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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추담류선생자방유적비문 (楸潭柳先生子房遺蹟碑文) 190


추담류선생자방유적비문

楸潭柳先生子房遺蹟碑文

 

  선비로써 경륜을 쌓아 세상에 시험하지 못하고, 마른 나무처럼 산중의 선비로서 늙어 죽은 분은 어찌 본시 스스로 기약했겠는가? 그 만난 때가 불행한 때문이다. 진실로 불행한 때를 만나 벼슬을 즐기고 봉록(俸祿)을 생각하여 그칠 줄을 알지 못한다면 무턱대고 전진하는 환난(患難)이 생 (488) 길 것이요, 소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재화(災禍)가 이를 것이라, 이는 예로부터 사리에 밝은 선비가 차라리 종신(終身)토록 스스로 쓰이지 못함을 달게 여길지언정, 뜻을 굽혀 세상에 쓰임을 구하기를 즐기지 않는바라, 또 군자의 출처가 어찌 항상 같으리요? 옳은 것을 보면 움직이고 어려움을 알면 그치나니 시기를 만나는 대로 의리에 맞게 할 따름이다, 저 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함은 천명에 있으니 내 또한 어찌 하겠는가? 이제 내가 추담선생(楸潭先生) 류공(柳公)의 행장(行狀)을 읽고 느낌이 있도다.   선생의 휘(諱)는 자방(子房)이요, 자(字)는 택지(澤之)인데 어려서부터 이미 어버이 섬기는 큰 도리를 알아 부모의 곁에서 효성으로 봉양하여 어긋남이 없었다. 내외상(內外喪)(양친상(兩親喪))을 당하여 애도함을 다하고 예제를 갖추어 행하니, 향당(鄕黨)에서 그 효성을 칭송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복제(服制)를 마친 후 마침내 과거공부(科擧工夫)를 폐하고 성리(性理)의 학문에 전심하여 깊은 뜻을 탐구하여 얻지 않으면 놓치 않았다. 동군(同郡)에 지지당(止止堂) 형선생(邢先生)(형사보(邢士保))과 구산(龜山) 변선생(卞先生)(변(卞) 벽(璧))으로 더불어 도의로써 사귀며 서로 학문을 연마하여 좋은 점을 취하였다.   중종(中宗)께서 즉위(卽位)하신 후 정암(靜菴) 조선생(趙先生)께서 맨 먼저 임금의 융숭한 신임을 얻어 명사(名士)들을 끌어 들이고자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였는데, 선생과 지지당, 구산 삼현(三賢)이 함께 그에 선발되어 사람들이 모두 영예롭게 여겼으나 선생께서는 나아가지 않으시고, 후에 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금천도찰방(金泉道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또한 부임하지 않고, 추담(楸潭) 위에 한 정자(亭子)를 지어 송추(松楸)(선영(先塋))의 감회(感懷)를 부쳐 그로 인하여 자호(自號)를 추담(楸潭)이라 하고 정원에 버들과 솔나무를 심어 날마다 이곳에서 소요하며 분수에 만족함으로 스스로 즐기었다.  
 일찌기 시를 지어 이르기를, 
 
 난초가 산골에 시들고 옥(玉)이 산에서 불타느니,
 시사(時事)를 보건데 눈물이
눈두덩에 차도다.  
 작록(爵祿)은 사람에게 참으로 함정(陷穽)이거니,
 머리를 흔들며 띠집에 누워
있는 것만 못하도다.  
 또 이르기를, 
 
 영천(瀯川)의 물고기 먹을 만하고, 감악산(紺岳山) 나물이 좋도다. 
 
