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포럼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아이디 패스워드    
 
   
 
     
 

          
View Article  
  작성자  편집인
  제    목  자헌대부공조판서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령의정류공 200


자헌대부공조판서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령의정류공

잠신도비명

 

資憲大夫工曹判書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柳公

潛神道碑銘

 

  옛날 안산(安山) 땅 잉화면(仍火面) 광곡(廣谷) 목실리(木實里)는 지금의 경기도(京畿道) 시흥불(始興巿) 능곡동(陵谷洞)이다.   능곡동(陵谷洞)의 뒷산 인좌(寅坐) 언덕에 한 산소가 있는데 장사한 지 수백년의 오랜 세월이 지난 듯하고 묘정(墓庭)의 넓이는 수십명이 참배할 수 있으니 이는 선조조(宣祖朝)의 신신(藎臣)(충신(忠臣))인 공조판서(工曹判書) 류공(柳公)의 산소이다. 후손의 정성으로 보나 국가의 제도로 미루어 보나 당연히 거비(巨碑)가 있을만한데 수백년이 지난 오늘에 단표(短表)만 있고 거비가 없으니 이는 혹 검소한 것으로써 예를 다하지 못함은 아닌지? 아침 저녁으로 지나는 사람들도 오히려 묘소의 석물이 갖추어지지 못한 데에 대하여 탄식을 금치 못하거늘, 하물며 자신이 그 기운과 피를 받은 후손으로서 그 쌓인 한이 이보다 심할 수 있겠는가? 일이 거비를 갖추지 않으면 그대로 둘 일이 아닌지라. 이에 후손들이 종석(宗席)에서 의론하여 결정하기를 마땅히 큰 비석을 세울 곳에 비를 세우지 아니 함은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우리 종족의 오늘날의 계획으로 이 비석 세우는 일보다 앞설 것이 없다 하니 온 좌석에서 응락하여 그 계책을 찬성하고 그 일을 돕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글을 청함에 이르러 여러분이 천루(淺陋)한 나를 찾아와 부탁하니 아아! 내가 문(文)과 명(名) 어느 하나도 취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서 어찌 현대부(賢大夫)의 거비(巨碑)의 글을 짓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점을 들어 사양한지 반나절에 끝내 사양치 못하고 드디어 간신히 글을 지으니 아아! 외람되도다. (520)   공의 휘는 잠(潛)이고 자(字)는 둘이 있으니 처음에는 원량(元亮)이고 뒤에는 사소(士昭)라 하였다.   문화류씨(文化柳氏)는 고려(高麗) 대승(大丞) 휘 차달(車達)이 그 상조(上祖)이며 그 후로 세 분의 시호(諡號)와 한 분의 높은 벼슬한 분이 연이어 계셔 고려(高麗)의 중세에 빛났으니 문간공(文簡公) 휘 공권(公權)과 복사공(僕射公) 휘 택(澤)과 문정공(文正公) 휘 경(璥)과 정신공(貞愼公) 휘 승(陞)으로 세상에서 이르기를 「타성(他姓)은 능히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정신공(貞愼公)의 아들은 중문사(中門使) 휘(諱) 인수(仁修)니 이 분이 파조(派祖)이며, 이대를 전하여 휘(諱) 홍(洪)은 개성윤(開城尹)이고, 이 분의 아들 휘 중의(仲宜)는 중랑장(中郞將)이니 공의 오대조(五代祖)이다. 조(祖)인 휘 제근(悌根)은 첨정(僉正)이요, 부(父)인 휘 수천(壽千)은 돈녕부정(敦寧府正)으로 증우찬성(贈右贊成)이며, 모(母)인 정부인(貞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는 대사간(大司諫) 성동(贖)의 여(女)이다.   공이 중종(中宗) 1509 기사(己巳) 6월 24일에 태어났는데 선천적으로 순수한 심성과 기품을 받았으며 후천적으로 아버지의 가르침과 어머니의 양육에 힘입었으니 이웃 마을에서 혹 말하기를 「류씨(柳氏)는 대대로 인재가 있다.」 하였다.   공이 중종(中宗) 1528 무자(戊子)에 소과(小科)에 오르고 1540 병자(丙子)에 대과(大科)에 올랐다. 그 뒤로 글을 잘한다는 명성이 날로 전파되어 관직을 헛되게 얻지 않고 연이어 제수 받아 여러 관직을 역임하셨다.   이제 국사를 근거하여 전후의 대강을 이르자면 공이 명종(明宗) 1546 병오(丙午)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고 이듬해 1547 정미(丁未)에 홍문관(弘文館)으로 옮기어 부수찬(副修撰) · 수찬(修撰) · 교리(校理) · 지제교(知製敎) 겸(兼)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등을 차례차례 역임(歷任)하였는데 있는 곳마다 힘을 다해 각각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이때 마침 중종실록청(中宗實錄廳)의 설치가 있어 공이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하였으며, 재익년(再翌年) 1548 무신(戊申) 2월에 사헌부(司憲府)로 옮기어 지평(持平)이 되었고 얼마후 병조(兵曹)로 옮기어 정랑(正郞)이 되었다. 이 해에 왕명(王命)으로 평안도(平安道) 암행어사가 되어 진휼(賑恤)을 살피고 돌아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 5년 뒤 1552 임자(壬子) 4월에 집의(執義)로 승진하였고 얼마 안 되어 홍문관(弘文館)으로 옮기어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더니 곧바로 의정부(議政府)에 들어가 사인이 되었고 또 상의원(尙衣院)으로 옮기어 정(正)이 되었다. 재익년(再翌年) 1554 갑인(甲寅) 9월에 경복궁(景福宮)을 수리한 공으로 당상에 승진하여 장악원(掌樂院)의 정(正)이 되었고, 그 이듬해 8월 외직으로 나가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 3년 뒤 1558 무오(戊午) 2월에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었고 1559 기미(己未)에 승정원(承政院)에 발탁되어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재익년 1560 경신(庚申) 5월에 병조참(兵曹參) (521) 의(議)가 되었더니 곧바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황제(皇帝)를 알현(謁見)하고 돌아와 중추부(中樞府)로 옮기어 첨지(僉知)가 되었다. 