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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군자감정불후당공(백승)묘지명 (軍資監正不朽堂公(百乘)墓誌銘) 296


군자감정불
후당공(백승)묘지명

軍資監正不朽堂公(百乘)墓誌銘

 

  고(故) 군자감정(軍資監正) 류공(柳公)이 불후당(不朽堂)이라 자호(自號)하였는데 우암(尤菴) 송선생(宋先生)이 그 편액(扁額)을 쓰고, 또 기(記)를 지어「내외경중(內外輕重)의 분별을 살펴 뛰어나게 뜻을 스스로 세웠다.」는 말씀이 있었으니, 그 기대가 긴요하고 중대하셨도다.   공이 숙종(肅宗) 1689 기사(己巳)에 민비(閔妃)를 폐위(廢位)하고 장희빈(張禧嬪)을 정비(正妃)로 삼은 변란을 당하여 당시 강진현감(康津縣監)으로 임소(任所)에 있으면서 비분(悲憤)을 이기지 못하고 이르기를 「몸을 깨끗이 자취를 감추는 것이 지금에 당하여 제일의 의리이다.」하고, 드디어 관직을 버리고 돌아옴으로써 금고(禁錮)를 당하여 10년을 지냈었으나 뉘우치지 않았다.   1713 계사(癸巳)에 이르러 산반(散班)으로서 상소로 춘추대의(春秋大義)로서 중화(中華)를 존숭하고 이적(夷狄)을 배척하는 의리를 진언하고, 효종(孝宗)의 북벌(北伐)의 뜻을 계술(繼述)할 것을 청하다가 승정원(承政院)의 미움을 받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또 탄식하여 말하기를 「슬픔을 참고 원통함을 먹음어 궁박함을 어쩔 수 없다.」는 「인통함원박부득이(忍痛含冤迫不得已)」 팔자로 심중을 토로하며, 장차 어쩔 수 없게 되자, 드디어 세상에 나설 뜻을 포기하고 향리로 물러나 그 몸을 마쳤으니, 공과 같은 분은 진실로 내외경중의 분별을 살펴 뛰어나게 뜻을 스스로 세워 불후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은 분이라 이를 진져! 아아 아름답도다!   공의 휘는 백승(百乘)이요, 자는 중차(仲車)이다.   문화류씨(文化柳氏)는 고려(高麗) 때 대승(大丞) 휘 차달(車達)을 시조(始祖)로 하여 많은 공경(公卿)(고관대작(高官大爵))을 배출했으니 문정공(文正公) 휘 경(璥)은 적신(賊臣) 최(崔) 의(竩)를 주살(誅殺)하여 왕실에 정사를 회복시켰으며, 정신공(貞愼公) 휘 승(陞)은 학문을 즐기고 의례(儀禮)를 좋아하여 사림(士林)에서 공경하고 표본을 삼았다. 우리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지평(持平) 휘 인홍(仁洪)은 일찌기 남(南) 곤(袞) · 심(沈) 정(貞)의 흉악하고 사특함을 알아 배척하였으며, 삼세(三世)를 내려와 휘 여정(汝精)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어가(御駕)를 의주(義州) 용만(龍灣)까지 호종(扈從)하여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취임하지 않 (823) 았으니, 이 분은 공(公)의 증조(曾祖)이다. 조(祖)는 휘 성하(成廈)인데 사계선생(沙溪先生)을 사사(師事)하여 행의(行誼)로 명망이 있었으며, 선고(先考)는 휘 진(溍)인데 중형(仲兄) 운강공(雲江公) 항(沆)으로 더불어 함께 신독재선생(愼獨齋先生)의 문하(門下)에 종유(從遊)하여 세상에서 이난(二難), 곧 우렬(優劣)을 가리기 힘든 형제라 칭송하였으며, 선비(先妣)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인근(仁根)의 따님 이다.   공은 겨우 말을 배우면서 문득 문자(文字)를 알더니 12세에 연적명(硯滴銘)을 지어 이르기를 「그릇은 작으나 공(功)이 많으니 제국(齊國)의 관중(管仲)이요, 속은 비고 밖은 아름다우니 한가(漢家)의 진평(陳平)이라.」하니, 안식이 있는 분들이 뛰어난 재주라 칭찬하였다.   숙종(肅宗) 1675 을묘(乙卯)에 생원(生員)에 급제하고, 1683 계해(癸亥)에 문과(文科)에 급제, 처음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었는데, 사감(私憾)으로 저지하는 자가 있어 성균관(成均館)으로 옮기니 공의가 애석히 여기었다. 