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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결청재공(담후)행장 (潔淸齋公(譚厚)行狀) 281


결청재공(담후)행장

潔淸齋公(譚厚)行狀

 

  공(公)의 휘(諱)는 담후(譚厚)요, 자(字)는 정부(正夫)요, 성(姓)은 류씨(柳氏)니 문화인(文化人)이다.   원조(遠祖)는 차달(車達)이니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통합(三韓統合)에 공을 세워 지위가 대승(大丞)에 이르렀다. 그 후로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대대로 이어 6세에 이르러 문간공(文簡公) 휘 공권(公權)이 있어 정당문학(政堂文學)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사적(事蹟)이 고려(高麗) 명신전(名臣傳)에 실리고, 또 6세를 지나서 휘 관(寬)이 있으니 호(號)는 하정(夏亭)인데 비로소 본조(本朝)에 들어와 문형(文衡)을 맡고 지위가 우상(右相)에 이르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치사(致仕)하여 졸하니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으로 사적(事蹟) (766) 이 본조명신록(本朝名臣錄)에 실리었다. 그로부터 4세에 이르러 증병조참판(贈兵曹叅判) 영암군수(靈岩郡守) 휘 희정(希汀)이 있으니 모재김선생(慕齋金先生)(김안국(金安國))이 묘갈문(墓碣文)을 찬술(撰述)하였고, 참판(叅判)이 휘 용심(用諶)을 생(生)하니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증승정원좌승지(贈承政院左承旨)니 공의 고조(高祖)인데 김모재(金慕齋)와 사재(思齋)(김정국(金正國))의 문하(門下)에 유학하여 문장(文章)에 능통(能通)하고 해서(楷書)에 숙달하여 크게 이선생(二先生)의 칭찬한 바 되었고, 증조(曾祖)는 휘 익(益)이니 독실히 배우고 힘써 행하더니 조졸(早卒)하여 증리조참판(贈吏曹叅判)이요. 조(祖)는 휘 공량(公亮)이니 여러 관직을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가 후에 참판(叅判)으로 강등(降等)되었으며, 고(考)는 휘 훤(萱), 호 절초당(節初堂)인데 그 학행과 문장을 온 세상에서 공경하였는데 명이 짧고 지위가 낮아 벼슬이 의빈부도사(儀賓莩事)에 그치었다. 비(妣)는 기계유씨(杞溪兪氏)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증좌찬성(贈左贊成) 대기(大祺)의 따님이요 예조판서(禮曹判書) 경안공(景安公) 여림(汝霖)의 현손이다.   인조(仁祖) 1623 계해(癸亥) 9월에 도사공(都事公)이 영동(永同) 임소(任所)로 부터 체귀(遞歸)하여 동월(同月) 24일 석양에 경제(京第)에 이르렀는데 이날 밤 해시(亥時)에 공을 출생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왕부(王父)(조부(祖父)) 참판공(叅判公)이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기를 『네가 중로(中路)에서 출생하지 않고 집에 이르러 출생되니 참으로 효자(孝子)라.』하고 소자(少字)를 효수(孝壽)로 부르도록 명하였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기를 믿고 남에게 구속받지 않더니 10세 후로는 기를 꺾어 수학하고 18세에 서전(書傳)을 읽다가 선기옥형(璿璣玉衡)과 기삼백장(朞三百章)에 이르러서는 마음을 가다듬고 깊이 연구하여 환히 해석하였다. 효종(孝宗) 1651 신묘(辛卯)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652 임진(壬辰)에 모친상을 당하여 피눈물로 삼년상을 마쳤다. 한편 도사공(都事公)이 나이 50이 넘고 또 자주 병을 앓고 있는데 다 백씨(伯氏)와 중씨(仲氏) 및 계제(季弟)가 서로 이어 세상을 뜨니 공이 홀로 곁에 모시며 안색(顔色)을 화락(和樂)하게 하여 봉양하되 뜻을 어김이 없고 과업을 일삼지 않고 위기의 학문에 뜻을 두되 오로지 역학(易學)을 연구하여 거의 침식(寢食)을 잊을 정도였다. 