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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진산(柳珍山)

류진산(柳珍山)

정치가. 본관은 문화(文化). 본명은 영필(永弼), 필명은 진산(珍山). ).  호는 옥계(玉溪)이다. 1905년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1974년. 경덕(敬德)의 외아들로 어머니는 김경하(金敬夏)이고, 부인은 김현신(金賢信)이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때 교내 항일벽보사건으로 자퇴하고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옮겨 1923년에 졸업하였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제1고등학원에서 영어를 수학한 뒤 정경학부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 때 독서회사건(讀書會事件)으로 이치타니형무소(市谷刑務所)에 투옥되었다.서울특별시 구로구 지역에서 활동한 정치인.

1974년 결장암(結腸癌)으로 사망하였다.

진산은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만세 벽보사건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자퇴했고, 이후 보성중학교로 편입하여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다가 중퇴했다. 1942년 만주로 건너가 충칭[重慶]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1945년 8·15해방이 되자 정계에 투신하여 주로 청년 조직의 결성과 청년운동의 활성화에 전력했다. 1946년 4월 9일 좌익 청년 단체 조선민주청년동맹에 대항한 우익 청년 단체 대한민주청년동맹을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했다. 김두한이 감찰부장으로 있던 이 단체는 미군정에 의해 폭력 단체로 해산 명령을 받자, 1947년 청년조선총동맹이라는 조직으로 개명하여 계속 반공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이승만의 청년 단체 통합 지시로 1948년 12월 통합된 대한청년단에서 최고지도위원으로 활동했다. 1951년 민주국민당 총무부장을 지내고,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 고향인 금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으며, 1956년 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을 지냈다.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재선되었고, 11월 원내총무가 되었다. 1960년 제5대 민의원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 민주당이 신·구파로 분열하자 신익희·조병옥 등이 이끄는 구파 동지회에 가입했다. 1961년 2월 민주당 구파가 신민당을 창당하자 동당의 간사를 맡았다.

1963년 신민당 중앙상무위원을 지내다가, 김병로윤보선 등이 주축이 되어 민정당을 결성하자 민정당의 중앙상무위원 겸 기획위원회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민정당 전국구 후보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마닐라에서 개최된 아시아 민족반공대회에 한국측 수석대표로 참가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영등포 갑구, 신민당]되었고, 아울러 신민당 수석부총재를 지냈다. 1970년 신민당 총재가 되었다가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입후보 공천 문제로 총재직을 일시 사퇴했으나, 1973년 5월 다시 총재직에 복귀했다. 1971년과 1973년 제8, 제9대 국회의원에 계속 당선되어 6선 의원이 되었다.

진산은 1967년 6월 8일 실시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민당 소속으로 영등포 갑선거구[지금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신도림동 중 구(舊) 경인가로 이동(印) 지역과 금천구 독산, 시흥동 지역, 신길, 신대방, 대방, 상도, 노량진, 노량진본, 흑석, 동작, 양재, 원지, 우면, 사당, 방배, 서초, 반포, 잠원, 신림, 봉천동 지역]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1년 6월 30일 임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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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기록

유진산 [ 柳珍山 ]
 

3·4·5·6·7·8·9대 국회의원, 신민당 총재

 

1905∼1974. 정치가.

개설

본관은 문화(文化). 본명은 영필(永弼), 필명은 진산(珍山). 호는 옥계(玉溪). 충청남도 금산 출신. 경덕(敬德)의 외아들로 어머니는 김경하(金敬夏)이고, 부인은 김현신(金賢信)이다. 와세대대학 재학 당시 독서회사건으로 투옥되었고, 광복 후 청년운동을 시작으로 정계에 투신, 1954년 이래 3·4·5·6·7·8·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야당 중진 의원으로 활약했다. 1970년 신민당 총재를 역임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때 교내 항일벽보사건으로 자퇴하고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옮겨 1923년에 졸업하였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제1고등학원에서 영어를 수학한 뒤 정경학부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 때 독서회사건(讀書會事件)으로 이치타니형무소(市谷刑務所)에 투옥되었다. 1932년에 귀국하여 쌍엽농민회(雙葉農民會)를 만들어 농민운동을 펴다가 일본경찰의 감시대상이 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에서 한인회(韓人會)를 조직하고, 충칭(重慶)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34년 일본 관헌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5년에서 광복까지 『농민독본 農民讀本』의 편집을 하면서 필명을 진산(眞山:나중에 珍山으로 고침.)이라 하고, 전진한(錢鎭漢)·김산(金山) 등과 농민운동을 폈으며, 이 무렵부터 조병옥(趙炳玉)·백관수(白寬洙)·장택상(張澤相) 등과 교유하였다.

