으로 문안드리고 저녁으로 보살피며 맛좋은 음식으로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고, 상사에는 슬픔을 다하고 제사에는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니 보는 사람들이 감동하여 열복(悅服)하였다.   1616 병진(丙辰) 이후로는 벼슬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더욱 학업에 전력하고 자신의 수양(修養)을 위하여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저술한 여러 가지 책으로부터 퇴계선생(退溪先生)의 언행록(言行錄)에 이르기까지 시렁에 가득 쌓아 정돈해놓고 책상을 정결하게 하여 아침 저녁으로 익혀서 노경(老境)에 이르도록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당시의 동지(同志)로는 이석담(李石潭) 윤우(潤雨)와 채투암(蔡投巖) 몽연(夢硯)과 정양계(鄭暘溪) 호인(好仁) 같은 분들이니 모두가 학업에 정진하여 때로는 글로써 모임을 가져 스스로 즐기었다. 오래도록 원임(院任)을 지내면서 손모당(孫慕堂)과 함께 주선하여 후생들을 교육시키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909)   만년(晚年)에 또 사월호(沙月湖) 근처에 집을 지어 사월당(沙月堂)이라 자호(自號)하고 집 앞에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매양 꽃이 피고 달이 밝을 때면 평복(平服)에 유건(儒巾)을 쓰고 그 연못 곁을 거닐며 산책하니 사람들이 바라봄에 그 인품이 결백하고 초연하여 인간 사회에는 뜻이 없어 보였다.   인조(仁祖) 1640 경진(庚辰) 5월4일에 별세하시니 향년 72세였으며 대구(大邱) 해북(解北) 비현산(棐峴山) 경좌(庚坐)의 언덕에 장례(葬禮)를 모시었다.   배위(配位) 양성리씨(陽城李氏)는 색(穡)의 따님으로 명종(明宗) 병인(丙寅)(1566 2월 11일생인데 인조(仁祖) 1642 임오(壬午) 7월 24일에 별세하시어 대구(大邱) 해동(解東) 옛 살던 곳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례를 모셨으니 공의 묘역과는 다른 곳이다.   세 아들을 두었으니 종언(宗彦)은 무후(無後)하고 종경(宗慶)과 종화(宗和)이다. 손(孫)에 재발(再發)과 재흥(再興)은 종경(宗慶)의 아들이며, 재창(再昌)과 재영(再榮)은 종화의 아들이다. 재발의 아들은 석화(碩華)이니 증장악원정(贈掌樂院正)이며, 석화의 장자는 익서(翊瑞)이고 차자는 희서(希瑞)이니 증호조참의(贈戶曹叅議)이다. 희서(希瑞)의 아들은 영삼(榮三)이니 증호조참판(贈戶曹叅判)이며, 영삼의 아들은 곧 이주(爾冑)이니, 이상 삼대에 증직을 받은 것은 이주(爾冑)가 귀히 된 때문이다. 재흥(再興)의 아들은 만엽(萬葉)이요, 재창(再昌)의 아들은 팽로(彭老)와 팽구(彭耉)요, 재영(再榮)의 아들은 팽령(彭齡)이다. 만엽(萬葉)의 아들은 성오(成五)요, 팽로의 아들은 승후(升垕)이다. 내외로 여러 후손들이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아! 공께서 70여년 동안 행실이 돈독한 군자였으니 가히 드러낼만한 행실이 어찌 한두가지 뿐이리오만은 아깝게도 고가(故家)의 문헌(文獻)으로 증거가 없고 다만 거의 유실되고 남은 문자로서 공의 사행을 알려하니 어렵도다. 오직 그 부모의 거상 중에 슬퍼하고 간소하게 함에 정성을 다하여 대(大) · 소련(小連)의 행실이 있었으며, 학문의 강론을 난리에도 폐하지 아니하여 허로재(許魯齋)(원(元)나라 학자 허형(許衡))의 풍취가 있었다. 교류한 사람은 선생과 장자(長者) 뿐만 아니라 당시에 시를 잘하고 글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공의 시문(詩文)이 전아(典雅)하고 질박(質朴)하여 그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책을 짊어지고 문에 찾아온 사람이 많았으며, 공이 돌아가심에 조문하고 부의(賻儀)하는 사람들이 온 고을을 기울였다. 선비들의 공의로서 손모당(孫慕堂)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부제(袝祭)(배향(配享))하였다. 공의 성실한 행적과 돈독한 행실이 비록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였으나 (910) 가히 한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 명(銘)을 지어 이르노니.   비현산(棐峴山) 언덕이 푸르고 푸르름이여!   초동(樵童)과 목동(牧童)이 어찌 현자(賢者)의 무덤에 가까이 하랴?   학문(學問) 이 넉넉했는데 운수가 막혔고 몸은 숨겼으나 명망(名望)이

드러났도다.   끼친 음덕(蔭德)이 멀리 뻗치어 후손이 크게 창성하도다.