현종(顯宗) 1661 신축(辛丑)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법을 지켜 행함을 전상(前喪)과 같이 하는데 마침 추운 겨울을 당하였으나 주야(晝夜)로 빈소의 곁을 떠나지 않고 호곡(號哭)하여 마지 않기를 자못 삼개월이 넘으니 이로 인하여 화담(火痰)이 심하여 목소리가 점점 막혀 드디어 난치(難治)의 병을 이루었다. 1663 계묘(癸卯)에 복제를 마치고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어 문을 닫고 독서만 하다가 1665 을사(乙巳) 가을에 별과(别科)가 있음에 친구의 권으로 자신의 뜻을 굽혀 과거에 응시(應試)하여 전시(殿試)에 제 이인(二人)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었더니 1666 병오(丙午)에 뜻밖에 견(譴) (767) 책(責)을 입어 송리(訟理)에 내렸다가 곧 풀려 나왔다. 1668 무신(戊申) 가을에 경서교정랑청(經書校正廊廳)을 겸하고 1669 기유(己酉) 여름에 외직(外職)으로 경안도찰방(慶安道察訪)에 임명되고 1671 신해(辛亥) 가을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승진하고 다시 교정랑(校正郞)을 겸하여 이로부터 외직으로 나가지 않으면 일찍 교수(校讐)(교정(校正))의 역(役)에 참여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당시 공론(公論)이 그 선임(選任)을 중히 여김이었다.   노봉(老峯) 민상국(閔相國)(민정중(閔鼎重))이 같이 오래도록 함께 일하였는데 매양 강론(講論)에 이르러 입을 다시며 칭찬하였다. 겨울에 예조좌랑(禮曹佐郞)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옮기고 1672 임자(壬子) 봄에 병조(兵曹)를 사체(辭遞)하고 고교(考校)에 전념하였다. 7월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로 나가 그 해 가을에 본도(本道) 초시(初試)를 세 번 맡아 시취(試取)하였는데 오직 공정히 하였다. 그 때에 시절이 거듭 흉년을 만나 국가에서 전제(田制)를 거듭 밝히라 하거늘, 공이 명을 받들고 사실을 조사하여 자상히 계문(啓聞)하되 상층(上層)보다 하층(下層)에 이익되게 하기를 힘썼다. 감사(監司) 신공(申公) 정(晸)이 보고 탄식하여 마지 않더니 얼마 안되어 감사로 더불어 화합치 못하여 관인(官印)을 던지고 돌아옴에, 감사가 크게 뉘우치고 비장(裨將)을 시켜서 쫓아가 사례하였다. 1673 계축(癸丑) 겨울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도로 병조(兵曹)에 들어가 정랑(正郞)으로 승진되고 1674 갑인(甲寅)에 다시 정언(正言)에 제수(除授)됨에 사체(辭遞)하고 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임명함에 또 사양하고 곧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에 임명되었다. 전후로 수차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병조(兵曹)를 번갈아 옮기어 다 기록치 못하는바, 문득 질병을 들어 사직(辭職)하였다. 8월에 현종대왕(顯宗大王)이 승하(昇遐)하시니 공이 전직(前職)으로 외반(外班)에 참곡(叅哭)하고 11월에 부사직(副司直)으로 왜사(倭使)를 동래(東萊)에서 접빈(接賓)할 제 당시 관(館)을 옮기려는 기미가 있거늘 왜인들이 교활(狡猾)하여 반드시 그 욕심대로 하고자 하였다. 공이 시기(時期)를 따라 잘 달래어 마침내 무사하게 되니 동래부사(東萊府使) 어공진익(魚公震翼)이 서울에 돌아와 사람들에게 매우 칭찬하여 이르기를 『류공(柳公)은 자기 행실과 일을 처리함에 능하여 부하를 잘 다스리고 왜인(倭人)을 굴복케 함으로써 크게 동래(東萊) 고을 사람들의 칭찬한 바 되었다.』하였다.   숙종(肅宗) 1675 을묘(乙卯) 여름에 돌아와 봉명(奉命)하고 7월에 서장관(書狀官)에 차송(差送)됨에 이르러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겸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어 연경(燕京)에 갔다가 1676 병진(丙辰)에 돌아왔는데 맑고 곧은 절조(節操)로 자신을 견지(堅持)하여 몸을 정직하게 하고 아랫사람을 엄격히 다스리니 동행(同行)한 자가 심히 꺼리되 (768) 또한 마음으로 흠복(欽服)하였다. 여름에 외직으로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나갔는데 이때 본주(本州)의 경계(經界)가 문란하고 부역(賦役)이 고르지 못하여 가난한 백성들이 치우치게 그 고통을 받거늘, 공이 다 다스려 바르게 하니 간리(奸吏)들이 능히 손을 쓰지 못하고 서로 부언(浮言)(낭설(浪說))을 퍼뜨렸다. 감사(監司) 김덕원(金德遠)이 그 말을 믿고 또한 공이 하는 일을 불편하게 여기더니 또 무슨 사건으로 미움을 사서 마침내 하고(下考)에 그쳐 장차 돌아 올제, 도사(都事) 엄(嚴) 즙(楫)이 마침 본주(本州)에 도착하였는데 고을 사람들이 많이 공의 선치(善治)한 상황을 말하여 이르기를『아사(亞使)도 또한 고적(考績)에 참여하였을 텐데 어찌 문득 하고(下考)에 두겠는가? 』한데 엄(嚴) 즙(楫)이 부끄러이 여겨 사례(謝禮)하고 공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이제 이 고을에 이르러 비로소 민정(民情)이 잘못 전해졌음을 알았는데 일찍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함이라.』