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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월파류공팽로묘갈명 (月坡柳公彭老墓碣銘) 207


월파류공팽로묘갈명

月坡柳公彭老墓碣銘

 

  월파선생(月坡先生) 류공팽로(柳公彭老)가 순절한지 395년 후 1986 병인(丙寅)에 무진백(武珍伯)(전라남도지사(全羅南道知事)) 전석홍(全錫洪)이 도비(道費)를 들여 유집(遺集)을 인쇄함에 이르러 후손 종룡(鍾龍)이 공의 족후손(族後孫) 한상(漢相)과 함께 나를 매화장(梅花莊)으로 찾아와 이르기를 「우리 집은 수대를 독신으로 내려온 데다 가세 또한 곤궁하여 아직껏 비석을 세울 계책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유집은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의견을 세울 글을 가히 빠트릴 수 없고 금번 유고(遺稿)를 간행하는 일을 그대가 실로 시작하였으니 내 어찌 다른 데에 글을 청하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비록 감당치 못할 일이나 사양하는 것 또한 의리가 없어 이에 청사(晴沙) 고공용후(高公用厚)가 지은 행(行) (546) 장(狀)에 의거하고, 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중봉(重峯)(조(趙) 헌(憲)) · 제봉(霽峯)(고경명(高敬命)) 등의 여러 문집(文集)을 상고(詳考)하여 삼가 서술한다.   공의 자는 군수(君壽)요, 월파(月坡)는 그 호(號)이다.   류씨(柳氏)의 관향(貫鄕)은 문화(文化)로써 고려(高麗) 때 대승(大丞) 차달(車達)을 비조(鼻祖)(시조(始祖))로 하여 문간공(文簡公) 공권(公權) · 문정공(文正公) 경(璥) · 정신공(貞愼公) 승(陞) · 장경공(章敬公) 돈(墩)은 모두 고려사(高麗史)에 드러난 분들이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휘 만수(曼殊)는 좌상(左相)이요, 휘 수(洙)는 정난좌리공신(靖難佐理功臣)으로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문성군(文城君)에 이르고 증(贈) 영의정(領議政) 시(諡) 안양(安襄)으로 부조(不祧)의 명(命)이 있었으니 곧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 계손(季孫)은 서흥부사(瑞興府使)요, 조(祖) 재(㘽)는 목사(牧使)요, 선고(先考) 경안(景顔)은 호(號) 합강(合江)으로 충주판관(忠州判官)이며, 선비(先妣)는 남원윤씨(南原尹氏) 봉사(奉事) 부(溥)의 따님과 양천허씨(陽川許氏) 참봉(參奉) 후(垕)의 따님인데 윤숙인(尹淑人)이 명종(明宗) 1554 갑인(甲寅) 2월24일에 옥과(玉果) 합강(合江) 마을 자택에서 공을 출생하였다.   공은 강보(襁褓)에 싸여 어렸을 때 모친을 여의고 조모에게 의하여 양육되었다. 재주와 성품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6세 때 대인공(大人公)(부친(父親))께서 윤문효공(尹文孝公)(추계(楸溪) 윤효손(尹孝孫))의 시(詩)를 외우면서 이르기를 「네가 가히 차운(次韻)을 지을 수 있겠느냐?」 하니, 즉시 대답하여 아뢰기를 「앞에 합강수(合江水)가 있고 뒤에 옥출산(玉出山)이 있으니, 원컨대 강과 산의 수명을 빌려 오직 어버이 얼굴을 기쁘게 해드렸으면」 하였다.   오복재(吳復齋) 수성(遂性)에게 글을 배웠는데 열심히 공부하여 게을리 하지 않더니 26세에 사마(司馬)(생원(生員)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35세에 문과(文科)에 등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배속(配屬)되었다. 