재익년(再翌年) 1562 임술(壬戌) 정월에 병조참의(兵曹參議)가 되었고 10월에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었고 재익년 1564 갑자(甲子)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다가 후에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옮기었다.   공이 일찍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족인(族人) 희잠(希潛)이 족보를 편찬한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몸이 국사에 얽매이어 그 하는 일을 좋게 여기면서도 이를 돕지 못하였더니 이때에 이르러 공이 경주부윤(慶州府尹) 류지선(柳智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정언각(鄭彦慤) 양공(兩公)과 의논하여 그 분간(分刊)을 돕고자 하였으나 흉년으로 인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희잠(希潛)이 족보에 관심이 깊은 공을 중히 여기고 손수 이본(二本)을 써서 일본(一本)은 자기 집에 소장하고 일본은 공에게 보내어 후일에 널리 전할 것을 도모하였다. 간행에 이르러 공이 충청도관찰사로서 책 끝에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 공이 이 족보에 공로가 컸었음을 가히 알 수 있다.   익년(翌年) 1565 을축(乙丑)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상(喪)에 동지(同知)로 수릉관(守陵官)을 지냈는데 그 공로로 일자급(一資級)이 승진되고 아울러 공의 아들 자신(自新)에게 또한 참봉(參奉)의 제수(除授)가 있었으니 이는 특이한 은혜였다. 재익년(再翌年) 1567 정묘(丁卯) 11월에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선조(宣祖)께서 즉위(卽位) 후 5년 1572 임신(壬申)에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으며, 이듬해 1573 계유(癸酉)에 정시(庭試)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1574 갑술(甲戌) 12월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됨과 동시에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品階)에 올랐다. 재익년(再翌年) 1576 병자(丙子) 11월 16일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8세였다.   아아! 공의 일평생 행치(行治)(사행(事行))가 어버이 섬김에서 비롯하여 능히 입신양명으로 현부(顯父)의 효를 실천하였고, 임금을 섬기는 것으로 끝을 맺어 요순군민(堯舜君民)의 세상을 만들려고 하였으니, 그 당시 가언(嘉言)과 의행(懿行)이 당연히 기록되고 가히 전할 만한 것이 많았을 것인데 국사에 기록은 되었으나 미진한 부분이 있고, 가록(家錄)은 간략하여 완전치 못하니 이것이 가언(嘉言)은 민몰(泯沒)되기 쉽고 의행은 온전히 전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애석하도다.   배위(配位) 하동정씨(河東鄭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니 증참판(贈參判) 승렴(承濂)의 여(女)로 1510 경오(庚午) 8월15일에 태어나시고 1587 정해(丁亥) 6월10일에 돌아가시니 합부(合祔)하였다. (522)   이남(二男)을 길러 장남(長男) 자신(自新)은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이요, 차남(次男) 덕신(德新)은 돈녕부도정(敦寧莩正)이었다.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이 동래정씨(東萊鄭氏) 좌상(左相) 유길(惟吉)의 여(女)에게 장가들어 육남사녀를 생(生)하니 장남(長男) 희갱(希鏗)은 생진(生進)에 올랐으나 일찍 졸하고, 이남 희담(希聃)은 문원군(文原君)이요, 삼남 희분(希奮)은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이요, 사남 희발(希發)은 부제학(副提學)이요, 오남 희량(希亮)은 관찰사(觀察使)였고, 육남 희안(希安)은 첨정(僉正)이었으며, 장녀(長女)는 한창군(漢昌君) 조국필(趙國弼)에게 출가(出嫁)하고, 이녀는 군수(郡守) 이덕일(李德一)에게 출가하고, 삼녀는 광해군(光海君) 이(李) 혼(琿)에게 출가하고, 사녀는 현감(縣監) 김시보(金時輔)에게 출가하였다. 도정공(都正公)은 배위(配位)가 두 분인데 전부인은 당진한씨(唐津韓氏)로 수의부위(修義副尉) 의(誼)의 여(女)이고, 후부인은 경주최씨(慶州崔氏)로 판관(判官) 열(悅)의 여(女)이다. 사남륙녀를 낳으니 장남(長男) 희성(希成)은 증리조참판(贈吏曹參判)이요, 이남 희로(希老)는 도정(都正)이요, 삼남 희설(希契)은 현감(縣監)이요, 사남 희익(希益)은 일찍 졸하였으며, 장녀(長女)는 금산군(錦山君) 이성윤(李誠胤)에게 출가하고, 이녀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박(朴) 엽(燁)에게 출가하고, 삼녀는 부사(府使) 이대득(李大得)에게 출가하고, 사녀는 도정(都正) 양(梁) 억(嶷)에게 출가하고, 오녀는 감역(監役) 이정양(李貞陽)에게 출가하고, 육녀는 감역(監役) 김(金) 석(晳)에게 출가하였다. 또 아들 둘이 있으니 희연(希衍)과 희윤(希允)이다. 모두 공(公)에게 손행(孫行)으로 더욱 번창하여 벼슬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명(銘)을 지어 이르노니,   
 선조(宣祖) 때에 신하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 류공(柳公)이시다. 
 
