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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백석공(즙)묘갈명 (白石公(楫)墓碣銘) 270


백석공(즙)묘갈명

白石公(楫)墓碣銘

 

  백석(白石) 류공(柳公)의 휘는 즙(楫)이요, 자는 용여(用汝)인데 효종대왕(孝宗大王) 2년 1651 신묘(辛卯)에 졸하니 그 고을 사람들과 제자들이 그 덕의를 추모하여 서로 함께 공이 살던 곳 김제군(金堤郡) 승반산(勝盤山) 밑에 사우(祠宇)를 세 (719) 워 향사(享祀)하고 또 장차 묘전(墓前)에 비석을 세워 영원히 전하기를 꾀하여 나에게 그 비명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컨대 세상 사람들은 귀로 들은 것은 귀히 여기나 눈으로 본 것은 천히 여겨 반드시 지금 사람은 옛 사람만 못하다 말하지만 공과 같은 이는 스승을 좇아 학문을 익히고 몸을 닦아 풍속을 선히 하였으니 이 어찌 옛 사람만 못하겠는가? 그러니 공의 명성이 스스로 영원히 전하는 것인바 어찌 나의 비명을 기다리리요 하였더니, 그로부터 십여년 후에 다시 와서 청하면서 말하기를 사리는 비록 그러지만 비문을 반드시 지어야 한다고 하므로 내가 드디어 그 행장의 글을 고찰(考察)하여 서술하였다.   류씨(柳氏)로서 계통이 문화(文化)에서 나온 자는 고려(高麗) 태사(太師) 차달(車達)로부터 비롯되어 15세를 지내는 동안 높은 관작이 그치지 않더니 공의 증조(曾祖) 휘 양보(陽輔)와 조(祖) 휘 덕신(德新)에 이르러 모두 벼슬하지 않았고, 고(考)는 휘 태형(泰亨)인데 남주(南州)에 명망(名望)이 있더니 관직이 좌랑(佐郞)이었으며, 비(妣)는 조씨(趙氏)인데 어진 행실로 칭송되었다.   공은 만력(萬曆) 1585 을유(乙酉), 선조(宣祖) 18년에 태어났는데 어려서 엄연(儼然)함이 성인과 같아 여러 아이들이 다투는 것을 보면 반드시 꾸짖어 말리고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자신이 피해버렸다.   7세에 모부인(母夫人)의 상을 당하여 사람들이 그 궤전(饋奠)과 곡읍(哭泣)함을 보고 차탄(嗟嘆)하지 않는 이 없었다.   당시 왕모(王母)(조모(祖母))가 생존해 계셨는데 사람들이 혹 음식을 주면 반드시 갖다 드리고 왕모가 받아 맛을 본 연후에 물러났다.   공이 7 · 8세부터 이미 독서할 줄 알았는데 어른들이 독서에 근실하여 건강에 해로울까 염려하고 때때로 타일러 말리면 잠시 그 뜻을 따르다가 곧바로 다시 글을 읽었다.   1597 정유(丁酉)에 좌랑공(佐郞公)을 따라 관동(關東)(강원도(江原道))으로 난리를 피할제 비록 창황(蒼黃)한 난리 사이에도 그 몸가짐과 언사를 조금도 방종하지 않고 동냥자루를 들고 식량을 구걸할새 그 정성스런 모습이 사람을 감동시키어 아낌없이 많이 줌으로써 그 어버이가 그에 힘입음이 컸었다.   난리가 그친 뒤 집에 다만 대학(大學) 일부가 남았었는데 공이 송독(誦讀)을 폐하지 않고 이로부터 더욱힘써 진취하고 계지재색(戒之在色)의 경계(警戒)를 능히 지키어 암실(暗室)에서도 속임이 없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 (720) 이라 하였다.   석계(石溪) 최군명룡(崔君命龍)이 문원공(文元公) 노선생(老先生)(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글을 배우고 물러나 후진들을 교수(敎授)함에 공이 그를 좇아 배웠는데 당시 문도(門徒)가 매우 많았으나 최군(崔君)이 유독 공에게 칭허함이 심히 중(重)하였다. 얼마 후에 또 노선생 문하에 유학하여 심경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배윘는데 선생께서 심히 아름답게 권장하여 이르기를 「우리 무리에 인재가 있다.」 하시었다.   나이 32세에 생원(生員)에 급제하였다. 이때 인륜과 강상(綱常)이 무너지고 막히어 인사들이 사론(邪論)에 붙어 따랐으나 공이 정의를 붙잡아 세우니 그에 힘입어 화를 면한 이가 심히 많았다.   인조(仁祖)께서 새로 왕위에 오름에 노선생이 조정에 공을 천거하여 오수도찰방(獒樹道察訪)에 제수(除授)되었다. 공이 직사(職事)에 성심을 다하여 역로(驛路)가 다시 회복되었는데 공이 어버이를 오래 떠나 있을수 없어 얼마 후에 벼슬을 그만 두고 돌아왔다.   후에 다시 의금부도사(義禁莩事), 기린도찰방(麒麟道察訪), 왕자사부(王子師傅)의 제수가 있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1627 정묘(丁卯) 오랑캐의 변란(變亂)에 노선생께서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공을 막하(幕下)로 불러 주책(籌策)을 자문하였다. 난리가 평정된 후 더욱 세상에 나설 뜻이 없어 산곡에 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샘을 파서 한가히 지내니 학도들이 많이 좇아 글을 배웠다.   좌랑공(佐郞公)이 돌아가심에 거상(居喪)에 예를 다하였다.   1649 기축(己丑)에 인조(仁祖)께서 빈천(賓天)(승하(昇遐))하심에 공이 도성에 다달아 조상(吊喪)하고 돌아올제 이상시백(李相時白)이 만류하며 이르기를「많은 현류(賢類)들이 바야흐로 조정에 모여드는데 공은 왜 머무르지 않고 가려는가?」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고 돌아왔다.