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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청산공(문우)묘갈명 (靑山公(文祐)墓碣銘) 301

청산공(문우)묘갈명

靑山公(文祐)墓碣銘

 

  고(故) 청산현감(靑山縣監) 류공(柳公)의 휘는 문우(文祐)요, 자는 도보(道甫)이다. 그 체백(體魄)을 간직한 묘소가 청주군(淸州郡) 옥산면(玉山面) 사정리(沙亭里) 유좌(酉坐)의 언덕에 있는데 그 좌측(左側)에 부장(祔葬)은 배위(配位) 숙인(淑人)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묘소이다.   류씨(柳氏)의 시조(始祖) 휘 차달(車達)은 고려(高麗) 초(初)에 익찬훈(翊贊勳)으로 관직이 대승(大丞)에 이르렀는데 대승공(大丞公)의 묘소가 문화현(文化縣)에 있기 때문에 자손들이 문화(文化)로 관적(貫籍)을 삼아 십여세(十餘世) 동안 대관(大官)이 많았다.   고려(高麗) 말엽에 이르러 휘 광수(光秀)는 호 미재(薇齋)로 관직이 평장사(平章事)인데 관직을 버리고 청주(淸州) 남이면(南二面) 등등산(登登山) 속으로 돌아가 은거(隱居)하다가 공민왕(恭愍王)이 시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3년을 심상(心喪)하였다. 미(薇) (841) 재공(齋公)의 제사자(第四子) 휘 총(叢)은 호 죽계(竹溪)인데 처음에 부친을 모시고 청주(淸州) 남쪽에서 은거(隱居)하다가 후에 청주(淸州) 북쪽 풍정리(楓井里)로 옮겨 은거하던 중 우리 조선(朝鮮) 태조(太祖)의 누차 부름을 받았으나 절의(節義)를 지켜 나아가지 않고, 임종(臨終)에 자제(子弟)들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내가 임금을 위해 죽지 못했으니 내가 죽은 후에 묘(墓)를 높이 짓지 말고 비(碑)도 세우지 말 것이며, 성명(姓名)을 세상에 전하지 말라.」하였다. 삼세(三世)를 지내어 휘 지형(之亨)은 보공장군(保功將軍) 구녕만호(仇寧萬戶)인데 곡수(曲水) 성신사(誠信祠)에 향사(享祀)하였으니 공(公)의 6세조이다. 증조(曾祖)휘 인수(麟壽)는 참군만호(叅軍萬戶)요, 조(祖) 휘 옥(沃)은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인데 이서계(李西溪) 득윤(得胤) 선생의 문인으로 학행이 드러났고, 부(父) 휘 정립(正立)은 성균생원(成均生員)이며, 모(母)는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공의 가문은 대대로 문학을 이어 어려서부터 놀이를 서책과 필묵(筆墨) 가운데 떠나지 않고 견문을 널리 익히어 부조(父祖)의 업을 이어 이루었다.   현종(顯宗) 1660 경자(庚子)에 문과(文科)에 등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으로 나갔다가 청산현감(靑山縣監)으로 옮겨 수년을 재임하는 동안 제반 폐단(弊端)을 제거하고 백성의 복지를 위해 정사를 과감히 행하니,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생업이 안정되었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옴에 말 등에는 빈 상자로 한가지 물건도 없었다. 청산(靑山) 고을 백성들이 유임(留任)을 원하였으나 어쩔 수 없으므로 비석(碑石)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는데 그 비석이 지금까지 남아 전한다.   이남일녀를 낳아 장남 진양(震陽)은 칠원현감(漆原縣監)이요, 차남 태양(泰陽)은 선전관(宣傳官)이며, 따님은 청주(淸州) 한필상(韓弼商)의 처(妻)가 되었다. 현감(縣監)은 삼남을 두어 장남 신(伸)은 통덕랑(通德郞)이요, 차남은 위(偉)요, 차남 계(係)는 통덕랑(通德郞)이며, 선전(宣傳)의 아들은 억(億)이요, 따님은 청주(淸州) 한수경(韓壽慶)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류씨(柳氏) · 변씨(卞氏) 양성(兩姓)이 한 고을에 동거(同居)하기 십여세(十餘世)에 혼인으로 친의(親誼)가 있고, 문학으로 교유(交遊)가 있어, 공의 사적을 알기로 나만 같음이 없으니, 근배(根培) · 해렬(海烈) 양군(兩君)이 와서 공의 묘갈명(墓碣銘)을 청함이 마땅하도다. 명사(銘辭)에 이르노니,   오직 공(公)의 재덕(才德)으로, 한 과시(科試)에 선발 되었던바,   붕새가 날개를 장차 펴고, 천리마가 걸음을 뛰고자 했도다.   들어와서 소관(小官)을 지내고, 나가서 산읍(山邑)의 수령(守令)을 지냈는데, (842)   그로써 이르는 곳마다, 덕을 입히고 치화(治化)가 미쳤도다.   비석(碑石)을 세워 덕을 칭송한, 청산(靑山)의 백성들이 있었던바,   이제 또 명사(銘辭)를 새겨,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치노라.