 대승공(大丞公)의 서업(緒業)이 혁혁(赫赫)하여 견줄 자가 없었도다. 
 
 스무살 안팎에 소과(小科)에 급제하고, 서른 두 살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셨도다. 
 
 앞길이 훤히 열리어 원도(遠到)를 가히 기약하였도다. 
 
 두 번 홍문관(弘文館)에 오르니 그 식견(識見)이 넓었고, 
 
 네 번 사헌부(司憲府)에 들어가니 그 심지가 곧았도다. 
 
 평안도(平安道)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가 진휼(賑恤)을 법(法)대로 시행하였고, 
 
 충청(忠淸) 경기도(京畿道) 관찰사(觀察使)로서 직분을 능히 실천했도다. 
 
 중국(中國)에 사신(使臣)으로 가시어 전대(專對)에 욕되지 읺았고, 
 
 정시(庭試)에 시관(試官)이 되어 마음에 편벽(偏僻)됨이 없었도다. 
 
 오직 명종조(明宗朝)에 발간된 가정보(嘉靖譜)는 족보(族譜)의 효시(嚆矢)이거니, 
 
 돈목(敦睦)을 실행하고자 함에 옆에서 어찌 돕지 않겠는가? (523) 
 
 집에 있음에 집안이 가지런히 다스려지고, 
 
 조정(朝廷)에 있을 때에는 정사(政事)가 잘 다스려졌도다. 
 
 우러러 보지 않는 이 없고 칭찬하지 않는 이 없었도다. 
 
 이처럼 나가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했을까? 
 
 그런데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그치니 조야(朝野)에서 모두 놀랐도다. 
 