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로 조정에서 불렀는데 공이 탄식하여 이르기를「임금의 소명(召命)이 이르렀는데 병으로 능히 나가지 못하니 신자(臣子)의 예를 크게 잃었도다.」하였다.   이듬해 효종(孝宗) 1651 신묘(辛卯) 10월11일 집에서 졸하시었다.   졸하시기 수월 전에 아우 도(棹)가 공의 병환으로 말미암아 과거에 응시하지 않거늘, 공이 그 과거에 응시하도록 권면하였으나 공의 병이 위독하여 급히 돌아오니 아우더러 가사를 부탁하였다. (721)   공이 계모(繼母)를 섬김에 효도와 공경을 항상 다하였으나 유독 종양치 못한 것을 크게 한탄하고 모친을 결별함에 임하여 공이 시자(侍者)더러 붙들어 일으키라 명하니 시자가 그만 두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공이 듣지 않고 관대를 갖추고 계모에게 배례한 후 아뢰기를 「불초자(不肖子) 모(某)가 종효(終孝)를 다하지 못하고 정위(庭闈)를 영영 떠나게 되니 지하에서도 눈을 감기 어렵습니다.」하고, 또 문생더러 이르기를 「내가 금일에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했는가? 그 처음을 미루어 끝장에 돌아감에 온전히 살다가 온전히 돌아가니 다시 무슨 유감이 있으리요? 다만 노친을 염려할 뿐이다.」하고, 손을 저어 부인을 밖으로 나가도록 하고 말하기를 「남자는 부인의 손에 죽지 않는다.」하고, 집안 자제들을 다 불러 훈계하는 말씀이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동년 12월17일에 고을 서쪽 갈공산(葛公山)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례를 모시었다.   배위(配位) 송씨(宋氏)는 공께서 돌아가신지 8년 후에 돌아가시어 부장(祔葬)하였다.   공이 비로소 졸함에 도신(道臣)(관찰사(觀察使))이 장계(狀啓)를 올려 조정에서 장수(葬需)를 급여(給與)하였다.   문생으로써 공이 병석에 계실 때 부터 와서 탕제(湯劑)를 시중든 자가 70여인이러니 이어 지복(持服)하고 치상(治喪)하였으며 아래로 향인(鄕人) 및 이서(吏胥)에 이르기까지 장례 전에 육식(肉食)을 금하는 자가 심히 많았었다.   판서(判書) 민공정중(閔公鼎重)이 당시 본도(本道) 어사(御史)로 내려 왔다가 조정(朝廷)으로 돌아가 계주(啓奏)하기를 「고(故) 자의(諮議) 류모(柳某)는 학문과 행의로 사림(士林)에 중망이 있었고, 또 향리에서 살면서 교회(敎誨)에 근실하여 학도들이 심히 많았으며, 풍도를 듣고 착하게 된 자가 또한 많았습니다. 신이 명을 받들고 호남(湖南)에 와서 들으니 류모(柳某)가 죽음에 그 문인으로 상복을 입고 장례에 임한 자가 수백여인이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고 칭송하였답니다. 사제(師弟)의 예가 삼대 이후로 폐해진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이제 다시 보게 되바, 이는 진실로 드문 일입니다.」하니, 효종(孝宗)께서 아름다히 칭찬하시고 공에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증직하셨다.   공은 자질이 심히 아름다워 그 모범됨이 사우에게 도움된바 많았으니 일찌기 학문하는 도리를 논하여 말하기를 「성현(聖賢)의 말씀이 모두 서책 가운데 있는데 후학들이 이를 놓고 무엇을 구하리요? 모름지기 몸소 체험할진대 자연히 습관이 본성으로 이루어지리라.」하고, 또 말하기를 (722) 「도의 본체가 넓고 넓으니 어느 곳에 손을 쓸건가? 먼저 성심을 세우면 문득 정착할 곳이 있나니 나 또한 여러 책을 범연히 읽어 평생을 어긋쳐 보냈으니 후회가 말할 수 없다.」하고, 또 말하기를「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리가 서책에 갖추어 있으니 오직 독서로서 그 이치를 궁리하여 본받을 따름이다.」하였다.   장자(長者)로 더불어 말할 때면 자제를 교육할 것을 말하고, 자제로 더불어 말할 때면 부형을 섬길 것을 말하였으며, 사냥꾼과 농부로 더불어 말할 때면 그 사업에 인하여 개도(開導)하지 않음이 없었고, 그 허물을 보면 또한 조용히 달래어 스스로 고치도록 하였다. 때문에 사람으로 어진이나 미련한 이나 귀한 이나 천한 이나 모두 공을 애모하지 않음이 없었다.   혹 어떤 사람이 공에게 묻기를「공이 일찌기 남에게 숨김이 없으니 그 사마공(司馬公)을 배웠는가?」하니 공이 대답하기를「내 어찌 감히 사마공을 당하리요? 다만 나는 졸렬함을 지킨 때문에 심한 과실(이 없어 말하기 어려운 것이 없을 뿐이다.」하였다.   공이 아들이 없어 아우 도(棹)의 아들 백영(伯榮)으로 후사(后嗣)를 삼았다.   내가 이미 서술(序述)하고 또 추기(追記)하나니 지난 1631 신미(辛未)년에 공을 노선생 문하에서 만났는데 공이 선생의 말씀을 외워 말하기를「네가 능히 분발하여 졸업하지 못하니 가히 용기가 없음이라 말씀하시거늘, 내가 부끄러워 등에 땀이 적심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다만 쓸데없는 일에 골몰하여 능히 학문에 전념하지 못하였다.」하였다. 내가 아뢰기를「주자(朱子)께서 전곡(錢穀)과 갑병(甲兵)이 위기(爲己)의 학문이라 말씀하셨습니다.」하니 공이 이르기를「사물을 헤아림에 모책(謀策)을 내고 사물이 이름에 순히 응함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 」하시었다.