그런데 당시 부친께서 병석에 누워 계시므로 봉양을 청원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지성으로 시탕(侍湯)하다가 드디어 상(喪)을 당하여 묘소 곁에 여막(廬幕)을 치고 지내면서 조석으로 나아가 곡읍(哭泣)하기를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려도 혹 폐하지 않고 쇠질(衰絰)(상복(喪服))을 벗지 않은 채 애척(哀戚)하기를 3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복(服)을 마친 후 효행으로 도백(道伯)의 계문(啓聞)이 있어 박사에 제수되었다. 공이 대궐에 나아가 사은(謝恩)하고 연이어 세 차례 상소를 올렸는데 그 양사(養士)를 논하기를, 삼대(三代)의 제도를 근본하여 인재를 얻음을 위주해야 하고, 재이(災異)를 논하기를 성의를 다하고 덕을 닦음으로 폐단을 없애는 도리를 삼아야 하며, 간언(諫言)을 받아들이고, 공적(功績)을 상고하며, 재물을 이용하고, 군병(軍兵)을 양성하며, 원방(遠方)을 복종시키고, 변방(邊方)의 근심을 막는데 이르기까지 맞지 않은 말이 없었으며, 특히 도이(島夷)의 침입이 (547) 시급한 걱정임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중봉(重峯)이 왜사(倭使)를 목 베자고 청한 것을 주상께서 듣지 않은데 대해서 주먹을 불끈 쥐며 탄식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하여 마지않았다.   또 아뢰기를 「제승(制勝)의 중요한 요건은 어진 장수를 얻는 것 보다 더함이 없고, 어진 장수는 또 어진 임금을 얻는 것보다 더함이 없습니다. 이제 의천(倚天)의 칼을 휘두르고 오호(烏號)의 활을 당길지라도 그 장수가 조괄(趙括)이라면 능히 백기(白起)를 막아내겠습니까? 태공(太公)으로 상장(上將)을 삼고, 양저(穰苴)로 중군(中軍)의 장수를 삼고, 손빈(孫臏)으로 좌장(左將)을 삼고, 오기(吳起)로 우장(右將)을 삼은들 그 임금이 주왕(紂王)이라면 가히 무왕(武王)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천하의 장기(長技)를 모아서 군사를 만들어도 그 장수의 유능한 것만 못하고, 만고의 영웅(英雄)을 모아서 장수를 삼는다 해도 그 임금의 유도(有道)함만 못합니다.」 하였다. 월사(月沙)(이정구(李廷龜))가 이 상소를 보고 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음을 칭탄하였다.   공이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로 옮김에 즈음하여 왜구가 쳐들어옴에 주상께서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각기 마필(馬匹)을 내어 군사를 돕도록 하였던 바, 공이 마필을 구하러 방황하였으나 뾰족한 계책(計策)이 없었는데 마침 선조(先祖) 안양공(安襄公)(문성군(文城君))의 현몽(現夢)으로 신마(神馬)를 얻어 순창(淳昌)에 다다르니 오백여(五百餘) 부랑배(浮浪輩)가 한 곳에 모여 왜적(倭賊)에게 부역(附逆)하고자 하거늘, 공이 의리(義理)로서 효유(曉諭)하니 그 여러 사람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이에 대청기(大靑旗)에 「전라도의병진동장군(全羅道義兵鎭東將軍) 류모(柳某)」라 써서 세우고 행군(行軍)하여 순창(淳昌) 성중(城中)으로 들어가니 군수(郡守) 임백영(任百英)이 문을 열고 나와 맞이하고 군병(軍兵)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였다. 곧바로 옥과(玉果)에 다달아 현감(縣監) 안(安) 곡(鵠)으로 더불어 고을 남쪽들에 진(陣)을 치고 부오(部伍)를 정돈하여 두 편대로 나누어 각기 한 부대씩 거느리었다.   드디어 도내(道內)에 격문(檄文)을 돌리고, 재차 영남(嶺南)(경상도(慶尙道))에 격문(檄文)을 돌리고, 삼차(三次)로 경기도(京畿道) 충청도(忠淸道) 황해도(黃海道) 평안도(平安道) 사도(四道)에 격문(檄文)을 돌리었다. 