함으로 공은 다만 웃으며 이천(利川) 선영하(先塋下)로 돌아왔다. 이때에 권간(權奸)이 조정(朝廷)을 장악하여 조정(朝廷)의 의논이 크게 변하니 공이 경성(京城)에 자취를 끊고 세상 소식을 서로 끊은 채 듣지 않았다.   1678 무오(戊午) 봄에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여름에 울산부사(蔚山府使)에 제수(除授)되었는데 고을 백성 가운데 처를 죽인 옥사(獄事)가 있어 감옥에 갇힌지 여러 해 되어 거의 말라 죽기에 이르렀었다. 공이 문안(文案)을 살펴보고 마음으로 의심되어 단서(端緒)를 탐지하여 그 원통한 상황을 알고 곧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여 그 죄수(罪囚)를 석방하니 그 사람이 감읍(感泣)하고 떠났는데 얼마 안되어 과연 그 처(妻)를 청도(淸道) 지방에서 발견하였다. 대개 그 사람이 일찍 그 처(妻)를 구타(歐打)하였더니 그 처(妻)의 부친(父親)이 성내어 몰래 그 딸을 빼내어 청도(淸道) 사람에게 주고는 도리어 그 사위를 무고(誣告)하여 감옥에 가두었던 바, 이에 이르러 온 고을에서 모두 신명(神明)하다고 공을 칭찬하였다. 그 고을의 토호(土豪)들이 깊이 공을 꺼리어 자기의 뜻대로 행하지 못하고 분노를 몰래 쌓았다가 공이 시원(試院)에 다다라 관청(官廳)에 있지 않은 틈을 타서 서로 거느려 향교(鄕校)에 모아 수리(首吏) 몇 사람을 납치하여 죄를 관가(官家)에 알리고는 매질하고 다시 향사당(鄕射堂)에 난입하여 그 문을 쳐부수고 방자하게 날뜀이 이를 수 없었다. 공이 돌아와 사실을 알고 그 가장 악랄한 5(五) 6인(六人)을 체포하니 감사(監司) 박공신규(朴公信圭)가 마침 근읍(近邑)에 왔다가 듣고 대노(大怒)하여 친히 죄를 물어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박공(朴公)은 본래 위맹(威猛)이 있다고 이름난 분이었다. 공은 또한 그 혹형(酷刑)으로 사람을 상할까 염려되어 본부(本府)에서 치죄(治罪)하려는 청을 수차 하였으나 오히려 허락하지 않으니, 여러 죄수(罪囚)들이 듣고 스스로 말하기를 『반드시 죽게 되었 (769) 다.』하고 밤낮으로 호곡(號哭)하였다. 감사(監司)가 본부(本府)에 이르자 공이 직접 뵈입고 친히 다스리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외딴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무지(無知)하여 망령되어 스스로 죄에 빠졌음으니 본부(本府)에서 스스로 다스림을 들어주어 분의(分義)를 알고 징계(懲戒)하도록 함이 마땅합니다.』하니 감사가 비로소 허락하고 곧 여러 죄수를 끌어 앞에 대령시키고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 죄가 죽음에 마땅하니 내 법에 의하여 처치하고자 하되 너희 태수(太守)가 인자(仁慈)하여 너희들 목숨을 상할까 두려워하고 반드시 스스로 다스리고자 한 때문에 이미 허락하였으니 어진 사람 앞에 나아가 형(刑)을 받으라.』하였다. 공이 드디어 죄를 살피어 형을 시행하고 고률(考律)의 공평여부(公平與否)를 감사에게 청한 후 다만 그 수창자(首倡者)만 유배(流配)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또 오래도록 미결한 옥사가 있었는데 송자(訟者)가 감영(監營)의 비장(裨將)에게 뇌물을 주어 감사의 결재(決裁)를 얻어 오기를 요구하거늘, 공이 그 간특(姦慝) 함을 알고 고집하여 시행하기를 기꺼이 하지 않음으로 이에 감사가 불평한다는 말이 있었다. 공이 그 원인의 곡절(曲折)을 낱낱이 들어 밝히고 거취(去就)로서 다투니 감사가 비로소 뉘우치고 도로 그 사람의 죄를 묻고 그로부터 공이 하는 바를 깊이 감복(感服)하여 무릇 폐단(弊端)을 없애고 백성을 구휼(救恤)하는 바에 관계된 일이면 말을 하여 따르지 않음이 없었다. 도내(道內)의 옥사 가운데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공에게 모두 해결하기를 위임(委任)하니 만 일년에 정사가 이루어지고 교화(敎化)가 행해져 온 지역이 크게 편안함으로 감사가 나라에 알리고 어사(御史)가 염문(廉問)하여 모두 특이한 공적(功績)으로 알리었다. 1689 경신(庚申) 여름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발령(發令)되니 크고 작은 고을 백성들이 다 모아 전송하고 전일에 죄를 입은 자들도 또한 다 길에 나와 전송하고 수레에 오르기에 이르러 말고삐를 붙들고 차마 떠나지 못함에 이르더니 이천(利川)에 돌아와 거듭 고을과 도(道)의 상소에 의하여 사체(辭遞)되었다.   10월에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昇遐)하심에 빈전도청(殯殿都廳)으로 입경(入京)하여 그 일을 힘쓰고 12월에 옥당(玉堂)(홍문관(弘文館))에 선입(選入)되어 부수찬(副修撰)이 됨에 사체(辭遞)했더니 1681 신유(辛酉)에 다시 수찬(修撰)에 제수되어 헌납(獻納)으로 전임 됨에 또 사임하고, 산릉(山陵)이 이미 완성됨에 이천(利川)으로 돌아왔더니 도로 관직(館職)으로서 호서(湖西) 지방의 고시(考試)의 명을 받았다. 