 생애(生涯)를 고기 낚시에 부치니, 참 즐거움이 과연 어떻겠나, (489) 
 
 대개 선생(先生)께서 때를 슬퍼하고 나라를 근심하신 뜻과 자취를 감추어 스스로 즐기신 취미를, 곧 이 두어수 시(詩)로써 가히 상상하여 알겠도다.
  이미 북문지화(北門之禍)(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사류(士類)들이 많이 죽음을 당하였으나 선생께서 홀로 면하시니 사람들이 그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감복하였다. 아아! 선생 같은 분은 어찌 때를 알고 형세를 살펴 출처에 의리를 좇은 분이라 이르지 않겠는가? 참으로 위대하였도다! 홀로 한이 되는 것은 저 같은 행의와 학문으로 이미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돌아가신 후 또한 시문 마저 병란(兵亂)에 다 잃어버려 사적이 따라 없어짐에 그 자상히 상고 할 수 없음이로다. 오직 잠곡(潛谷) 김상국(金相國)(김(金) 육(堉))이 기묘록(己卯錄)에 선생의 사적을 기록하여 이르기를 『 조행(操行)이 있어 어버이에 효도하고 친구간에 신의가 있었으며,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하였으니, 이 비록 간략하나 가히 백세(百世)에 징거(徵據)할만 하도다.   그 생년(生年)은 성종(成宗) 1484 갑진(甲辰)이요, 그 졸년(卒年)은 중종(中宗) 1540 경자(庚子)이며, 그 묘소는 살던 곳 개화리(開花里) 후강(後岡) 유좌원(酉坐原)이니, 곧 선영(先塋) 아래이다.   류씨(柳氏)로써 그 선계(先系)는 문화인(文化人)인데 선생에 이르러 비로소 거창(居昌)에서 살았으니 외가(外家)의 고을을 따라 오신 것이다.   시조(始祖)는 휘 차달(車達)인데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통일의 공(功)을 능히 이룸으로써 관직이 대승(大丞)에 이르고 명망(名望)이 사기(史紀)에 드러났다. 이조(李朝)에 이르러 휘 양(亮)은 태종(太宗)을 섬겨 관직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고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策錄)되어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으로 시호(諡號) 충경(忠景)이니 선생의 고조(高祖)이시다. 증조(曾祖)는 한생(漢生)이니 종부사소윤(宗簿寺少尹)이요, 조(祖)는 훈(纁)이니 군수(郡守)요, 고(考)는 수장(壽長)이니 역시 군수(郡守)이며, 비(妣)는 거창신씨(居昌愼氏)로 군수(郡守) 맹종(孟終)의 따님이요, 양렬공(襄烈公) 이충(以衷)의 손녀이다.   배위(配位)는 연일정씨(延日鄭氏)인데 자녀를 두지 못하여 종자(從子) 당(堂)을 취하여 아들을 삼았는데, 당은 음사(蔭仕)로 참봉(叅奉)을 지냈다. 당의 아들은 억령(億齡)이요, 억령의 아들은 배(培)요, 배의 아들은 종기(宗起)와 종필(宗弼)이며, 이하는 성략(省略)한다.   이번에 종필의 구세손(九世孫) 인상(寅尚)이 선생의 묘소 아래에 재실(齋室)을 지어 화산재(華山齋)라 이름하고 세사(歲祀) 때에 재숙(齋宿)의 장소를 갖추었으며, 또 그 아우 인한(寅漢) 및 족질(族姪) 정렬(丁烈), 족손(族孫) 지학(志學) 등으로 더불어 한 높 (490) 다란 비석(碑石)을 다듬어 장차 재실(齋室) 뜰에 세우고자 하는바, 그 종손(宗孫) 명석(明錫)이 노파(蘆坡) 이공(李公)(이(李) 흘(屹))이 지은 행장(行狀)으로 나의 친구 김(金) 준(濬)을 시켜 비(碑)에 새길 글을 청하였다.   돌이켜 보건데 헌주(憲柱)가 재주가 없어 아는 것도 적고 글도 못하는데 어찌 이 부탁을 감당하겠는가 만은 효손들의 선조(先祖)의 사적(事蹟)을 계술(繼述)하고자 하는 성의가 아름답고, 또 나의 친구의 근실한 뜻을 가히 저버릴 수 없어, 드디어 서술(叙述)하고 이어 명(銘)에 이르노니,  
 진실하도다 선생이여! 일대의 훌륭한 유현(儒賢)으로써, 
 
 학문은 성리(性理)를 위주하고, 행실은 인륜(人倫)에 힘쓰시어, 
 
 행실과 학문이 이미 진실하니 명예가 사방에 들렸도다. 
 