그 격문(檄文)에 대략 이르기를 「여러분께 삼가 원하건대 진영(陣營)이 합해지면 그림자처럼 따를 것이요, 깃발의 바람이 동하면 산울림처럼 호응하여 혹은 붓을 던지고, 혹은 쟁기를 놓아두고 일어나며, 또 수레를 내주고 또 군량도 실어 와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권하고 형은 아우에게 권하여 무위(武威)를 떨치고, 선비는 장수되고 백성은 군병이 되어 더욱 날랜 기운을 떨칠지니 비록 마원(馬援)이 늙었어도 어찌 쓰지 못하겠으며 윤탁(尹鐸)이 젊지만 반드시 돌아왔습니다. 피를 마시며 동맹(同盟)하고 병부(兵符)를 맞추듯이 의논을 정했으니 일 (548) 을 시작하고 모책(謀策)을 세운 사람은 나이지만 절의(節義)를 세우고 끝을 마칠 분은 그 누구이겠습니까?」 운운하였다.   화순(和順) 광주(光州) 창평(昌平) 장성(長城) 남원(南原) 등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의병(義兵)을 모아 일천여명이 됨에 제봉(霽峯)에게 서신을 보내어 담양(潭陽)에서 회동(會同)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여러 고을에서 의병들이 속속 도달하여 육천(六千)여명에 이르렀다. 이에 제봉(霽峯)을 추대하여 대장(大將)을 삼고, 공은 청계(淸溪) 양대복(梁大樸)으로 더불어 좌우(左右)의 부장(副將)이 되고, 청계(淸溪) 안(安) 영(瑛)과 제봉(霽峯)의 아들 학봉(鶴峯) 인후(因厚)를 전후(前後)의 장(將)으로 삼고, 금계(琴溪) 이대윤(李大胤), 미능(未能) 최상중(崔尙重), 어은(漁隱) 양사형(楊士衡)을 양향유사(糧餉有司)로 삼았다. 이에 여러 군사들이 공이 대장(大將)의 지위에 오르지 않은 것으로 말을 만들어 떠들썩하므로, 공이 칼을 들어 단(壇)을 치면서 이르기를 「대사(大事)가 이미 정해졌거늘 무슨 이의(異議)가 있는가?」 하니 온 군사들이 벌벌 떨며 감히 다시 말을 하지 못하는 한편 훈련을 받아 위세(威勢)가 당당하였다.   이날 밤 제봉(霽峯)과 함께 천상(天象)(천기(天氣))을 보았는데 제봉(霽峯)이 이르기를 「형혹성(熒惑星)이 기두(箕斗)에 들고 술방(戌方)의 붉은 기운이 형혹성에 부딪혀 형혹성의 빛이 죽어가고 있으니 금번 이 병화(兵火)(난리(亂離))는 실로 천운(天運)이라. 왜적(倭賊)은 반드시 술년(戌年)에 운(運)이 다할것이나 그러나 어떻게 6~7년을 버틸 수 있겠는가?」하니, 공이 이르기를 「적은 먼저 이기고 뒤에 패하는 이치가 있으며, 우리는 먼저 패해도 뒤에 이길 이치가 있으니 저들은 반드시 1598 무술(戊戌)에 운(運)이 다할 것입니다.」 하였다.   대가(大駕)(어가(御駕))가 평양(平壤)으로부터 의주(義州)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義兵)을 정돈하여 근왕(勤王)할 계책으로 진군(進軍)하여 여산(礪山)에 이르렀는데 이때 적(賊)이 금산(錦山)을 침범하여 군수(郡守)는 패하여 죽은지라. 즉시 중봉(重峯)과 통하여 군사를 합쳐 적(賊)을 무찌를 것을 약속하고 금산의 와평(臥坪)에 다다라 방어사(防禦使) 곽(郭) 영(嶸)으로 더불어 좌우익(左右翼)을 삼아 토성(土城)에서 적을 공격하니 적(賊)의 전세(戰勢)가 크게 꺾이어 해 저물녘에 퇴각(退却)하였다. 그러나 이날 밤 다른 변고(變故)가 있을까 두려워 적진(賊陣)을 마주 대하여 야숙(野宿)을 하는데 적(賊)이 과연 침범하려다가 발각되자 도망하였다. 이튿날 도전하였는데 적이 불리하여 물러나므로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여 승승장구(乘勝長驅)함을 틈타 관군(官軍)은 북문(北門)을 공격하고 공은 서문(西門)을 공격하였는데 적이 관군의 진(陣)이 취약함을 알고 모두 다 출격하여 관군이 크게 무너졌다. 이 때 공의 부하가 서로 급히 부르짖으며 아뢰기를 「관군이 무너졌으니 의병도 따라 무너집니다.」 하더니, (549) 제봉(霽峯)이 말에서 떨어지고 말은 도망하였다. 안공(安公)은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주고 도보(徒步)로 따라왔으나 공만은 말이 워낙 건실해서 먼저 빠져 나와 노복(奴僕)에게 묻기를 「대장(大將)은 어디에 계시느냐?」 