이윽고 도청(都廳)의 노고(勞苦)로서 예(例)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에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여름에 왕명을 받들어 북사(北使)를 평양(平壤)에서 맞아 위로하고 분원승지(分院承旨)에 제수되었으니 당시 중궁(中宮)이 새로 책봉(册封) 받아 별궁에 거처함으로서 분사(分司)를 신설한 때문이었다. 중궁의 가례(嘉禮) (770) 를 지낸 뒤에 곧 고향으로 돌아와 연이어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와 형조참의(刑曹叅議)에 제수되었으나 다 부임하지 않았다.   1682 임술(壬戌) 봄에 순창군수(淳昌郡守)로 나갔는데 고을에 토호(土豪)로서 신씨성(申氏姓)을 가진 자가 있어 감사의 힘을 믿고 읍민(邑民)의 분산(墳山)을 빼앗고자 송사(訟事)를 일으키었다. 공이 법에 의하여 물리치니 신가(申哥)가 강경히 쟁변(爭辨)을 하되 사기(辭氣)가 거칠고 오만함이 현저히 권세를 믿고 협박하는 기색이 있었다. 공이 드디어 감옥에 가두었더니 감사(監司)가 성낸 말이 있음에 공이 곧 사직하고 돌아왔다. 이해 여름에 영상(領相) 김공수항(金公壽恒)과 좌상(左相) 민공정중(閔公鼎重)이 연중(筵中)에서 공의 경학(經學)과 이적(吏績) 및 염결(廉潔)한 지조(志操)를 매우 칭송하니 주상(主上)께서 특명으로 수서(收敍)하여 겨울에 오위장(五衛將)을 제수하고 1683 계해(癸亥)에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 때에 현석(玄石) 박공세채(朴公世采)가 이조참의(吏曹叅議)가 되어 탑전(榻前)에서 염퇴(恬退)한 선비 삼인(三人)을 불러 쓰기를 청함에 이르러 공을 천거하고 또 공의 학업이 정박(精博)함을 칭찬하였다. 공이 마침 입경(入京)하여 호군(護軍)의 명을 사양하니 현석이 어느 사람에게 말하기를 『류모(柳某)의 금번 이 행거(行擧)는 대개 염퇴(恬退)의 명(名)을 피하고자 함이라, 더욱 어느 사람보다 더 훌륭함을 보겠다.』하니 공이 현석(玄石)에게 일찍 일일(一日)의 사귐도 없었는데 그 견중(見重)함이 이와 같았다. 이윽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기었는데 병으로 사임(辭任)하고 돌아왔다. 가을에 여주목사(驪州牧使)를 제수하니 그 고을은 배가 통하는 길로서 또한 서울이 가까워 경중(京中) 사대부(士大夫)들이 많이 민호(民戶)를 빌려 관곡(官榖)을 수용(受用)하되 상납(償納)할 뜻이 없어 포흠(逋欠)(미납(未納))이 쌓였거늘, 공이 문부(文簿)를 살펴 징수하고 문책함에, 비방(誹謗)과 원망(怨望)이 사방에 일어났으나 조금도 용서치 않더니, 1684 갑자(甲子) 봄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1685 을축(乙丑) 봄에 호군(護軍)으로 복직되었다가 곧바로 병조참의(兵曹叅議)에 임명되고 여름에 승지(承旨)로 전임(轉任)하였더니 얼마 안되어 병으로 사임하고 돌아왔다. 겨울에 삼척부사(三陟府使)에 임명되었는데 공이 병들고 쇠하여 사환(仕宦)에 뜻이 없다가 이 고을에 제수됨에 이르러 지역이 궁벽(窮僻)하고 정무(政務)가 한가하다 하여 사양치 않고 부임(赴任)하였는데 1686 병인(丙寅) 정월에 구질(舊疾)이 갑자기 위독하여 여러 차례 사양하되 허락지 않더니 6월에 비로소 체임되어 이천(利川)으로 돌아와 12월 초10일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수 64세였다.   공이 수차 큰 고을을 다스렸으되 돌아가심에 이르러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 없어 서울로 사 (771) 람을 보내어 모든 것을 빌려다가 썼으며 상사(喪事)가 난지 6일만에 비로소 염빈(殮殯)하고 호서(湖西)에 있는 전장(田庄)을 팔아 겨우 장수(葬需)를 갖추어 이듬해 2월17일 이천(利川) 송현(松峴) 집 뒷산에 안장(安葬)하니 이는 공의 유명(遺命)에 따라 부장(祔葬)한 것이다.   공이 자품(姿品)이 매우 고상하고 총명함이 보통 사람에 뛰어나며 기모(氣貌)가 안상(安詳)하고 심법(心法)이 정명(精明)하더니 어려서부터 장성함에 이르기까지 가훈을 받아 글을 읽고 이치(理致)를 궁구(窮究)하며 몸소 실천하여 이미 그 대체(大體)를 세웠다. 성품 또한 독서를 즐겨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경전(經傳) 육예(六藝)의 글과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책에 몸소 연구치 않음이 없었고 오로지 정밀하게 사색(思索)함이 더욱 주역(周易)에 있었다. 