 이미 현량과(賢良科)에 선발되고 또 관찰사(觀察使)의 천거에 올랐으나, 
 
 시골에 묻쳐 부임(赴任)치 않고 은거(隱居)하기를 길이 맹서하셨도다. 
 
 영천(瀯川)의 고기가 살찌고 감악산(紺岳山)의 나물이 맛있는바, 
 
 내가 고기 잡고 나물캐니 참 즐거움이 이에 있었도다. 
 
 세상을 잊는데 과감한 것이 아니요, 때를 그렇게 만났도다. 
 
 그 일생을 살펴 보건데 명예와 절조에 흠이 없었으니, 
 
 옛적에 명철(明哲)이라 이른바 선생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이제 세대가 오래되어 아름다운 명성이 더욱 멀어지고, 
 
 또한 문헌(文獻) 마저 다 재액(災厄)을 당하여 없어졌도다. 
 
 어진 후손들이 이를 슬퍼하여 이 일을 경영하는바, 
 
 이 재실(齋室) 뜰에 높은 비(碑)를 세우게 되었도다. 
 
 묘소 또한 가까워 정령(精靈)이 완연히 계시나니, 
 
 오히려 남몰래 도우시어 천년토록 복(福)을 내리소서.

단기사천삼백십삼년경신양복절

성산이헌주근찬남평문재근근서거창군수성산려주환근전

 

楸潭柳先生子房遺蹟碑文

 

夫士之蘊抱經綸而無所試於世枯槁老死於岩穴之中者豈素所自期哉盖其所遇之時有不幸焉耳苟遇時不幸而耽位戀祿不知止焉則冒進之患生而覆餗之禍至矣此從古明哲之士寧終身自甘於廢棄而不肯枉志以求世用者也且夫君子之出處何常之有見可而動知難而止隨所遇而適於義而已彼遇不遇之在天者吾且如之何哉今余讀楸潭先生柳公之狀而有感焉先生諱子房字澤之自幼已知事親大道左右就養無方及丁內外喪哀極而禮備鄕黨莫不稱孝服闋遂廢擧業專心性理之學探究奧賾不得不措與同郡止止堂邢先生龜山卞先生爲道義交相磨礱以取益焉逮 中廟改玉靜菴趙先生首被際遇之隆汲引名流設賢良科而先生及止止堂龜山三賢俱與其選人皆榮之而先生不就後又以遺逸薦除金泉道察訪而亦不赴就楸潭之上而起一亭用寓松楸之感因自號曰楸潭庭畔種柳植松日逍遥盤桓囂囂以自樂嘗有詩曰蘭萎于谷玉焚岡時事看來淚滿眶爵祿於人眞陷穽 (487) 不如搖首臥茅堂又曰瀯川魚可食紺岳菜宜茹生涯漁釣付眞樂果何如盖先生傷時憂國之志隱居考槃之趣卽此數詩語可以想見矣旣而北門禍作士類多被戕戮而先生獨免人服其先見之明焉嗚呼若先生豈非知時審勢而出處適於義者耶吁其韙矣獨恨夫以彼行學旣不需世沒又詩文盡失於兵燹事蹟隨以湮沒無由攷其詳也惟潛谷金相國己卯錄載先生之事曰有操行孝親信友通經史此雖略猶可爲徵於百世矣其生爲  成廟甲辰其卒爲  中廟庚子其葬爲所居開花里後岡之酉原卽 先兆下也柳氏其先文化人至先生始居居昌盖從外氏鄕而來也始祖諱車達佐麗太祖克成統一之功官至大丞名著于史至李朝諱亮事 太宗位至右揆錄佐命功臣文城府院君諡忠景於先生爲高祖曾祖曰漢生宗簿少尹祖曰纁郡守考曰壽長亦郡守妣居昌愼氏郡守孟終之女襄烈公以衷之孫配延日鄭氏無育取從子堂爲嗣蔭叅奉堂之子曰億齡億齡之子曰培培之子曰宗起宗弼以下省略玆者宗弼九世孫寅尚就先生墓下築齋曰華山以備歲時齋宿之所旣又與其弟寅漢及族姪丁烈族孫志學等治一穹石將樹于齋庭其冑孫明錫以蘆坡李公所撰狀介吾友金濬請顯刻之辭顧憲柱不佞識薄文萎何敢當是寄第嘉孝孫述先之誠而且吾友之勤意有不可孤遂叙之而系以銘曰 允矣先生一代之賢學主性理行敦彝倫行學旣實令譽四聞旣叅賢良亦登剡薦牢臥不赴考槃永矢瀯川魚肥紺山菜美我漁我採眞樂在是非果忘世値時然耳考厥一生名節無疵古云明哲非公其誰距世寖遠聲徽愈邈亦粤文獻盡被災厄賢仍是惕載謀載營爰立崇碑于齋之庭堂斧密邇精靈宛爾尚其陰隲垂祉千禩