하니, 노복이 아뢰기를 「대장은 이미 벗어났습니다. 일이 급한데 어찌 도망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공이 몇 걸음 걷다가 대장이 뒤에 있는 것을 알고 말을 돌이켜 좇아가니 노복이 말고삐를 붙들고 울면서 달아날 것을 청하였다. 공이 듣지 않으므로 노복이 또 강경히 말리거늘, 공이 칼을 빼어 치려고 하자, 노복이 그만두었다. 제봉(霽峯)이 공을 보고 「내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대는 빨리 달아나라.」 하니, 공이 이르기를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안공(安公)과 함께 적(賊)의 창검(槍劍) 앞에서 제봉을 몸으로 가리다가 마침내 적에게 함께 죽으니 곧 임진년(壬辰年) 7월 10일이었다. 공의 말 역시 많은 창을 맞아 온 몸에 피를 흘리며 슬피 울고 한번 뛰더니 곁에 이끄는 사람이 없으므로 마침내 공의 수급(首級)을 찾아 입에 물고 곧바로 달려 옥과(玉果) 본가(本家)에 이르렀다.   부인(夫人) 김씨(金氏)는 공이 전장(戰場)에 나간 후로 집 뒤에 단(壇)을 쌓아 놓고 밤낮으로 지성껏 기도하더니 갑자기 말의 울음소리를 듣고 문밖으로 나가다가 거꾸러져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곁에 사람의 구원으로 정신을 차려 자상히 보니 말은 이미 죽어 있었고 사람의 머리 하나만 땅에 떨어져 있는지라. 드디어 받들고 방으로 들어가 옷과 이불을 갖추어 초빈(草殯)을 해두었다가 후에 장례를 모시었으니 지금의 남원군(南原郡) 대강면(帶江面) 생암리(生巖里) 직동(直洞) 자좌(子坐)의 묘소이다.   후에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사간(司諫)에 증직(贈職)되었다. 왕세자(王世子)가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며, 후에 좌승지(左承旨)에 가증(加贈)되고, 광주(光州) 포충사(褒忠祠) · 금산(錦山) 종용사(從容祠) · 옥과(玉果) 영귀서원(詠歸書院) 등 여러 사우(祠宇)에 배향(配享)되고, 또 옥과(玉果) 도산단(道山壇)과 옥산사(玉山祠)에 주향(主享)으로 모셔졌다.   배위(配位) 김씨(金氏)는 원주인(原州人) 침(琛)의 따님으로 일찍이 규범(閨範)이 있었는데 공의 양례(襄禮)(장례(葬禮))를 마치고 패도(佩刀)를 꺼내어 스스로 목을 찔러 흐르는 피가 낭자하였으나 곁에 사람이 급히 구함으로 인하여 다시 소생하여 일년 남짓만에 마침내 슬픔 끝에 죽었다. 이로써 공과 함께 정려(旌閭)의 특명(特命)이 내리었으며, 묘(墓)는 합폄하였다.   계자(系子) 담(萏)은 진사(進士)로 순릉참봉(順陵參奉)이며, 손(孫) 시발(時發)은 현감(縣監)이요, 시화(時和)는 사과(司果)이며, 사위 윤(尹) 자는 생(生) (550) 원(員)인데 남원인(南原人)이고, 이필형(李必馨)은 전주인(全州人)이다. 시발(時發)은 무육(無育)하여 시화(時和)의 장자 사룡(思龍)을 후사(後嗣)로 삼았으며, 시화(時和)의 차자(次子)는 계룡(繼龍)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공이 효행으로 도백(道伯)의 계문(啓聞)에 올랐으나 그러나 세상에서 어버이를 잘 섬긴 자는 또한 많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오직 성의로서 왕사(王事)를 위하여 뛰어난 충성과 큰 절의를 행하고자 칼날을 밟고 또는 끓는 물에 뛰어들기를 평지(平地)와 같이 여기는 자는 학문의 힘과 지극히 크고 강한 기운을 가슴 속에 굳게 지니지 않았다면 어찌 능한 일이겠는가?   공이 유가(儒家)를 설명한 것을 볼진대 사람의 법도를 유지하고 조화를 세우는 것은 유도(儒道)의 천지요, 명교(名敎)를 밝히고 정치를 베푸는 것은 유도의 일월이다. 유도가 행해지면 당세에 현저한 덕택을 입고, 유도가 밝아지면 만세에 은연(隱然)히 아름다운 영광을 무릅쓰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선성(先聖)과 후성(後聖)이 그 법도는 하나인 것이다. 