집에 있어 어버이 섬기는 여가(餘暇)와 고을에 임하여 백성 다스리는 여가(餘暇)에 부지런히 강독(講讀)하여 조금도 태만하지 아니하고 각려(刻勵)하고 견고(堅固)하여 심오(深奥)함을 다하고 은미(隱微)함을 연구하여 하도(河圖)에 나아가 그 자연의 상을 완미(玩味)하고 그 하도(河圖)로 인하여 밝히고 글에 써서 나타내되 전인(前人)의 구태(舊態)를 답습(踏襲)하지 않고 스스로 터득한 묘책이 있었다. 일찍이 말하되『내가 주역(周易)에 내 마음을 다하고 내 힘을 다한 뒤 십수년을 쌓은 후에 흐릿하게나마 요령(要領)을 터득하게 된 것은 계사(繫辭)에 이른바 신명(神明)함이 사람에 존재한다 하는 것을 어찌 쉽게 말하랴.』하고, 또 이르되『주역(周易)은 바로 도덕성명(道德性命)의 책이요. 복서(卜筮)는 특히 그 일단(一端)인바, 이를 공자(孔子)께서 십익(十翼)에 이미 자상히 말씀하셨고, 정자(程子)(정(程) 신(頣))는 이(理)에, 소자(邵子)(소(邵) 옹(雍))는 수(數)에, 주자(朱子)(주(朱) 희(憙))는 상(象)에 또한 다 밝히어 그 정밀함을 다하였으니 성인(聖人)의 능사(能事)요 제왕(帝王)의 극공(極功)이거늘 어찌 이에 더함이 있으리요? 세상에서 주역(周易)을 말하는 자 다만 그 수(數)를 취하여 추명복서(推命卜筮)의 용(用)을 삼아 그 조박(糟粕)을 절취(竊取)하여 망녕되이 길흉을 말하고 도리어 세상을 현혹(眩惑)하는데 돌아가니 주역(周易)을 말함이 어찌 전적으로 그러함인가? 깊이 이로써 근심이 되도다.』 하였다. 혹 역학(易學)을 청하는 자 있으면 문득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이르되 나는 혜적(惠迪)하면 길하고 종역(從逆)하면 흉하고 성만(盛滿)하면 손(損)을 부르고 겸손하면 익을 받음을 알 뿐이라.』 하셨으니 이말은 참으로 나의 스승이라 하고, 수학에 이르러는 내 알지 못한다 하였다.   만년(晚年)에 얻은 바가 더욱 정밀하여 마음과 뜻이 융회(融會)하고 스스로 난언(難言)의 묘함이 있었으나 사람들이 알지 못함으로 때로는 홀로 빙그레 미소(微笑)할 따름이었다. 친히 지은 성능유의(成能遺義) 일책(一册)이 있으니 스스로 말하되 『내 일생에 정력이 다 이에 있다.』하였으니 대게 그 학문이 더욱 진취하 (772) 고 서(書)가 더욱 이루어짐을 기다려 선각자(先覺者)에게 질의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니라. 젊어서부터 영환(榮宦)에 뜻이 없었는데 늦게야 우연히 한번 시험을 보아 이름을 이루니 성예(聲譽)가 울연히 성하되 청환(淸宦)의 길에 나서길 피하고 한결 몸소 자신을 숨기기를 힘써 일찍이 이르기를 『호작(好爵)은 여러 사람이 시기하고 권세(權勢)는 재앙의 매개(媒介)라.』하고 고을 관장(官長)을 역임함에 문득 성적(聲績)이 있었으니 몸을 정직하게 하여 사물을 대하고 마음을 다하여 공사(公事)를 받들며, 덕교(德敎)를 먼저 하고 주벌(誅罰)을 뒤로 하며, 유풍(儒風)을 진작시키고 절의(節義)를 장려하며, 무비(武備)에 이르러서도 또한 능히 수치(修治)하고, 몸가짐을 겸손히하여 바르게 말하되 비교치 않고, 사람을 성의로 대하여 화(和)하되 흐르지 않은 때문에 비록 거칠고 사나운 무부(武夫)라도 혹 처음에는 거만하다가 뒤에는 공손하고, 간사하고 교할한 이서(吏胥)라도 또한 위엄(威嚴)에 두려워하여 성의를 다하였다. 청검(淸儉)을 스스로 닦아 시종(始終)을 한가지로 하니 매양 관직에서 체임되어 집에 돌아올 때는 행장(行裝)이 초라하여 갈 때와 같았다.   집에 있음에 효성과 우애로서 독실히 봉양하고 상사(喪事)와 제례(祭禮)에 각각 그 도리를 다하며, 거상(居喪)하는 절차와 종신토록 사모함이 실로 사람으로서 미치지 못할 바가 있었고 매양 기일(忌日)을 만나면 초상(初喪) 때와 같았다. 종질(宗姪)이 가묘(家廟)를 받들며 따로 살고 있었는데 공이 매일 새벽에 일어나 반드시 먼저 참배(叅拜)하되 비록 큰 추위와 심한 더위에도 폐하지 아니하기를 늙기에 이르도록 한결 같았다. 항상 고요함을 지키고 밖에 나가 남과 교류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교격(矯激)한 행동을 하지 않고 편사(偏私)의 의논을 주장치 아니하여 평소 말을 입에서 내 지 않는 것 같았으나 일에 임해서는 강의(剛毅)하여 한결같이 의(義)로 재단(裁斷)하고 더욱 시비(是非)와 숙특(淑慝)의 분별에 엄하여 확연히 빼앗지 못할 것이 있었으며, 주고 받음에 구차하지 않고 그 도리로서 하였으나 명예를 가까이 하는 청렴(淸廉)과 세속(世俗)을 떠나는 경개(耿介)는 또한 좋아하지 않았다. 그 동래(東萊)에 봉사(奉使)하였을 때 부사(府使) 어공(魚公)이 그 행장(行裝)의 기물(器物)이 많이 부족함을 보고 연갑(硯匣)과 패도(佩刀)를 증여(贈與)한 후 며칠 후에 와서 보았으나 공은 종일토록 이야기를 하되 사례하는 뜻이 없고 그 벽 사이에 걸려 있는 것을 보일 뿐이었다. 이에 어공(魚公)이 그 마음에 두지 않음을 알고 깊이 탄복(歎服)을 더하였다. 