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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경생(柳京生)



판윤공(류경생) 연보


判尹公 柳京生 先祖 漢城府 判尹 柳公 諱 京生 

선조께서는 大丞公 15代孫으로 선고이신 忠景公(文城府院君) 諱 亮과 延安李氏(工曹判書 元發의 女)의 三男으로 朝鮮 太祖 등극 初期에 出生하셨다. 公께서는 孝心이 극진하여 벼슬에는 큰 뜻을 두지 않고 父親을 대신하여 祖母 綾城具氏를 극진히 奉養하여 父親이 政事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집안 살림에 充實하시던 中 太宗15年 乙未 1415年3月에 祖母께서 돌아가시고 이어 伯兄 佐가 돌아가시자 父親께서 애통해 하시다가 신병이 재발되어 太宗 16年 1416年4月2日에 享年 62歲로 棄世하시자 公은 3年간의 侍墓 살이를 하셨다. 公께서 복제를 마친 후에도 父母잃은 罪人이 출사할 수 없다하며 벼슬을 사양하시다 尙瑞司兼主簿에 임명되어 역임하시던 중 世宗6年 甲辰 1424年 11月10日에 사신의 조서를 펴본 조정으로부터 柳京生, 尹嶙, 元志於에게 징계를 내렸다고 朝鮮王朝實錄에 記錄되어 있다. 그 內容은 당초에 明나라 사신이 조서를 도로 가지고 갈 때 펴보고서 구김살이 나고 먹 점이 있는 것을 책망함에 따라, 王이 담당관리를 조사토록 하여 징계를 받게 되었는데 尙瑞司兼主簿인 柳京生, 尙瑞司兼少尹인 尹嶙과 兼錄事 元志於에게 조서를 더럽힌 율을 적용하여 柳京生, 元志於는 杖 90 徒 2년 반 尹嶙은 杖 80 徒 2年에 처하였는데 감등하여 尹嶙은 杖 80 元志於는 杖 90을 贖(속)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柳京生은 開國原從功臣 및 佐命功臣이신 柳亮의 子이므로 尙瑞司兼主簿 職만 파직하고 杖과 徒의 刑은 면했다고 記錄되어있다. 그 후 世宗10年 戊寅 1428年에 王께서 孝心과 능력을 인정하여 功臣都鑑승에 특배되어 洪州牧使로 제수되셨으나 貞敬夫人 延安李氏인 어머니 모시는 것을 이유로 고사하시다가 조정의 영을 어길 수 없어 부임하게 되었는데 부임한 후에는 惠政을 베풀고 淸廉潔白하게 공무를 수행하였으며 수행 중에도 老母에 대한 孝心이 극진하셨다. 이 무렵 忠淸道監司 權克和는 洪州牧使을 빈전에 보내어 香을 올리도록 하였다. 라고 朝鮮王朝實錄에 記錄되어 있다. 이어서 世宗18年 淮陽府使에 임명되었는데 朝鮮王朝實錄 世宗18年 丙辰 1436年12月17日 기사에 의하면 王이 淮陽府使 柳京生과 知林川郡事 禹敬夫 두 사람을 불러 지금 忠淸道는 凶年이 극심하여 각 고을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푸성귀도 없어 浮腫이 나고 굶주리는 백성이 많다고 하니 정성을 다하여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이 없도록 하라는 御命을 내렸다. 公께서는 御命을 받들어 정성을 다한 결과 고을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公의 이러한 淸廉潔白하고 성실함이 인정되어 내직으로 승진하게 되어 정2품인 資憲大夫 漢城判尹을 배수하셨는데 그 記錄이 敬齋集 5권 領議政 河演 神道碑文과 姜希孟의 私淑齋集 7권외 漢城府에서 地方官衙에 보낸 公文書인 公의 禁養 完文에 記錄되어 있다. 公께서는 漢城判尹 재임 중 많은 功績을 남겨 王의 신망을 받았으나 丈人 河演이 世宗27年 甲子 1444年에 右議政으로 임명되자 丈人에게 政治的 부담을 줄 수 없다고 하시며 漢城判尹 職을 사직하시자 議政府에서 만류하였지만 기어코 물러나시고 말았다. 公의 이러한 훌륭한 정신은 그 시대 관리들에게 많은 敎訓이 되었다고 한다. 公의 丈人 河演은 左議政을 거쳐 世宗31年 己巳 1449年에 領議政이 되셨다. 이밖에 公께서는 護軍도 역임하셨는데 그 기록이 敬齋先生 文集5권 부록3과  領議政 河演의 神道碑文에 記錄이 있다. 