 나이 70이 못 되어 치사(致仕) 아닌 치사(致仕)를 하였으니, 
 
 공(公)에 대해서 알려면 백세의 공론을 기다릴지어다. 
 
 행적(行蹟)을 드러냄이 비록 늦었지만 정성을 다하였으니, 
 
 화려한 비석(碑石)이 밝게 전하여 다함이 없으리라.

유조엄무대장월중순일

월성정동휘근찬

 

資憲大夫工曹判書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柳公

潛神道碑銘

 

維舊安山之仍火面廣谷木實里於今爲圻之始興巿陵谷洞也洞之後麓寅原有一堂斧葬可爲累百禩之久庭可容幾十人之拜者寔穆陵藎臣工曹判書柳公之墓也揆以裔誠觀以國制宜有巨碑而年垂累百之今有短表而無巨碑是無或近於儉不中禮者耶朝暮行過之人尙不禁墓儀未完之嘆況身在氣授血禪之地者其茹恨孰甚於此事當不具不措於是後孫諸彦議於宗席而有定曰當碑而不碑是牙理吾族今日之計莫先於此一座諾諾無不贊其謀而助其役及其乞文諸彦訪余淺陋徵其文噫余於文於名一無有者奚可堪賢大夫巨碑撰者之任余以此辭之半晌終不獲命遂黽俛酬之嗚呼濫矣公諱潛字有二初曰元亮晚曰士昭文化柳氏高麗大丞諱車達其上祖厥後有三諡一宦聯曜麗之中世者曰文簡公諱公權曰僕射公諱澤曰文正公諱璥曰貞愼公諱陞世謂他姓莫能及貞愼之生中門使諱仁修是爲派祖再傳諱洪開城尹是生諱仲宜中郞將於公爲五世祖祖曰悌根僉正父曰壽 (518) 千敦寧府正贈右贊成母貞夫人安東金氏大司諫贖女公以靖陵己巳六月二十四日降于世其得於先天者性純而氣粹得於後天者父擩而母染隣里或云柳氏世有人公中宗戊子登小科庚子捷大科自後文聲日播官不虛得而朝除暮授歷許多官今據國史擧其前後之概則公明宗丙午爲司憲府持平翌年丁未移弘文館次第歷副修撰若修撰若校理若知製敎若兼若經筵侍讀官隨在盡力各有能聲時適有靖陵實錄廳之設公以記注官參焉再翌年戊申二月移憲府爲持平俄遷兵曹爲正郞是年以命直指關西監其賑恤及還陞掌令越五年壬子四月陞執義俄移弘文館爲副應敎尋入議政府爲舍人且移尙衣院爲其正再翌年甲寅九月以修景福宮勞陞堂上正掌樂院翌年八月出尹沛鄕越三年戊午二月爲刑曹參議翌年己未擢入政院爲同副承旨再翌年庚申五月爲兵曹參議尋爲聖節使朝天及還移中樞府爲僉知再翌年壬戌正月爲兵曹參議十月爲刑曹參判再翌年甲子出監湖西旋移圻公嘗在兵議時聞族人希潛之纂譜而絆身國事愛而莫助至是公議諸東都尹柳智善方伯鄭彦慤兩公欲助其分刊因歲荒未果於是希潛重公用意於譜手謄二本一藏于家一送于公以圖後日之廣傳焉及刊公以淸洪道觀察使刻名篇尾公之有功此譜亦可三反矣翌年乙丑於文定王后喪仁知爲守陵官以勞陞一資仍於公胤自新亦有參奉之除蓋異數也再翌年丁卯十一月爲工曹判書宣廟卽祚五年壬申爲刑曹判書翌年癸酉爲庭試官甲戌十二月爲漢城府判尹而階躋資憲再翌年丙子十一月十六日以疾棄祿于家享年六十八噫公一生行治始於事親而克踐其立揚顯父之孝終於事君而欲成其堯舜君民之世其嘉言懿行宜多可錄可傳而國史記而未盡家錄略而未完是無乃嘉言之易逸而懿行之難傳者歟嗚呼惜哉配河東鄭氏貞敬夫人贈參判承濂女生庚午八月十二日卒丁亥六月十日而魯祔育二男長自新漢城判尹文陽府院君次德新敦寧莩正文陽娶東萊鄭氏左相惟吉女生六男四女男長希鏗生進而夭次希聃文原君次希奮文昌府院君次希發副提學次希亮觀察使次希安僉正女長適漢昌君趙國弼次適郡守李德一次適桐主李琿次適縣監金時輔都正娶有二氏前曰唐津韓氏修義副尉誼女後曰慶州崔氏判官悅女生四男六女男長希成贈吏參次希老都正次希契縣監次希益夭女長適錦山君李誠胤次適箕伯朴燁次適府使李大得次適都正梁嶷 鄭氏貞敬夫人贈參判承濂女生庚午八月十二日卒丁亥六月十日而魯祔育二男長自新漢城判尹文陽府院君次德新敦寧莩正文陽娶東萊鄭氏左相惟吉女生六男四女男長希鏗生進而夭次希聃文原君次希奮文昌府院君次希發副提學次希亮觀察使次希安僉正女長適漢昌君趙國弼次適郡守李德一次適桐 (519) 次適監役李貞陽次適監役金晳又有男二曰希衍曰希允皆於公爲孫行而愈遠愈昌簪纓不衰云因銘曰 穆陵有臣曰我柳公大丞之緒赫赫無雙未冠釋褐立二摘髭鵬程因開遠到可期再躋瀛閣其識也博四入栢府其心也直關西直指賑得其法畿湖觀風克踐其職飮氷朝天專對不辱且主庭試心無五辟惟此嘉譜譜之嚆矢爲講敦睦旁助曷已在家家齊在國國治無人不仰無口不譽率此而進何事不能止於兆尹朝野咸驚年未七十不致而致知我罪我百世可俟揭德縱晚注虔則篤煌煌貞珉昭垂罔極