주서(注書)로 입대하였는데 주상께서 강(講)을 명하사 그 음성(音聲)이 맑고 해석이 정연함을 아름답게 여기시고 연령과 가계를 물으셨으니 특이한 은총이었다.   1685 을축(乙丑)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1686 병인(丙寅)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옮겼더니 1687 정묘(丁卯)에 태릉(泰陵)의 석의(石儀)를 개수(改竪)할 때 낭청(郞廳)으로 일을 감독하고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내었다.   1688 무진(戊辰)에 강진현감(康津縣監)으로 나갔는데 이는 부모를 가까이 모시기 위함이었다. 고을이 원래 못된 폐단(弊端)이 많아 남들은 모두 부임을 싫어하고 회피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국록(國祿)을 먹는 자가 좋고 나쁜 곳을 어찌 가리겠는가?」하고, 즉시 부임(赴任), 모든 조치를 법도있게 처리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심히 편안케 하였다.   이듬해 관직을 그만 두고 돌아오니, 당로(當路)(요직(要職))의 높은 자들이 공이 국모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위하여 스스로 정양(靖養)코자 함을 미워하고 기어히 중상(中傷)함으로서 수차 의금부(義禁府)에 잡혀가 처벌을 받다가 1692 임신(壬申)에 연산(連山)으로 유배되었더니 1693 계유(癸酉)에 사면되어 돌아왔다.   1699 기묘(己卯)에 이르러 비로소 견복(甄復)되어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정랑(正郞)을 지내고, 1701 신사(辛巳)에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 서천군수(舒川郡守)를 지냈는데 어질고 너그러우며 청렴간결하게 백성을 다스림에 두차례나 어사(御史)의 포계(褒啓)를 얻어 준직(準職)을 받는 어명이 있었으나 제대로 시행(施行)되지 않아 만기(滿期)로 교체되니 사민(士民)들이 수레를 붙들고 떠남을 애석히 여기었다. (824)   1707 정해(丁亥)와 1708 무자(戊子)에 연이어 내간(內艱)(모상(母喪))과 외간(外艱)(부상(父喪))을 당했는데 공의 나이 이미 60이 가까웠는데도 집제(執制)를 매우 엄히 행함으로써 몸이 쇠약해져 겨우 지탱하였다.   복(服)을 마친 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1713 계사(癸巳)에 순천부사(順天府使)로 나갔는데, 적신(賊臣) 류봉휘(柳鳳輝)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와 무고함으로써 파직을 당했던바, 주상께서 그 죄가 아님을 밝게 살피시고 유임을 특명하였으나 공께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다시 관로(官路)에 발을 들이지 않고 6년을 지나는 동안 오직 시서를 강론하고 자손을 가르치는 것으로 만년의 사업을 삼았다. 그리고 가절(佳節)을 당하면 관동(冠童)들을 거느리고 산수 사이를 노닐으니 가히 속세를 벗어난 기상(氣像)이 있었다.   1718 무술(戊戌) 9 월18일에 졸하니, 그 출생은 효종(孝宗) 1652 임진(壬辰) 11월13일로 수67세였다. 처음에 전주(全州) 부산(釜山)에 장사(葬事)했다가 후에 고산(高山) 봉덕산(鳳德山) 미좌(未坐)의 언덕으로 천장(遷葬)하였다.   배위(配位) 진주소씨(晋州蘇氏)는 이인(爾寅)의 따님으로 어진 덕이 있었는데, 공보다 1년 먼저 태어나 공보다 2년 후에 돌아가시니 묘소는 합부(合祔)하였다.   삼남삼녀를 출생하였으니, 아들에 일성(一星)이요, 일운(一運)은 출후(出后)(출계(出系))하고, 일상(一相)은 문과(文科)에 급제, 좌랑(佐郞)을 지냈으며, 따님은 최일복(崔一復)과 이단항(李端恒)과 이명윤(李命胤)에게 출가하였다. 손(孫)에 관휘(觀輝) · 복휘(復輝) · 점휘(漸輝) · 건휘(健輝)와 이태백(李泰白)의 처(妻)는 장방(長房) 소생이며, 이휘(頤輝) · 태휘(泰輝) · 익휘(益輝)는 차방(次房) 소생이며, 택휘(宅輝) · 사휘(思輝)와 장언경(張彦經) · 남수엽(南守燁)의 처(妻)는 계방(季房) 소생이다.   