公의 直系 18代孫 瑢鎭이 모든 사적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던 중 2009年6月 末 古貴文獻 國王文書인 世祖2年 1456年 功臣會盟錄(폭 50cm에 길이 5m) 名單에 佐命功臣의 子 漢城 尹 柳京生과 手決한 文書를 發掘하여 影印本을 確保하게 되어 公의 당시의 行蹟을 더욱 明瞭하게 하는 契機가 되었다. 公의 墓所는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팔현리 山 31번지에 公의 丈人 領議政 河演의 선고이신 戶曹判書 河相國 自宗公의 妻祖父 墓下 우록에 안장되어 있으며 세향일은 음10月8日이다. 公의 墓所 주변은 오랜 세월 정화를 하지 않아 잡목과 잡풀도 많고 봉분 둘레석이 없고 상석도 적어 2009年 己丑 4月24日(음 3月29日)부터 3일간 정화하였는데 상석은 5자로 교체하고 둘레석은 17간에 3단으로 하였으며 12지를 넣고 前面 中央에 柳字를 넣어 설치하였고 墓所 주변을 깨끗이 정화하였으며, 제석의가 고루 갖추어져 있다. 배위는 貞夫人으로 晋州 河氏이며 領議政을 지낸 河演의 따님으로 墓所는 실전되었으나 시제는 夫君과 合祀이다. 判尹公께서는 晋州 河氏와의 사이에 5男 3女를 두셨는데 松禾公 諱 纘(찬)은 公의 長子로 通訓大夫 松禾縣監을 역임하셨고 배위는 숙인으로 음성 朴氏이며 첨지를 지낸 昭의 따님이시고, 슬하에는 護軍 胤과 司直 復이 있다. 墓所는 포천군 가산면 금현리 산 138번지이며 族 後孫 文學博士 弘烈 撰 묘표 하였으며 제석의가 고루 갖추어 있다. 淮陽公 諱 혜(糸+惠)는 公의 次子로 號는 송제요 世宗8年 丙午 1426年에 出生하여 生進試에 합격하고 通訓大夫로서 淮陽府使를 역임하시고 관직에서 물러나 청주 땅에 居하시다 成宗20年 己酉 1489年3月에 63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배위는 숙인으로 全州 李氏 영선의 따님인데 이영선은 양영대군의 고조가 된다. 墓所는 忠淸北道 청주시 흥덕구 신전동 산 7-1번지에 자좌이며 夫君과 함께 合祔이다. 묘전에는 조위천으로 壬寅 1962年에 세운 碑가 서있다. 甲戌 1994年3月 墓域 정화하여 제석의가 고루 갖추어져 있다. 슬하에 5男 3女를 두었으니 長子 맹손(孟孫)은 世宗11년 己酉 1429년에 弘文館 정자를 지내셨고 次子 흥손(興孫)은 종모서령을 지내셨고 三子 문손(文孫)은 忠義衛와 左承旨를 지내셨다. 넷째는 천손(千孫)이며 忠義衛를 역임하셨다. 다섯째는 계손(繼孫)으로 縣監을 지내셨다. 盤谷公 諱 績(적)은 公의 三男으로 景泰 년간에 出生하셨다, 號는 盤谷이며 成宗23年 壬子 1492年에 生員試에 합격 그 후 文科에  후 학문 높은 선비들과 교류하였다. 成均館에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하였으며 通訓大夫 振威 縣令(경기도 평택시 振威)으로 부임하여 정령을 엄정히 하고 명백히 하여 선정을 베푸니 官民 모두 자기 직분에 충실하였으며 진위 백성들은 살기 좋은 고을이 되었다고 기뻐하였으며 백성들이 宰相의 親孫으로서 어진 수령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던 士大夫요 學者이셨다. 燕山君4年 1498年 戊午士禍 때 동문수학한 宗親 刑曹參判 柳洵이 파직되고 많은 士大夫와 선비들이 禍를 당하거나 귀향 가는 것을 보고 장차 더 큰 禍가 일어날 것을 예측하시고 벼슬을 버리고 경남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석반동으로 落鄕하셨다. 落鄕 時 진위 백성들이 親父母를 보내는 것과 같이 슬퍼하였다고 한다. 석반동에 넷째 順孫을 데리고 터를 잡아 살면서 집 좌측에 盤松을 심고 우측 높은 바위에 앉아 盤谷이라 自號하고 조용히 餘生을 즐기며 학문에 열중하던 중 燕山君의 暴政이 날로 심하여 中宗反正 후 議政府 領議政 柳洵이 績의 높은 학문과 능력을 인정하여 수차 조정으로 불렀으나 끝까지 고사하셔서 領議政 柳洵을 위시한 反正功臣들이 큰 人才를 잃은 것을 아까워했다. 