청석령(靑石嶺)의 석연(石硯)은 본래 매우 아름답다고 일컫던 바, 전후로 명(明)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내왕하는 자로서 청렴 근실(謹實)하다고 일컫는 자라도 그 문방(文房)의 도구로서 취하기를 혐의치 않았는데 공은 홀로 취함이 없었고, 돌아오다가 관서(關西)(평안(平安) (773) 도(道))에 도착하니 고을 관장(官長)이 벼루 하나를 주면서 이르기를 『이것이 청석(靑石)의 물건이라 모인(某人)이 애완(愛玩)하는 것이로되 공의 행랑이 한 점도 없으니 그를 가상히 여겨 감히 이로서 그 청덕(淸德)을 표하노라.』하거늘, 공이 이르기를 『다만 그 길이 멀어 지참하기 어려울 뿐이었지 짐짓 다른 사람과 달리 하고자 함이 아니라.』하였다.   성서(城西)의 공의 낡은 집이 누추하여 거처하기 어려움으로 어떤 사람이 개축(改築)하기를 권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범인(凡人)의 정(情)은 만족함을 능히 알지 못하는바 항상 이 마음으로 곳에 따라 마음을 편히 할진대 왜소한 집이나 큰집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시골에 있을 때 쑥대로 덮은 집이나, 명아주 콩잎의 하찮은 음식을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바 였으나 유연자적(悠然自適)하며 마음을 비우고 주역(周易)을 완미(玩味)할 따름이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허로재(許魯齋)가 학자로 하여금 먼저 생업(生業)을 힘쓰도록 하였는데, 대개 빈궁(貧窮)이 사람의 뜻을 빼앗아 학문을 하는데 방해가 될까 염려함이거늘 후세의 학자(學者)들이 그를 핑계로 구실을 삼아 이익(利益)을 취하고 의리를 해치는 자 많으니 가히 경계(警戒)치 하니하랴?』하고 또 말하기를 『사람이 이름을 좋아하는 자는 내심(內心)이 부족한 때문이니 성문(聲聞)이 실정에 지나침은 내 실로 부끄러워 한다.』하였으니 그 심지를 가히 알지로다.   우암(尤菴) 송선생(宋先生)(송시렬(宋時烈))과 박현석(朴玄石)(박세채(朴世采)) 김문곡(金文谷)(김수항(金壽恒)) 민로봉(閔老峯)(민정중(閔鼎重)) 같은 여러 명공(名公)들이 공을 추중(推重)하지 않음이 없고 혹 천거하여 등용시키고자 하였으나 공이 즐겨하지 않고 한 번도 그 집 문에 나아가지 않았다.   공이 본래 문장(文章)으로 자임(自任)하지 않았으나 지은 문자(文字)는 여러 경서(經書)에 근본하여 이치에 달함으로 주장을 삼고, 또한 시(詩) 짓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혹 음영(吟詠)에 이르면 스스로 작가(作家)의 기풍(氣風)이 있었다. 소시(少時)에 우인(友人)을 변방 고을에 전송할 때 시를 지어 이르기를『가을은 백두산 눈 속에 들어오고, 여름은 압록강 물에 찾아 들도다.』하였으니 정동명(鄭東溟) 두경(斗卿)이 보고 기특하게 여기어 이르기를 『이 양구(兩句)는 능히 새북(塞北)(북변(北邊)) 사시(四時)의 경치를 다 나타내었다.』 하였다. 필법(筆法)은 단아하고 화려하여 이왕(二王), 곧 진(晉)나라 때 명필(名筆)인 왕희지(王羲之)와 그 아들 왕헌지(王獻之)의 유모(遺模)를 얻었으되 자부(自負)하지 않았으며, 평소에 일찍 따로 호칭(呼稱)을 지음이 없고 오직 결청재(潔淸齋) 삼자(三字)를 전각(篆刻)하고서도 서한(書翰) 사이에 쓰지 아니하고 이간(易簡) 이대자(二大字)를 전서(篆書)하여 벽에 걸었다가 곧바로 버렸으니 이는 세상에 알려 (774) 짐을 구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남양홍씨(南陽洪氏)니 학생(學生) 달호(達湖)의 따님이요 현령(縣令) 직(稙)의 손(孫)인데 공보다 구년(九年) 후에 졸(卒)하니 묘(墓)는 합폄(合窆)하였다. 아들이 없어 중씨(仲氏)의 아들인 주(疇)를 맞아 계자(系子)하였는데, 주(疇) 또한 아들이 없이 일찍 죽어 후사(後嗣)를 세우지 못하고 공이 하세(下世)하니, 주(疇)의 처(妻) 신씨(申氏)가 주(疇)의 형 유(㽥)의 아들인 문준(文濬)으로 아들을 삼으니 당시 8세였다.   아아! 공의 높은 식견(識見)과 깊은 학문(學問)으로 이미 사람들에게 알아줌을 구하지 않았으니 사람들도 또한 심히 공을 앎이 없었고,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고 후손마저 영체(零替)(미약(微弱))하였으며, 나아감에 능히 베풀지 못하고 물러남에 능히 전한 바 없으니 이른바 천명을 가히 어쩔 수 없고 이치를 가히 헤아리지 못함이 아니겠는가? 불녕(不佞)이 비록 공에게 사랑을 얻음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일찍 그 집덕(執德)의 견고함과 제행(制行)의 구비함을 흠복(欽服)함에 있어 집편자(執鞭者)가 되기를 원함이 오래더니 이제 가장(家狀)을 근거하여 그 언행(言行) 사실을 살펴보니 모두 평일에 다른 사람에게 들어 귀에 익은 것이라. 대략 이와 같이 엮어 입언(立言) 군자(君子)를 기다리노라.