공은 자품이 청숙하고 의용(儀容)이 단중(端重)하여 겉으로는 화유(和柔)한 것 같았으나 안으로는 실로 견확(堅確)하여 이해로써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의 비굴하고 거친 태도를 보면 준절히 꾸짖어 조금도 가차가 없었다.   본래 성품이 강개(慷慨)하여 기절을 숭상하더니, 일찌기 삼전도(三田渡)를 지내다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 「가련하다 한 조각 저 석물(石物)이여! 삼한(三韓)의 수치를 길이 간직하였도다.」하였는데, 지금까지 전송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털을 곤두세우게 하였다.   자제들을 가르침에 반드시 충효를 일러 이르되 「사람으로서 불충 불효의 웅덩이에 빠지는 것은 물욕(物慾)에 가려진 것이다.」하였으니, 이는 맹자께서 이르신바 인욕(人慾)을 끊어 인의(仁義)를 행하는 근 (825) 본을 삼으라는 뜻이었다.   공께서 관직에 있을 때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고, 빈한한 족척(族戚)을 돕되 더우기 혼가(婚嫁)의 도움에 성의를 다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올 때 이르러선 끼니를 잇기 어려운 근심이 있었으나 처신함은 태연하고 침착하였다.   혹 어떤 사람이 산업을 경영할 것으로 말하면 공이 이르되「가난하고 넉넉함은 명이다. 분수 밖에 구할진데 다만 그 허물만 더할 따름이다.」하였다.   경사(京師)에서 벼슬살이 할 때 권세 있는 가문에 발을 들여 놓음을 수치로 여기고 가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에게 평생토록 말살을 당하였으나 또한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유독 죽천김공진규(竹泉金公鎭圭)와 지내는 정의가 각별하였으니 이는 고상하고 맑은 절조를 서로 아름답게 여긴 때문이며, 이우당(二憂堂) 조충익공태채(趙忠翼公泰采)가 역시 승류(勝流)로 대하여 금화(金華)의 선비보다 넘음이 있었으니 또한 가히 나무를 보고 산을 알겠도다.   총명함이 보통 사람에 넘어 서사를 두루 읽되 한번 보면 문득 기억하고, 붓을 잡으면 문장을 이루되 말과 이치가 모두 부합하였다.   농암(農巖) 김문간공창협(金文簡公昌協)이 북막(北幕)을 도우려 길을 떠나면서 전별(餞別)의 글을 청했는데, 공이 즉석에서 지어 줌에 농암(農巖)이 가작(佳作)이라고 극히 칭찬하였다.   공의 유고(遺稿) 수십권이 본가에 소장되어 있다.   아아! 공의 인격과 문벌이며 포부로써 마땅히 크게 뜻을 폈어야 할 터인데, 오래토록 남 밑에 눌려 크게 쓰이지 못하고 뜻을 품은채 돌아가셨으니 이것이 가히 한스럽도다. 그러나 기사(己巳)와 계사(癸巳) 양년(兩年)의 일은 족히 인륜의 기강(紀綱)을 세우고 세상의 정도를 붙들므로써 간책(簡册)에 전하여 훌륭한 명성이 무궁(無窮)하니, 그 일시(一時)에 높은 벼슬로 이름이 있다가 인몰(湮沒)되어 일컫지 않은 자로 더불어 비교할진대 드러나고 묻침과 얻고 잃음이 어떠하겠는가?   공의 외손 이생인달(李生寅達)이 와서 묘비에 새길 글을 청하는바, 불녕(不佞)이 본래 공의 행치(行治)(사적(事蹟))를 감복하고 있는 터에 또 금년이 마침 공이 관직을 버린 해인지라, 더욱 감모(感慕)함이 깊어 마침내 회헌(悔軒) 조문간공관빈(趙文簡公觀彬)의 묘갈명(墓碣銘)과 남곡(楠谷) 송공근수(宋公近洙)의 행장(行狀)을 살펴 서술(叙述)하고 명(銘)을 지어 명에 이르노니, (826)   아아! 류공(柳公)이시여, 누구만 같지 못하리까?   순량(循良)의 자취 크셨는데 공경(公卿)이 못되셨던가?   오직 간결하고 곧았는데 때를 만나지 못한 일생이었네.   사정(寺正)의 한 관직, 누가 청렴하다 않으리요?   기사(己巳)·계사(癸巳) 양년(兩年)에 뜻 세움이 뛰어났도다.   삼전도(三田渡)의 일시(一詩)는 나약하고 완악한 사람 뜻 세우고 청렴하리라.   이는 그 큰 사적인바, 백세토록 전하리라.   내가 간추려 명(銘)을 지은바, 지조(志操) 없는 자를 깨우치노라.