통정대부전사간원대사간류강근찬

 

沙月堂柳公時藩墓碣銘

 

余與柳君爾冑善君慤直有故家風及余治定州君爲龍川地相去近來往益相與一日以其家乘授余而言曰吾六代祖沙月堂公有道而不偶門衰裔微世遠而迹愈湮今其年譜行錄曁若干詩文在願藉一言以圖不朽余重其請不敢辭遂受而卒業焉公諱時藩字衛仲系出文化麗時有崑山府院君諱益貞門下贊成諱蕃兩世大顯三傳而有諱英繼國初戶曹判書又五傳而有諱葆官叅奉於公爲曾祖祖諱延陽考諱堯臣號蓮亭壬辰亂倡義著績階通政妣谷城申氏宣敎郞琛女也公以隆慶己巳四月初四日生幼而明穎七歲渉書史九歲從師郭槐軒成童以前盡通群經四書年十八慨然祉從於鄭寒 (907) 岡徐樂齋張旅軒孫慕堂諸先生薰陶進益盖有年諸先生皆以遠大期慕堂以忘年畏友尤加獎詡間爲擧業屢鄕解不利爲親屈而非其志也丁酉亂定奉蓮亭公歸解西田廬定省甘旨服勞盡誠執喪哀戚甚祭先愛慤兩至觀者感悅丙辰以後絶意進取尤肆力於進學自修自洛閩諸書至退陶言行架齊整几案肅潔朝肄暮習到老彌篤一時同志如李石潭潤雨蔡投巖夢硯鄭暘溪好仁切嗟講磨會以文自娛久居院任與慕堂同周旋敎迪後生不怠晚又築室於沙月湖邊仍以自號鑿池種蓮每花開月白山巾野服逍遙其上人望之灑落無塵世意庚辰五月初四日考終享年七十二葬于大邱解北棐峴庚坐之原配陽城李氏穡之女生於丙寅二月十一日卒於壬午七月二十四日葬于大邱解東舊庄艮坐之原與公異塋擧三子曰宗彦无后宗慶宗和曰再發再興宗慶出也曰再昌再榮宗和出也再發子碩華 贈掌樂正碩華子翊瑞次子希瑞 贈戶曹叅議希瑞子榮三 贈戶曹叅判榮三子卽爾冑三世貤 贈以爾冑貴也再興子萬葉再昌子彭老次子彭耉再榮子彭齡萬葉子成五彭老子升垕內外雲仍多不盡記噫公七十年篤行君子其可見之行豈止一二而惜乎故家之文獻無徵只以爛缺文字執跡而求公之所存難矣第其居喪也戚易兩盡有大小連之行其講學也亂離不廢有許魯齋之風所交遊非先生長者卽一時善流詩文典而質讀之如對其人居窮而負笈踵門易簀而弔賻傾邑以士林議袝食於慕堂靑湖院享實跡惇行雖不能措之世而猶可驗之一鄕焉銘曰 棐之原兮蒼蒼無俾樵牧焉近於賢者藏學富而塞身闇而章其光遠而後昌

通政大夫前司諫院大司諫柳焵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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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사월당공(시번)묘갈명 (沙月堂公(時藩)墓碣銘) 327     편집인 2012/11/29  [1164]  
318  수촌공(발)약사 (秀村公(發)略事) 326     편집인 2012/11/29  [879]  
317  농수공(정서)묘표 (聾수公(廷瑞)墓表) 325     편집인 2012/11/29  [855]  
316  학유공(추성)약사 (學諭公(樞星)略事) 324     편집인 2012/11/29  [892]  
315  예조참판공(중무)약사 (禮曹參判公(重茂)略事) 323     편집인 2012/11/29  [1058]  
314  통상공(중기)약사 (統相公(重起)略事) 322     편집인 2012/11/29  [822]  
313  귀정공(사온)묘갈명 (龜亭公(思溫)墓碣銘) 321     편집인 2012/11/29  [983]  
312  자인공(덕중)약사 (慈仁公(德中)略事) 320     편집인 2012/11/29  [797]  
311  호조정랑공(영)약사 (戶曹正郞公(泳)略事) 319     편집인 2012/11/29  [1040]  
310  박사공(성홍)약사 (博士公(聖洪)略事) 318     편집인 2012/11/29  [887]  
309  한림공(수함)약사 (翰林公(壽咸)略事) 317     편집인 2012/11/29  [832]  
308  롱암공(수원)사적 (聾菴公(壽垣)事蹟) 316     편집인 2012/11/29  [921]  
307  사헌부집의공(필원)약사 (司憲府執義公(弼垣)略事) 315     편집인 2012/11/29  [997]  
306  황간공(여림)약사 (黃澗公(汝霖)略事) 314     편집인 2012/11/29  [966]  
305  병조좌랑공(일상)행장 (兵曹佐郞公(一相)行狀) 313     편집인 2012/11/29  [939]  
304  사제수사공(징구)사제문 (賜祭水使公(徵龜)賜祭文) 312     편집인 2012/11/29  [804]  
303  염재공(영)묘표 (濂齋公(渶)墓表) 311     편집인 2012/11/29  [1004]  
302  경원부사증병조참판류공(경천)사장 (慶源府使贈兵曹叅判柳公(擎天)事狀) 310     편집인 2012/11/29  [974]  
301  매돈공(광선)묘지명 (梅墩公(廣善)墓誌銘) 309     편집인 2012/11/29  [863]  
300  수초당공(현)묘갈명 (遂初堂公(俔)墓碣銘) 308     편집인 2012/11/29  [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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