庚子五月 일

팔계변영인근술

 

靑山縣監柳公文祐墓碣銘

 

故靑山縣監柳公諱文祐字道甫衣舄之藏在淸州郡玉山面沙亭里負酉之原祔其左者配淑人丹陽禹氏也柳氏始祖諱車達高麗初以翊贊勳官至大丞大丞公墓在文化縣故子孫仍籍文化十餘世多大官至麗末諱光秀號薇齋以平章事棄官歸隱于淸州南二面登登山中聞恭愍王遇害方喪三年薇齋第四子曰叢號竹溪始奉父于淸州南後移隱于淸州北楓井里我 太祖累徵守節不就臨終戒子弟曰吾不死於君吾死後墓不封不竪碑使姓名勿傳於世三世而諱之亨保功將軍仇寧萬戶享曲水誠信祠公之六世祖也曾祖諱麟壽叅軍萬戶祖諱沃繕工監監役李西溪先生得胤門人以學行著父諱正立成均生員母安東金氏公家世文學自幼嬉戱不離於簡篇筆墨之中見聞擩染繼成父祖之業 顯宗庚子登文科拜成均典籍出爲成歡道察訪遷靑山縣監在任數年弊瘼盡袪吏憚民安及還馬背空箱無一物靑山縣民願留不得則立石頌德其石至今尙存公擧二男一女男長震陽漆原縣監次泰陽宣傳官女爲淸州韓弼商妻縣監三男長伸通德郞次偉次係通德郞宣傳男億女適淸州韓壽慶餘不記柳卞兩姓同居一鄕十餘世有婚姻之親有文學之交知公之事莫我若根培海烈兩君之以公碣銘來請宜哉銘曰 維公才德一試得雋鵬翼將舒驥歩欲展入爲小官出宰山邑然於所在德被化及立石頌德靑山之民今又刻銘以詔後人

庚子五月 日

八溪卞榮寅謹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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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300  수초당공(현)묘갈명 (遂初堂公(俔)墓碣銘) 308     편집인 2012/11/29  [508]  
299  후조헌공(송제)약사 (後凋軒公(松齊)略事) 307     편집인 2012/11/29  [476]  
298  경상병사류공한명행상 (慶尙兵使柳公漢明行狀) 306     편집인 2012/11/29  [392]  
297  병사공(한명)사제문 (兵使公(漢明)賜祭文) 305     편집인 2012/11/29  [422]  
296  원주공(봉령)행장 (原州公(鳳齡)行狀) 304     편집인 2012/11/29  [827]  
295  충정공(봉휘)신도비명 (忠靖公(鳳輝)神道碑銘) 303     편집인 2012/11/29  [624]  
294  홍문교리공(봉서)묘갈명 (弘文校理公(鳳瑞)墓碣銘) 302     편집인 2012/11/29  [587]  
 청산공(문우)묘갈명 (靑山公(文祐)墓碣銘) 301     편집인 2012/11/29  [560]  
292  현풍현감류공(인수)묘표 (玄風縣監柳公(仁壽)墓表) 300     편집인 2012/11/29  [459]  
291  충청수사공(지경)묘갈명 (忠淸水使公(持敬)墓碣銘) 299     편집인 2012/11/28  [574]  
290  예조좌랑육유당공(사경)약사 (禮曹佐郞六有堂公(思敬)略事) 298     편집인 2012/11/28  [536]  
289  병조참의낙곡공(대화)약사 (兵曹叅議樂谷公(大華)略事) 297     편집인 2012/11/28  [498]  
288  군자감정불후당공(백승)묘지명 (軍資監正不朽堂公(百乘)墓誌銘) 296     편집인 2012/11/28  [610]  
287  이천공(경소)묘표 (利川公(景紹)墓表) 295     편집인 2012/11/28  [515]  
286  감사공(경집)묘표 (監司公(景緝)墓表) 294     편집인 2012/11/28  [676]  
285  성천공(도)약사 (成川公(塗)略事) 293     편집인 2012/11/28  [431]  
284  죽산공(희달)묘갈명 (竹山公(希達)墓碣銘) 292     편집인 2012/11/28  [555]  
283  예문관검열공(명립)묘갈명 (藝文館檢閱公(命立)墓碣銘) 291     편집인 2012/11/28  [464]  
282  집의공(창국)행장 (執義公(昌國)行狀) 290     편집인 2012/11/28  [581]  
281  백강공(회근)묘갈명 (栢岡公(晦根)墓碣銘) 289     편집인 2012/11/28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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