숭정기원후기묘

오천정호근상

 

潔淸齋柳公譚厚行狀

 

公諱譚厚字正夫姓柳氏文化縣人遠祖車達佐高麗太祖績紀統合位至大丞其後世襲珪組至六世而有文簡公公權政堂文學叅知政事載高麗名臣傳又歷六世有諱寬號夏亭始入  本朝掌文衡位右揆錄淸白致仕而卒諡文簡事載本朝名臣錄自後四世有  贈兵曹叅判靈岩郡守諱希汀慕齋金先生撰墓碣叅判生諱用諶成均生員 贈承政院左承旨寔公高祖也遊於金慕齋思齋之門能文章善楷書大爲二先生之所獎許曾祖諱益篤學力行早卒 贈吏曹叅判祖諱公亮累官至判中樞府事 (762) 後降授叅判考諱箮號節初堂學行文章伏一世而無命無位仕止儀賓莩事妣某封杞溪兪氏同知中樞府事 贈左贊成大祺之女禮曹判書景安公汝霖玄孫也天啓癸亥九月都事公自永同任所遞歸二十四日夕抵京第是日亥時公生翌朝王父叅判公來撫之曰汝不于中路而至家乃生眞孝子也因小字曰孝壽髫齡負氣不羈十歲後折節受學十八歲讀書至璣衡及朞三百章潛心研究洞然解釋辛卯中司馬試壬辰丁內艱泣血終三年都事公年踰艾且善病而公之伯仲季相繼早世公獨侍傍色養無違不事科業有意爲己之學專精治易幾忘寢食辛丑丁外艱持制如前喪適當隆寒晝夜不離殯側號哭不止者殆滿三朔因此火痰俱㞃喉音漸閉遂成膏肓之疾癸卯外除益無意世事杜門讀書乙巳秋有别科以親舊勸屈意赴擧擢 殿試第二名選隷槐院丙午非意被譴下理卽出戊申秋兼經書校正廊廳己酉夏出除慶安道察訪辛亥秋陞成均館典籍復兼校正郞自是非出外未嘗不叅校讐之役盖時議重其選也老峰閔相國久與之同事每當講論嘖嘖稱善冬拜禮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尋遷兵曹佐郞壬子春辭遞騎省專意考校七月佐幕湖南是秋三掌本道初試試取惟公時歲比不登 朝家申明田制公承 命覈審 啓聞詳實務在損上益下監司申公晸見而歎賞無何與監司不合投印而歸監司大悔使褊裨追謝之癸丑冬拜司諫院正言病未赴  召旋入騎省陞正郞甲寅復除正言辭遞卽拜司憲府持平又辭之俄拜侍講院司書前後屢遷薇垣栢府春坊騎省不盡記輒引病辭遞八月  顯宗大王昇遐公以前啣叅哭外班十一月以副司直儐倭使於東萊時有移館之擧而倭人狡猾必欲售其所欲公隨其善喩竟得無事萊伯魚公震翼還京亟稱於人曰柳公行己處事能有以戢下而服倭大爲萊人所稱歎云乙卯夏復命七月差書狀官仍除成均館司藝兼司憲府掌令赴燕丙辰乃還氷蘖自持正己肅下同行者甚憚而亦有心服之者夏出爲尚州牧使時本州經界紊亂賦役不均下戶殘氓偏受其苦公悉釐正之點吏不能措手胥動浮言監司金德遠信之已不便公所爲又以事見忤竟置下考將歸都事嚴緝適到本州州人多言公善治狀曰亞使亦叅考績何遞置下緝愧謝之卽就公言曰今到此州始知民情稱枉恨不早使道主知之也公但微笑而已歸寓利川先塋下時權奸當朝朝議大變公絶跡京輦與世不相聞戊午春除通禮院右通禮不就夏除蔚山府使府民有殺妻獄滯囚多年 (763) 幾至瘦死公考見文案心疑之舒究端緒得其寃狀卽報監司而釋其囚其人感泣而去未幾果得其妻於淸道地盖其人嘗歐其妻妻之父怒潛引出給淸道人而反誣其婿以速獄也及是一境稱其神明府之土豪輩深憚公不得行胸臆潛蓄忿怒乘公之赴試院不在官相率而會鄕校拏致首吏數人罪狀官家而杖之復亂入鄕射堂擊碎其門恣睢跳踉無不至公還知之捕擊其首惡五六人監司朴公信圭適到近邑聞之大怒欲躬自按治朴素號威猛公又慮其酷刑傷人請自本府治之屢報而猶不許諸囚聞之自以爲必死日夜號哭及監司到本府公面請自治曰遐裔蚩氓無知妄作自陷於罪宜聽本府自治使知分義而有所懲矣監司始許之則引諸囚至前責之曰汝罪當死吾欲置法汝太守仁慈恐傷若等之命必欲自治故已許之矣可就死於仁人之前也公遂按罪施刑考律平反請於監司只流其首倡餘悉放之又有久訟訟者賂營裨要得監司決語而來公知其奸執不肯施監司有不平之言公備擧其委折以明之終以去就爭監司始悔悟反坐其人自此深服公所爲凡係袪弊恤民之事言無不從道內獄訟之難決者悉委決於公朞年政成化行一境大安方伯考奏繡衣廉問皆以異績聞庚申夏以司諫院獻納被召大小邑人皆會餞前日被罪者亦皆追送於路至有攀轅不忍别者歸到利川再因縣道控疏辭遞十月  仁敬王后昇遐以殯殿都廳入京敦事十二月選入玉堂爲副修撰辭遞辛酉復拜修撰轉獻納又辭之  山陵旣完乃還利川旋以館職膺湖西考試之 命尋用都廳勞例陞通政階拜僉知中樞府事夏奉命延慰北使于平壤還拜分院承旨時  中宮新受册御别宮而設分司故也 嘉禮後卽還鄕連除掌隷院判決事刑曹叅議皆不拜壬戌春出除淳昌郡守郡有土豪申姓者有力於監司欲奪邑民墳山惹起訟端公據法斥之申也强爲爭辨而辭氣悖慢顯有怙勢脅持之色公遂下之獄監司有慍語公卽投紱而歸是夏領相金公壽恒左相閔公於筵中盛稱公經學吏績及廉潔之操  上特命收叙冬除五衛將癸亥拜承政院同副承旨皆以病不赴時玄石朴公世采爲吏曹叅議於  榻前請召恬退之士三人而公預焉且稱公學業精博公適入京出謝護軍之  命玄石謂人曰某今此擧盖欲避恬退之名尤見其加於人也公於玄石曾無一日之雅而其見重如此俄拜同副承旨序遷至左副呈病遞歸秋除驪州牧使州通船路且近京城京中士大夫多借民戶受用官翟無意償納積成逋欠公按簿徵 (764) 責謗四起而不少貸甲子春罷歸乙丑春叙復護軍俄拜兵曹叅議夏轉拜承旨未幾以病辭歸冬拜三陟府使公病且衰無意仕宦而除是州謂地僻務閑不辭而赴丙寅正月舊疾猝㞃屢辭不許六月始得遞歸利川十二月初十日考終于正寢壽六十四公屢典大邑而喪無預具走人稱貸於京肆喪出第六日始克殮殯至賣湖庄僅庀葬需以明年二月十七日窆于利川松峴家後山負壬原從治命祔先塋也公資品甚高聰明邁倫氣貌安詳心度精明自幼及長受訓家庭其於讀書窮理反躬踐履之實固已立其大者性又嗜書手不釋卷於經傳六藝之文濂洛關閩之書靡不軆究而其專精思索尤在於易自在家事親之餘莅郡治民之暇孜孜講讀未嘗小懈刻厲堅苦極深研微就河圖中玩其自然之象因其圖而明之筆之書而闡之不襲前人之套多有自得之妙嘗曰吾於易盡吾心竭吾力積十數年而後怳然似有得其要領者擊辭所謂神而明之存乎其人者豈易言哉且謂易是道德性命之書卜筮特其一端夫子於十翼已詳言之其後程子於理邵子於數朱子於象亦皆發明之極其精則聖人之能事帝王之極功豈有加於此哉而世之言易者只取其數以爲推命卜筮之用竊其糟粕妄談吉凶反爲惑世之歸易之說豈