檀紀四千三百十三年庚申陽復節

星山李憲柱謹撰 南平文宰根謹書居昌郡守星山呂鉒煥謹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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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199  월파류공팽로묘갈명 (月坡柳公彭老墓碣銘) 207     편집인 2012/11/26  [1116]  
198  월파공(팽로)사적 (月坡公(彭老)事蹟) 206     편집인 2012/11/26  [962]  
197  양의정시녕부원군문정공(전)시장 (領議政始寧府院君文貞公(㙉)諡狀) 205     편집인 2012/11/26  [1227]  
196  함경병마절도사류공(경선)묘갈명 (咸鏡兵馬節度使柳公(敬先)墓碣銘) 204     편집인 2012/11/26  [955]  
195  풍기공(경장)묘지명 (豐基公(敬長)墓誌銘) 203     편집인 2012/11/26  [1034]  
194  승문박사공(경인)묘갈명 (承文博士公(敬仁)墓碣銘) 202     편집인 2012/11/26  [1036]  
193  송호공(정)일문사의사적 (松壕公(汀)一門四義事蹟) 201     편집인 2012/11/26  [1047]  
192  자헌대부공조판서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령의정류공 200     편집인 2012/11/26  [1153]  
191  승지공(혼)약사 (承旨公(渾)略事) 199     편집인 2012/11/26  [899]  
190  계휴정공 (위) 약사 (繼休亭公(湋)略事) 198     편집인 2012/11/26  [923]  
189  평안병사공(비)신도비명 (平安兵使公(斐)神道碑銘) 197     편집인 2012/11/26  [1100]  
188  증판서공(몽필)묘표 (贈判書公(夢弼)墓表) 196     편집인 2012/11/26  [839]  
187  증참의공(몽주)묘갈명 (贈參議公(夢周)墓碣銘) 195     편집인 2012/11/26  [1063]  
186  학암공(몽정)묘갈명 (鶴巖公(夢鼎)墓碣銘) 194     편집인 2012/11/26  [1199]  
185  남재공(몽삼)묘갈명 (南齋公(夢參)墓碣銘) 193     편집인 2012/11/26  [932]  
184  청계공(몽정)신도비명 (淸溪公(夢井)神道碑銘) 192     편집인 2012/11/26  [1147]  
183  증판서공(몽익)신도비명 (贈判書公(夢翼)神道碑銘) 191     편집인 2012/11/26  [1030]  
 추담류선생자방유적비문 (楸潭柳先生子房遺蹟碑文) 190     편집인 2012/11/26  [1025]  
181  추담공(자방)묘표 (楸潭公(子房)墓表) 189     편집인 2012/11/26  [1043]  
180  사헌부장령관재공(정수)묘갈명 (司憲府掌令觀齋公(廷秀)墓碣銘) 188     편집인 2012/11/2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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