배위는 숙인으로 서원 李氏이며 牧使를 지낸 李佶의 따님이며 妻祖父가 그 유명한 議政府 左議政을 지낸 李居이다. 墓所는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석반동 반계사 뒤 先山에 계용 간좌로 夫君과 같이 合祔이다. 묘전에는 墓碣이 세워져 있으며 제석의가 고루 구비되어 있다. 每年 公을 기리는 춘행을 음3月14日 반계사에서 관할 유림에서 公의 後孫들과 같이 행하고 있다. 슬하에는 5男 2女를 두었으니 長男 孝孫(효손)은 司直을 지냈으며 경남 합천에 後孫들이 살고 있으며 次子 효남(孝男) 역시 司直을 지냈으며 전라도 익산에 後孫들이 살고 있다. 三男 효제(孝悌)는 부사정을 지냈으며 无后 되었다. 넷째 順孫(순손)은 護軍을 지냈으며 다섯째 正孫(정손)은 進士에 합격하여 감찰과 司直을 역임하셨으며 거창 땅에 들어간 향조가 되시며 後孫들이 거창에 살고 있다. 盤谷公이 故鄕을 그리워하며 심은 盤松은 청룡 황룡이 서로 감아있는 십자형상으로 동쪽 줄기는 長男 효손과 5男 正孫이 있는 합천 거창 쪽으로 서쪽 줄기는 次子 孝男이 있는 전북 함열 쪽으로 남쪽 줄기는 동생 緝, 縝이 있는 전남 곡성 쪽으로 북쪽 줄기는 故鄕인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盤谷公이 심은 盤松은 한국 최고의 名物이었으나 日帝 때 日本人이 욕심을 내어 日本王室 庭園樹로 이식을 추진하다 실패한 후 2차 大戰 때 송진 채취를 많이 하여 상처를 입고 수령이 다되어 현재 밑둥치(사진.1)만 남아있다. 盤谷公이 앉아 餘生을 보낸 큰 바위에 頂上 틈 사이에 盤松의 씨가 날아 들어가 제2의 盤松(사진.2)이 現在 자라고 있다. 이 盤松은 公이 심었던 盤松과 똑 같아 많은 사람들이 文化財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公이 입향 시 盤松 밑에 판 샘물은 지금도 깨끗한 물의 수량이 장마 때나 가뭄 때나 변함이 없으며 지금도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고 있으며 샘물로 盤松 앞에서 기도하면 科擧에 급제한다하여 서부 경남일대 유림의 선비들이 많이 찾았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盤谷公의 祠堂 앞에는 宣祖30年 1597年 丁酉再亂 時 公의 5代孫 柳橿(류강)이 황석산성에서 목숨을 받쳐 나라와 부(세홍)를 지킨 孝行碑가 있다. 盤谷公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반복되는 士禍를 보시고 後孫들에게 높은 벼슬에 나가지 못하도록 遺言을 하셨다. 위 기록은 함양군지 안의현지에 記錄되어있다. 司正公 諱 緝(집)은 公의 4男으로 어모장군 忠佐衛 자부 부사정을 역임하셨는데 燕山君4年 戊午 1498年에 李克墩, 柳子光 등이 김일손 수사록 중 조의 제물을 무고하여 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때 緝은 실제인 진(縝)과 더불어 祖父 忠景公의 會盟錄을 갖고 곡성군 원예산면 대리로 숨어들어 안락하게 지내다가 燕山君8年 壬戌 1502年4月23日에 卒하니 墓所는 곡성군 오곡면 원우곡(축동) 임자에 모셨다. 묘전에는 墓碣과 제석의가 고루 구비되어 있다. 司正公 緝께서 심은 은행나무는 현재까지 잘 자라고 있으며 後孫들은 1960年 봄에 기적비를 세워서 司正公의 뜻을 기리고 있다. 배위는 숙인으로 慶州 金氏이며 봉상사정을 지낸 智老의 따님이다. 墓所는 부군 墓의 서록해자에 모셔 있는데 碑가 세워져있다. 슬하에 4男 1女를 두었으며 長子는 善孫(선손)으로 无后이고 次子는 賢孫(현손)으로 어모장군 수의부위 사정을 지내셨고, 三子는 連孫(연손)으로 어모장군 사정을 4男은 承孫(승손)으로 선약장군으로 忠佐衛 부사용을 지내셨다. 