지금 생각컨대 나는 능히 그 힘을 실용치 못하였기 때문에 쉽다 말하였으나 공은 안으로 살핌이 치밀하였기 때문에 그 쉽지 않음을 알았으니 공을 이에 가히 미치지 못함이라 아아! 금일에 어디에서 다시 뵈일 수 있겠는가? 드디어 명을 지어 이르노니,   충신과 독경(篤敬)으로 교화(敎化)가 향리(鄕里)에 행해졌도다.   감백(甘白)의 본체(本體)가 있었으니 근본을 이미 세움이로다.   스승을 좇아 글을 배웠으니 연원(淵源)이 확실하도다. (723)   조예(造詣)의 깊고 엷음은 사람이 실로 알지 못했도다.   진실로 실상이 없었으면 사람들이 어찌 감복했겠는가?   엄연(儼然)한 그 사우(祠宇)에 향사(享祀)의 의절이 성하고 성하도다.   어찌 경모(敬慕)하지 않으리요? 천추(千秋)토록 길이 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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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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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반계류공형원전 (磻溪柳公馨遠傳) 286     편집인 2012/11/28  [923]  
277  반계공(형원)행장 (磻溪公(馨遠)行狀) 285     편집인 2012/11/28  [1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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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적암공(상진)사적 (適菴公(尙軫)事蹟) 282     편집인 2012/11/28  [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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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공(즙)묘갈명 (白石公(楫)墓碣銘) 270     편집인 2012/11/28  [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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