어찌 궁(窮)하고 달(達)한 것으로 우리 유도를 논하겠는가? 하고, 또한 역대 치란성쇠(治亂盛衰)를 거론하고, 끝으로 선비를 등용하면 다스려지고 등용치 않으면 어지럽다 하였으며, 병가(兵家)를 설명하여 이르기를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군사가 있어야 하고 군사가 있으면 반드시 장수가 있어야 한다. 장수를 제대로 얻은 뒤에 군사를 통솔할 수가 있는 것이요, 군사를 제대로 통솔한 뒤에 국가가 편안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군사를 쓰는 데는 법도가 있는 것이고, 그 꾀도 다함없는 것이며 그 묘함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혹은 기(奇)로 하고 혹은 정(正)으로 하여 일정하지 않은 기밀이 있는 것이고, 혹은 물리치고 혹은 지킴에 일정하지 않은 형세가 있는 것이니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바람과 우뢰처럼 치닫는 것이요, 가리키고 돌아보는 사이에 천일(天日)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니 군사를 잘 쓰는 사람이 아니고는 족히 말할 수가 없다. 또한 황제(黄帝)의 오진(五陣)과 태공(太公)의 삼진(三陣)과 육도삼략(六韜三略)과 손빈(孫臏) 오기(吳起)의 병법(兵法)을 거론하고 끝으로 사람의 임금 된 자 정밀한 마음으로 무예(武藝)를 익히고 상석(上席)을 비워 놓고, 옆자리에서 어진 이를 구할 것이요, 긴 휘파람을 불어 적을 물리치고 바둑을 두며 적진을 부수는 것이 다 우리 서생(書生)의 일이라 말하였으며, 농가(農家)를 설명하여 이르기를 나라는 백성으로서 근본을 삼는 것이요, 백성은 먹는 것으로서 생명을 삼는 것이요, 농사는 의식의 근원이니 왕정(王政)의 마땅히 먼저 힘쓸 바이다. 윗사람이 성심으로 백성을 이끌어주지 않으면 아랫사람이 어떻게 부지런히 근본인 농사 (551)를 힘써 생활의 낙을 누릴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인정이 하루에 두 번 먹지 아니하면 배가 고픈 것이요, 일년 내내 옷을 지어 입지 않으면 추운 것은 떳떳한 이치이다. 만약 배가 고픈데 먹지 아니하고 살이 추운데 옷을 입지 못한다면 비록 사랑하는 어미라도 그 자식을 능히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임금인들 어떻게 그 백성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또한 농사에 삼품(三品)이 있으니 천시(天時)를 살피고 지의(地宜)를 살필 것과 이익을 거두고 재앙을 면하는 것을 들춰 말하고, 끝으로 농사는 부지런한 것으로 근본을 삼고, 하늘의 보는 것이 바로 백성의 보는 바요, 하늘의 듣는 것이 바로 백성의 들은 바라 하였고,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분경(奔競)을 억제하며, 포저(包苴)(뇌물(賂物))를 금하는 등의 논설(論說)을 장황하게 말하였는데 시폐(時弊)를 정확히 맞춰 근절(根絶)하도록 말하였으니, 공은 가히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실용에 이른 학문을 갖춘 분이라 이르겠다. 이 같은 학문이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절의(節義)를 세운 것이니 백세의 후에 누군들 산두(山斗)와 같이 우러러 보지 않겠는가? 다만 한이 되는 것은 증직(贈職)이 만족치 못하고 시호(諡號)를 받지 못한 것이 사림(士林)의 한결같은 답답한 심정인 것이다. 명사(銘辭)에 이르노니,   
 문성(文城)의 류씨(柳氏) 가문에 명공(名公)이 어찌 그리 많았던가?  
 정승(政丞)과 판서(判書)가 서로 이어 월파옹(月坡翁)에 이르렀도다.   
 전대(前代)의 훌륭한 유업(遺業)을 이어 학문을 독실히 닦더니, 
  