숭정오기사맹하일

서하임헌회찬

 

軍資監正不朽堂柳公百乘墓誌銘

 

故軍資監正柳公自號曰不朽堂尤菴宋先生題其額又爲之記有審於內外輕重之分卓然自立語其期待綦重矣公於己巳見瑤華之變時在康津任所不勝悲憤曰潔身歛迹是爲當今第一義遂投紱而歸被錮十年而不悔至癸巳以散班疏陳春秋尊攘之義請繼述 寧陵志事爲喉司所尼公又歎曰忍痛含冤迫不得已八字其將無地可講遂無復當世意退居鄕里以終其身若公眞可謂審內外輕重之分卓然自立不負不朽之名者歟於乎休哉公諱百乘字仲車文化氏以高麗大丞諱車達爲鼻祖累公累卿文正公諱璥誅賊臣崔竩復政王室貞愼公諱陞好學愛禮士林矜式入我 朝持平諱仁洪早辨袞貞凶邪歷三世諱汝精壬辰以太學生扈 駕龍灣拜軍資直長不就是爲公曾祖祖諱成廈師事沙溪先生有名行考諱溍與仲氏雲江公沆俱遊愼齋先生門世稱二難妣全義李氏仁根其考也公甫學 (821) 語便解文字十二歲作硯滴銘曰器小功多齊國管仲中虛外美漢家陳平具眼獎以絶才 肅廟乙卯生員癸亥文科始隷槐院有以私憾沮之者改國子公議惜之以注書入對 上命講嘉其音淸而釋精下詢年紀家世異數也乙丑典籍丙寅禮曹佐郞丁卯 泰陵改石郞廳兵曹佐郞戊辰康津縣監爲養也邑多弊瘼人莫不厭避公則曰食君之祿夷病奚擇往赴焉措畫有方民甚便之翌年賦歸當路者惡公之爲國母自靖必欲中傷屢被拿勘壬申配連山癸酉赦還至己卯始甄復禮兵曹正郞辛巳忠淸都事舒川郡守仁恕廉簡再登繡褒 命授準職寝不施瓜遞士民拚轅惜去丁亥戊子連遭內外艱年已不毀而持制甚嚴幾危僅支服闋成均司藝軍資監正癸巳順天府使賊臣鳳輝按道誣罷 上燭其非罪特命仍任而辭不赴盖自是不復迹榮塗者爲六年惟以講討詩書敎誨子孫爲暮年事業或値佳辰携冠童徜徉泉石間若有出塵之想焉戊戌九月二十八日沒距其生 孝廟壬辰十一月十三日壽六十七初葬全州釜山後遷高山鳳德山未坐之原配晋州蘇氏爾寅之女名有賢德生先公一年沒後公二年墓祔擧三男三女男一星一運出后一相文科佐郞女適崔一復李端恒李命胤觀輝復輝漸輝健輝李泰白妻長房出頤輝泰輝益輝次房出宅輝思輝張彦經南守燁妻季房出公姿稟淸淑儀容端重外若和柔內實堅確不以利害撓其所守見人鄙悖規責不少饒素慷慨尙氣節嘗過三田渡有詩曰可憐一片頑然物長載三韓萬古羞至今誦之令人髮竪訓子弟必以忠孝曰人之陷於不忠不孝之科者物欲蔽之也此孟子所以以遏人欲爲行仁義之本者也居官字窮民恤貧族尤至意於婚嫁之助及歸至有屢空之患而處之晏如也或以營産爲言則曰貧富命也分外有求祗益其過耳宦遊京師恥曳裾權門坐是畢生抹摋亦不介意獨與竹泉金公鎭圭托契賞音盖以高潔相尙也二憂堂趙忠翼公泰采亦待以勝流有踰於金華之彦亦可以見木知山也聰慧過人渉獵書史過目輒記操筆成章辭理俱到農巖金文簡公昌協佐北幕臨行索贐語公卽席副急農巖亟稱其佳作有遺稿數十呇藏于家噫以公人地負抱宜若大展而困於積薪齎志而圽是可恨也然己癸兩年事有足以立人紀而扶世道傳之簡册令名無疆其與一時金紫名湮沒而不稱者顯晦得失何如也公彌甥李生寅達來謁玄隧之文不佞素服公行治且今年適値公投紱之歲尤有所曠感遂就悔軒趙文簡公觀彬之銘楠谷宋公近洙之狀 (822) 按而敍之仍爲之銘銘曰 嗟嗟柳公誰之不如粗迹循良而不公孤惟其簡亢坎壈一生寺正一銜孰云非淸二巴之歲樹立卓然三田之詩立懦廉頑是其大者百世不朽我撮作銘用警奊詬