광복을 맞아 우익청년단체 흥국사(興國社)를 조직하여 좌익의 최대단체였던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朝鮮建國促進靑年同盟, 建靑)을 해체시키고,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의 주동세력이 중심이 된 인민대표자대회를 유회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며, 김일성(金日成)·강양욱(康良煜)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청년단원들을 평양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한혁신청년회를 결성하여 임시정부요인과 건국 추진에 노력하였으며, 1946년 대한민주청년총동맹을 창설하여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1947년 7월에는 대한민주청년총동맹의 후신으로 청년조선총동맹(靑年朝鮮總同盟)의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다.

미군정하에서 두 차례나 투옥되었으며, 제헌의원 총선에서는 낙선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정권의 독재화에 항쟁하여 1952년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조병옥 등과 호헌구국선언대회를 주도하다가 계엄군에 체포되어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54년 무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의원에 당선, 그 해 4사5입개헌 때에는 신익희(申翼熙)·조병옥 등과 호헌동지회를 발족시켰다. 1955년 신당발기추진8인위원회 위원, 1956년 민주당대통령후보 신익희 선거참모를 거쳐 1958년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어 민주당원내총무가 되었다.

1960년 불온문서·원면부정(原綿不正) 사건의 국회조사위원장, 조병옥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참모를 지내며 제5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4·19혁명 후 출범한 장면(張勉)정권에 도전, 민주당의 신구파를 보수양당으로 분당시켜 1961년 2월 김도연(金度演)과 구파 중심의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였다. 간사장이 되어 그 해 3월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이 초청한 청와대시국수습4자회담에 참석하였다. 5·16군사정변 때에는 55일간 마포형무소에 구금되었고, 1962년 박정희(朴正熙)의 3·22군정연장성명에 반대하는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주도하였다.

민정이양이 된 1963년 5월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하여 김병로(金炳魯)를 당대표로 추대하였고, 그 해 11월 전국구로 제6대 국회에 진출하였다. 1964년 언론윤리법안통과를 둘러싼 세칭 ‘사쿠라논쟁’으로 윤보선과 격돌하였다가 민정당의원 총회에서 제명되었으며, 1965년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1966년 민중당 부총재가 되었고, 1967년 야당통합을 이룬 신민당 부총재가 되었으며, 그 해 서울 영등포에서 제7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70년 신민당 총재에 당선, 야당가의 총수가 되어 그 해 8월 박정희와 단독회담을 가졌다. 1971년 총선에서 영등포지역구를 포기하고, 자신이 전국구 1번을 결정한 이른바 ‘진산파동(珍山波動)’ 때문에 총재직을 사임하였다가 다시 당권에 도전하여 1972년 총재에 재선되었으나, 불법전당대회에서의 당선이라는 이유로 법원에 피소되어 당수권한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1973년 전당대회에서 다시 당수로 당선되어 같은 해 제2차 박정희·유진산회담을 가졌다. 1974년 유신헌법개헌투쟁을 선언하고 나섰으나 결장암으로 죽었다. 신민당장으로 충청남도 금산군 향리에 묻혔다.

평 가

유진산은 권모술수에 능하다고 해서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평가를 얻었고, 정적(政敵)과의 타협에 철저하며,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합리주의자라고 해서 ‘사쿠라’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정치란 칼로 두부를 자르듯 일도양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토론하고 타협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라는 소신을 피력한 바와 같이 민주정치의 기본을 대화와 타협에 두었던 정치인이었다.

저서

회고록으로 『해뜨는 지평선』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74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유진산

유진산

子弟는 柳漢烈의원으로

1974년 5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자료.수정

참고문헌

저서로 『농민독본』『옥계유진산(玉溪柳珍山)』(유진산회고록간행회, 1984)
『해뜨는 지평선』(유진산, 한얼문고, 1972)「나의 정계실록(政界實錄)」(유진산, 『新東亞』118호, 1974)이 있다.


대한민국헌정회(http://www.rokps.or.kr)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08,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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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및 수정 류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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