 일찍이 소과(小科)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효행으로 천거되었도다. 
  
 조정(朝廷)에 나아가 상소(上疏)를 하되 적합하지 않은 말이 없었고, 
  
 조중봉(趙重峯)의 상소가 헛되이 돌아가니 팔뚝을 치며 탄식했도다. 
  
 임진란(壬辰亂)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동장군(鎭東將軍)이라 이름하고, 
  
 각 고을에 격문(檄文)을 날리니 장사(壯士)가 바람처럼 따랐도다. 
  
 이에 태헌(苔軒)(고경명(高敬命))을 추대하여 대장(大將)을 삼고, 
  
 대오(隊伍)를 갖추어 곧바로 의주(義州)로 향하였도다. 
  
 왜적(倭賊)이 금산(錦山)을 핍박하여 형세가 위급하므로, 
  
 중봉(重峯)과 함께 군사를 합하여 왜적(倭賊)을 치기로 약속하였도다. (552) 
  
 왜적(倭賊)은 강하고 아군(我軍)은 약하여 일군(一軍)이 궤멸(潰滅)됨에 이르러, 
  
 주장(主將)을 가리고 싸우다가 마침내 절의(節義)에 죽었도다.   
 일월(日月)이 위에 있어 천고(千古)에 함께 밝을 것인바, 
  
 포상(褒賞)과 증직(贈職)이 있었으나 시호(諡號) 받지 못함이 한스럽도다. 
 
 아아! 우리 공이시여! 어찌 이에 그치셨는가? 
  
 학문의 조예가 깊고 그 재주는 문무를 겸하였도다. 
  
 그 재질(才質)을 펴지 못했으니 가히 슬프고 애달프지만, 
  
 다행히 남긴 글이 있어 후학들을 경계하였도다. 
  
 문집(文集)을 간행하고 비석(碑石)을 세움이 지속(遲速)의 시기가 있거니, 
 
 비석은 닳을지언정 훌륭한 명망(名望)은 지워지지 않으리라.

병인팔월팔일

황주邉시연찬

 

月坡柳公彭老墓碣銘

 