崇禎五己巳孟夏日

西河任憲晦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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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300  수초당공(현)묘갈명 (遂初堂公(俔)墓碣銘) 308     편집인 2012/11/29  [508]  
299  후조헌공(송제)약사 (後凋軒公(松齊)略事) 307     편집인 2012/11/29  [476]  
298  경상병사류공한명행상 (慶尙兵使柳公漢明行狀) 306     편집인 2012/11/29  [392]  
297  병사공(한명)사제문 (兵使公(漢明)賜祭文) 305     편집인 2012/11/29  [422]  
296  원주공(봉령)행장 (原州公(鳳齡)行狀) 304     편집인 2012/11/29  [827]  
295  충정공(봉휘)신도비명 (忠靖公(鳳輝)神道碑銘) 303     편집인 2012/11/29  [624]  
294  홍문교리공(봉서)묘갈명 (弘文校理公(鳳瑞)墓碣銘) 302     편집인 2012/11/29  [587]  
293  청산공(문우)묘갈명 (靑山公(文祐)墓碣銘) 301     편집인 2012/11/29  [561]  
292  현풍현감류공(인수)묘표 (玄風縣監柳公(仁壽)墓表) 300     편집인 2012/11/29  [460]  
291  충청수사공(지경)묘갈명 (忠淸水使公(持敬)墓碣銘) 299     편집인 2012/11/28  [574]  
290  예조좌랑육유당공(사경)약사 (禮曹佐郞六有堂公(思敬)略事) 298     편집인 2012/11/28  [536]  
289  병조참의낙곡공(대화)약사 (兵曹叅議樂谷公(大華)略事) 297     편집인 2012/11/28  [499]  
 군자감정불후당공(백승)묘지명 (軍資監正不朽堂公(百乘)墓誌銘) 296     편집인 2012/11/28  [610]  
287  이천공(경소)묘표 (利川公(景紹)墓表) 295     편집인 2012/11/28  [515]  
286  감사공(경집)묘표 (監司公(景緝)墓表) 294     편집인 2012/11/28  [676]  
285  성천공(도)약사 (成川公(塗)略事) 293     편집인 2012/11/28  [431]  
284  죽산공(희달)묘갈명 (竹山公(希達)墓碣銘) 292     편집인 2012/11/28  [555]  
283  예문관검열공(명립)묘갈명 (藝文館檢閱公(命立)墓碣銘) 291     편집인 2012/11/28  [464]  
282  집의공(창국)행장 (執義公(昌國)行狀) 290     편집인 2012/11/28  [581]  
281  백강공(회근)묘갈명 (栢岡公(晦根)墓碣銘) 289     편집인 2012/11/28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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