柔兆閹茂大壯月中旬日

月城鄭東暉謹撰

......................................................
[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199  월파류공팽로묘갈명 (月坡柳公彭老墓碣銘) 207     편집인 2012/11/26  [1116]  
198  월파공(팽로)사적 (月坡公(彭老)事蹟) 206     편집인 2012/11/26  [962]  
197  양의정시녕부원군문정공(전)시장 (領議政始寧府院君文貞公(㙉)諡狀) 205     편집인 2012/11/26  [1227]  
196  함경병마절도사류공(경선)묘갈명 (咸鏡兵馬節度使柳公(敬先)墓碣銘) 204     편집인 2012/11/26  [955]  
195  풍기공(경장)묘지명 (豐基公(敬長)墓誌銘) 203     편집인 2012/11/26  [1034]  
194  승문박사공(경인)묘갈명 (承文博士公(敬仁)墓碣銘) 202     편집인 2012/11/26  [1036]  
193  송호공(정)일문사의사적 (松壕公(汀)一門四義事蹟) 201     편집인 2012/11/26  [1047]  
 자헌대부공조판서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령의정류공 200     편집인 2012/11/26  [1152]  
191  승지공(혼)약사 (承旨公(渾)略事) 199     편집인 2012/11/26  [898]  
190  계휴정공 (위) 약사 (繼休亭公(湋)略事) 198     편집인 2012/11/26  [923]  
189  평안병사공(비)신도비명 (平安兵使公(斐)神道碑銘) 197     편집인 2012/11/26  [1100]  
188  증판서공(몽필)묘표 (贈判書公(夢弼)墓表) 196     편집인 2012/11/26  [839]  
187  증참의공(몽주)묘갈명 (贈參議公(夢周)墓碣銘) 195     편집인 2012/11/26  [1063]  
186  학암공(몽정)묘갈명 (鶴巖公(夢鼎)墓碣銘) 194     편집인 2012/11/26  [1198]  
185  남재공(몽삼)묘갈명 (南齋公(夢參)墓碣銘) 193     편집인 2012/11/26  [932]  
184  청계공(몽정)신도비명 (淸溪公(夢井)神道碑銘) 192     편집인 2012/11/26  [1147]  
183  증판서공(몽익)신도비명 (贈判書公(夢翼)神道碑銘) 191     편집인 2012/11/26  [1029]  
182  추담류선생자방유적비문 (楸潭柳先生子房遺蹟碑文) 190     편집인 2012/11/26  [1025]  
181  추담공(자방)묘표 (楸潭公(子房)墓表) 189     편집인 2012/11/26  [1043]  
180  사헌부장령관재공(정수)묘갈명 (司憲府掌令觀齋公(廷秀)墓碣銘) 188     편집인 2012/11/26  [1127]  

    [1][2][3][4][5][6][7][8] 9 [10]..[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