月坡先生柳公彭老殉節之三百九十五年丙寅武珍伯全錫洪捐道費印遺集後孫鍾龍與公族裔漢相訪余梅莊曰吾家數代單孑勢且窮姑無貞珉之計然此集不可闕立言之文而今者刊稿之役子實始之則吾何以他求余雖不敢辭亦無義乃依晴沙高公用厚行狀又考實錄與重峯霽峯諸集謹叙之曰公字君壽月坡其號柳氏貫文化以高麗大丞車達爲鼻祖文簡公公權文正公璥貞愼公陞章敬公墩皆顯麗史入鮮朝諱曼殊左相諱洙靖難佐理功臣議政府左參贊文城君贈領議政諡安襄命不祧卽公高祖曾祖季孫瑞興府使祖㘽牧使考景顔號合江忠州判官妣南原尹氏奉事溥女陽川許氏參奉垕女尹淑人以 明宗甲寅二月二十四日生公於玉果合江里第公襁褓失乳依養於祖母才性出人六歲大人公誦尹文孝公詩曰汝可次吟否卽應聲對曰前有合江水後有玉出山願借江山壽但欲悅親顔受學於呉復齋遂性刻苦不懈卄六中司馬三十五登文科分隷承文院副正字大人公沉病委席乞養還鄕侍湯以誠及丁憂結廬墓側朝夕就哭不以雨雪或廢衰絰戚哀三年如一日服闋以孝啓聞除博士公詣闕謝恩連上三䟽其論養士則本之以三代之制而得人爲主論灾異則以盡誠修德爲救弊之道以至納諫考績理財養兵服遠禦邊無言不到最以島夷爲急憂而上不從重峯之請斬倭使則自不勝扼腕太息痛哭之不足又以爲制勝之要莫過於良將良將又不如賢君今仗倚天之劒控烏號之弓其將也趙括則其能禦白起乎以太公爲上將穰苴爲中軍孫臏吳起爲左右將其君也紂則可能當武王乎收天下之長技以爲兵不如其將之有能合萬古之英雄以爲將不如其君之有道也月沙見䟽歎公有先見之明公移成均館學諭倭寇至上令百官各出馬以助軍興公馬爲徵彷徨無計以安襄公現夢得神馬到淳昌五百浮浪輩屯聚爲附賊計公以義曉諭衆皆服從乃建大青旗書全羅道義兵鎭東將軍柳某行軍入城郡守任百英開門出迎犒饋軍兵直抵玉果與縣監安鵠出陣于縣南前坪整部伍分二隊各領一枝遂檄文道內再檄嶺南三檄于京畿忠清黃海平安四道畧曰伏願僉尊陣雲合而影從旗風動而響應或投筆或釋耒而起且出車且運糧而來父勸子兄勸弟而以張武威士爲將民爲兵而益振銳氣雖云馬援當老而可用無以尹鐸爲少而必歸則歃血而同盟合符而定議作事謀 (544) 始者卽我立節成終者其誰云云歷抵和順光州昌平長城南原募兵爲千餘與書霽峯約會于潭陽列邑義陣續續來到衆至六千乃推霽峯爲大將公與梁清溪大樸爲左右副將安清溪瑛霽峯子鶴峯因厚爲前後將李琴溪大胤崔未能尙重楊漁隱士衡爲糧餉有司諸軍士以公之不居將位造語諠譁公按釼撃壇曰大事已定有何異議一軍慴伏無敢復言乃設操鍊威勢堂堂是夜與霽峯觀天象霽峯曰 熒惑入箕斗戌方赤氣薄熒惑熒惑芒死今此兵火實天運而賊必運窮於戌年然豈有六七年相持之事公曰賊有先勝後敗之理我有先敗後勝之理彼必運盡於戊戌聞大駕自平壤向義州整旅爲勤王計進軍次礪山賊犯錦山郡守敗死卽通重峯約以合師討賊乃抵錦之卧坪與防禦使郭嶸爲左右翼攻賊于土城賊勢大挫日暮而退是夜恐有他警對壘野宿賊果欲侵發覺遁走翌日挑戰賊不利而退鳴皷督戰乘勝長驅官軍攻北門公攻西門賊知官軍陣脆悉衆以出官軍大潰公部下互相急叫曰官軍潰矣從而奔潰霽峯墜馬馬逸安公以所乘馬與之徒歩以從公獨馬健先出問曰大將安在奴曰大將已脫矣事急盍去公數歩知大將在後欲旋馬徃從奴控馬泣請公不聼奴又强之公拔釼欲斬奴乃止霽峯見公曰吾必不免君可馳出公曰豈忍棄大將求活遂與安公翼蔽霽峯竟死於賊卽壬辰七月十日也公馬亦多被槍流血遍身飛鳴一超傍無御者遂尋公首以口啣之卽走玉果本第夫人金氏自公出師之後築壇家後日夜稅忽聞馬聲出門顚倒幾至危境爲傍人所救勵精視之馬已自斃一元在地遂奉入于室具衣衾收殮成殯後葬於南原帶江靣生巖里直洞子坐事聞贈司諫王世子遣官致祭後加贈左承㫖配享于光州褒忠錦山從容玉果詠歸諸祠又主享於玉果道山壇玉山祠配金氏原州人琛女夙有閨則公襄禮畢拔佣刀自剄流血淋漓賴傍人救絶而復甦越一年竟哀毀致死并公命旌閭墓合窆系子萏進士順陵參奉孫時發縣監時和司果婿尹生員南原人李必馨全州人時發無育以時和長子思龍爲后次繼龍以下不錄嗚呼公以孝行登道啓然世之善事親者亦多其人惟其事於王事爲卓忠大節而蹈白刄履湯火視如平地者非得於學力至大至剛之氣牢着於胷中烏能然乎觀其說儒家則以爲維持人極植立造化儒道之天地也昭彰名敎顯設政治儒道之日月也儒道行而當世顯然被其澤儒道明而萬世隱然沐其休所謂先聖後聖其揆一也豈可以窮達論吾儒哉因擧 (545) 歷代治亂盛衰而終之以儒用爲治不用爲亂說兵家則以爲有國必有兵有兵必有將將得其人然後兵可以統矣兵可統然後國可以安矣何者兵之有法其策無窮其妙莫測或奇或正有不一之機或攻或守有不一之勢呼吸之間雷風奔走指顧之際天日改觀非善於用兵者不足以語也因擧黃帝五陣太公三陣六鞱三畧孫吳兵法而終之以爲人君者精心講武側席求賢則長嘯却賊圍碁破陣皆吾書生之事說農家則以爲國以民爲本民以食爲命農者衣食之原而王政之所當先也上之人不有以誠心迪率則下之人安能勤力務本以遂生生之樂哉况且人情一日不再食則飢終歲不製衣則寒者理之常也若腹飢不得食膚寒不得衣則雖慈母不能保其子君安能有其民哉因擧農有三品用天因地收利免灾而終之以勤農務本天視自我民視天聼自我民聼以至排異端抑奔竸禁包苴等說張皇縷縷切中時弊公可謂才兼文武經世致用之學矣有如是之學故有如是之樹節也百世之下孰不仰如山斗也只恨贈未滿名未易爲士林之所齎欎也銘曰 文城家世何多名公公孤相承逮至坡翁肧胎前烈勵趾學早折蓮桂孝行薦擢立朝陳䟽無言不及趙䟽歸虛扼腕太息壬辰擧義號曰鎭東飛檄省邑壯士從風乃推苔軒登壇爲將整旅移陣直向灣上賊薄錦山勢將危急與約重峯合師討賊賊强我弱一軍潰裂捍蔽主將竟死於節日月在上千古并明褒贈雖加恨未易名嗚呼我公豈止此哉學深造詣文武其才未展厥施縱云嗟惜幸有遺編垂戒後學刊集竪碣時有遲速維石可磨令名不泐