端使然哉深以此病之或有請學者則輒曰朱子云吾知惠迪吉從逆凶滿招損謙受益而已此言眞我師也至於數學則吾未之知也晚年所得尤精至於心融意會自有難言之妙而人不得以知者則時或逌然微笑而已有所著成能遺義一部自謂一生精力盡在是矣盖欲待其學益進書益成質諸先覺者而未果焉自少無意榮宦晚偶一試成名聲譽藹蔚而歛避淸途一味含晦嘗曰好爵衆之忌權勢禍之媒也歷試州郡輒有聲績正己率物盡心奉公先德敎後誅罰振儒風獎節義至於武備亦修治持己以謙犯而不校待人以誠和而不流故雖麤悍武夫或先倨而後恭狡猾吏胥亦畏威而獻誠淸儉自飾終始一致每遞官歸家行裝翛然如來時居家孝友篤至奉養喪祭各盡其道居憂之節終身之慕實有人所不及者每値忌日如始喪宗姪奉家廟異居每日晨起必先省謁雖祁寒盛暑不廢至老如一日常守靜簡出不樂交遊不爲矯激之行不主偏私之議平居言語若不出口而臨事剛毅一以義裁尤嚴於是非淑慝之辨有確然不可奪者辭受不苟必以其道而近名之淸絶俗之介亦不屑爲其奉使東萊時府伯魚公見其行槖器用多缺贈以硯匣佩刀後數日來見公終日言無謝意但見其掛諸壁間 (765) 而已乃知其不留於心深加嘆服靑石嶺石硯素稱絶佳前後使燕者雖號淸謹以其爲文房之具取之不嫌公獨無取還到關西有一邑宰持贈一硯曰此是靑石之物也某所愛玩者而嘉公槖中不染一塵敢以是用表淸德公曰只爲其路遠難致非欲故異於人也城西弊屋隘陋難容或勸之改搆公笑曰凡人之情鮮能知足常使此心隨處泰然則矮室廈屋何間之有其在鄕廬蓬茅藜藿人所不堪而悠然自適虛心玩易而已嘗曰許魯齋欲使學者先治生業盖慮貧窮之奪人志而妨於爲學也而後之學者藉爲口實循利而害義者多可不戒哉且謂人之好名者內不足故也聲聞過情吾實恥之其所存者可知也自尤齋宋先生及朴玄石金文谷閔老峰諸公莫不推重或欲薦拔而登庸之公聞不樂終不一造其門焉公素不以文章自任而所著文字本諸經書以理達爲主亦不喜作詩或發於吟咏自有作者風少時送人作邊郡有詩曰秋來白山雪夏入綠江流鄭東溟斗卿見而奇之曰此兩句能盡塞北四時之景矣筆法端麗深得二王遺模而亦不以自居焉平日未嘗别作號稱惟篆刻潔淸齋三字而亦不施於札翰間又篆書易簡二大字揭諸壁而尋亦去之盖不欲求聞於世也配淑夫人南陽洪氏學生達湖女縣令稙孫也後公九年而歿祔無子子仲氏子疇亦無子而夭未及立後而公下世疇之妻申氏始以疇兄㽥之子文濬爲子時八歲矣嗚呼以公高識邃學旣不求知於人人亦不甚知公位不稱德後嗣零替進未克施退無所傳豈所謂天不可必而理不可測者耶不佞雖未及獲款於公而竊嘗有欽乎其執德之固制行之備願爲執鞭者久矣今據家狀考其言行事實皆平日得於人而耳熟者也略加詮次以俟立言之君子云

崇禎紀元後己卯

烏川鄭澔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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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279  반계수록해제 (磻溪隨錄解題 ) 287     편집인 2012/11/28  [705]  
278  반계류공형원전 (磻溪柳公馨遠傳) 286     편집인 2012/11/28  [940]  
277  반계공(형원)행장 (磻溪公(馨遠)行狀) 285     편집인 2012/11/28  [1418]  
276  좌윤공(봉징)약사 (左尹公(鳳徵)略事) 284     편집인 2012/11/28  [866]  
275  갑산부사공(구징)약사 (甲山府使公(龜徵)略事) 283     편집인 2012/11/28  [1000]  
274  적암공(상진)사적 (適菴公(尙軫)事蹟) 282     편집인 2012/11/28  [758]  
 결청재공(담후)행장 (潔淸齋公(譚厚)行狀) 281     편집인 2012/11/28  [1476]  
272  황해도도사용당공(인량)묘표 (黃海道都事龍塘公(寅亮)墓表) 280     편집인 2012/11/28  [1055]  
271  대사간공(상재)묘표 (大司諫公(尙載)墓表) 279     편집인 2012/11/28  [1064]  
270  영의정충간공(상운)묘갈명 (領議政忠簡公(尙運)墓碣銘) 278     편집인 2012/11/28  [1258]  
269  백암공(인)약사 (白菴公(忍)略事) 277     편집인 2012/11/28  [987]  
268  치헌공(세훈)묘갈명 (恥軒公(世勛)墓碣銘) 276     편집인 2012/11/28  [1124]  
267  원주공(철)약사 (原州公(澈)略事) 275     편집인 2012/11/28  [1013]  
266  수신재공(사신)칠세연행 (守愼齋公(士信)七世聯行) 274     편집인 2012/11/28  [1180]  
265  진해공(지정)약사 (鎭海公(之禎)略事) 273     편집인 2012/11/28  [829]  
264  운강공(항)행장 (雲江公(沆)行狀) 272     편집인 2012/11/28  [873]  
263  반곡공(도)묘갈명 (盤谷公(棹)墓碣銘) 271     편집인 2012/11/28  [1044]  
262  백석공(즙)묘갈명 (白石公(楫)墓碣銘) 270     편집인 2012/11/28  [1005]  
261  초료당공(덕용)묘갈명 (鷦鷯堂公(德龍)墓碣銘) 269     편집인 2012/11/28  [1050]  
260  칠송공(곤수)묘지 (七松公(鵾壽)墓誌) 268     편집인 2012/11/28  [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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