丙寅八月八日

黃州邉時淵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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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월파류공팽로묘갈명 (月坡柳公彭老墓碣銘) 207     편집인 2012/11/26  [1116]  
198  월파공(팽로)사적 (月坡公(彭老)事蹟) 206     편집인 2012/11/26  [962]  
197  양의정시녕부원군문정공(전)시장 (領議政始寧府院君文貞公(㙉)諡狀) 205     편집인 2012/11/26  [1227]  
196  함경병마절도사류공(경선)묘갈명 (咸鏡兵馬節度使柳公(敬先)墓碣銘) 204     편집인 2012/11/26  [956]  
195  풍기공(경장)묘지명 (豐基公(敬長)墓誌銘) 203     편집인 2012/11/26  [1035]  
194  승문박사공(경인)묘갈명 (承文博士公(敬仁)墓碣銘) 202     편집인 2012/11/26  [1037]  
193  송호공(정)일문사의사적 (松壕公(汀)一門四義事蹟) 201     편집인 2012/11/26  [1047]  
192  자헌대부공조판서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령의정류공 200     편집인 2012/11/26  [1154]  
191  승지공(혼)약사 (承旨公(渾)略事) 199     편집인 2012/11/26  [899]  
190  계휴정공 (위) 약사 (繼休亭公(湋)略事) 198     편집인 2012/11/26  [924]  
189  평안병사공(비)신도비명 (平安兵使公(斐)神道碑銘) 197     편집인 2012/11/26  [1101]  
188  증판서공(몽필)묘표 (贈判書公(夢弼)墓表) 196     편집인 2012/11/26  [840]  
187  증참의공(몽주)묘갈명 (贈參議公(夢周)墓碣銘) 195     편집인 2012/11/26  [1064]  
186  학암공(몽정)묘갈명 (鶴巖公(夢鼎)墓碣銘) 194     편집인 2012/11/26  [1199]  
185  남재공(몽삼)묘갈명 (南齋公(夢參)墓碣銘) 193     편집인 2012/11/26  [933]  
184  청계공(몽정)신도비명 (淸溪公(夢井)神道碑銘) 192     편집인 2012/11/26  [1148]  
183  증판서공(몽익)신도비명 (贈判書公(夢翼)神道碑銘) 191     편집인 2012/11/26  [1030]  
182  추담류선생자방유적비문 (楸潭柳先生子房遺蹟碑文) 190     편집인 2012/11/26  [1026]  
181  추담공(자방)묘표 (楸潭公(子房)墓表) 189     편집인 2012/11/26  [1043]  
180  사헌부장령관재공(정수)묘갈명 (司憲府掌令觀齋公(廷秀)墓碣銘) 188     편집인 2012/11/2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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