司直公 諱 縝(진)은 判尹公의 다섯째 아들로 어모장군 司直과 상장을 지내셨고 중형인 諱 緝과 같이 燕山君 때 戊午士禍를 피해 祖父 忠景公 會盟錄을 갖고 곡성군 원예삼면 대리로 숨어 드르셨다. 墓所는 곡성군 오곡면 원우곡(축동) 갈마 을좌이다 배위는 숙인으로 延安李氏이며 墓所는 부군의 조하을 좌인데 墓碣이 세워져있다. 슬하에 2男 2女를 두었으니 長子는 欽孫(흠손)으로 어모장군 司直을 지내셨고 次子는 終孫(종손)으로 忠義衛를 지내셨다. 判尹公께서는 3女를 두셨는데 큰사위는 이등(李邆)으로 상장을 지내셨고 둘째 사위는 이인견(李仁堅)으로 한산인이며 문전한을 지내셨다. 셋째 사위는 鄭智孫(정지손)으로 초계인이다. 외손자에 대해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陰崖先生集 본집 4권 합2책에 李耘(이운)에 대한 기록밖에 없다. 李耘은 1469年 (睿宗1年 -1535 中宗30) 朝鮮 前期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중야이며, 燕山君1年 乙卯 1495年 증광 사마시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한 후 燕山君7年 辛酉 1501年 式年 文科 丙科에 13등으로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사에 보임되었다가 藝文館 검열겸 춘추관 기사관이 되었다. 그 뒤 내직으로 승문원 주서 군자감 주부 봉상사 주부 성균관 전적 이조좌랑 장예원사의 승문원 교리와 교감 공조정랑, 예조정랑 종부사 정정 광흥창수 예빈사 부정 내정사정 사복사정 공조 참의 등 공직을 두루 거쳤으며 외직으로는 경기도 도사 강릉대도호부사 제주목사 晋州牧使 선산부사 남양부사 영양부사 그리고 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中宗30年 1535年5月13日 67歲의 나이로 別世하셨다. 判尹公의 선고는 諱 량(亮)으로서 高麗 禑王 때 문과에 급제 전의부령을 지내시고 그 후 판종금사사가 되었다 禑王14年 1388年에 전라도 안염사 恭讓王2년 1390)에 刑曹判書 1392年 吏曹判書로 朝鮮이 開國되자 개원원종공신에 봉해지고 다음해 중추원 부사로서 강원관찰 출적사 겸임 1396年에 계림府尹이 되었고 正宗2年 1400年에 참지 3군부사로서 다음해 佐命功臣 4등으로 文城君에 진봉되셨다. 이어 황해도 도절제사 藝文館 大提學 1404年에 판사평부사겸 大司憲 형조판서 판한성 부사 병조, 이조판서 참찬의정부사겸 大司憲을 역임하셨고 1413年에 府院君에 진봉 1415年에 右議政에 이르렀다. 太宗16年 丙申 1416년4월2일에 卒하니 享年 62歲였다. 墓所는 남양주시 조안면 사우리 경산하 계좌로 영의정 하연 찬 지명비석과 제석의가 고루 갖추어졌다. 충경공의 사당은 경기도 문화재 78호로 지정되어있다. 배위는 두 분으로 전배는 정경부인으로 평양조씨이니 판도판서를 지낸 德裕의 따님으로 생 2남하다 墓所는 현재 실전되어 향제는 부군과 함께 하고 부조묘에 위패를 모시고 있다. 후배는 貞敬夫人으로 延安李氏이니 工曹判書를 지낸 元發의 따님으로 世宗 16年 甲寅 1434년正月9日에 卒하다. 墓所는 부좌 쌍분으로 예장되어있다. 또한 부조 묘에 위패가 모셔있다. 선고이신 忠景公은 슬하에 5男을 두셨으니 長子는 典祀令公 佐이며 次子는 漢城 小尹을 지낸 謹인데 无后이며 三子가 判尹公이고 넷째는 남部令公인 江生이며 5子는 종부 少尹을 지낸 漢生이다. 이네분의 後孫은 대단히 번창하여 文化柳氏 全 宗員의 약 4할을 차지하는 방대한 宗族이다. 判尹公 祖父는 繼祖이며 高麗 恭愍王 1374年9月15日 봉익대부密直副使 상장군과 議政府 領議政과 文化君에 봉작되었다. 배위는 혜순 보주로 綾城具氏이며 전리판서 면성군 영검의 따님이다. 1374年11月17日에 돌아가셨으며 墓所는 대덕산 복성동 선영이며 배위 묘소도 부군과 같이 선영하인 대덕산 복성동이다. 公의 曾祖父는 甫發로서 高麗 忠肅王5年 丙子 1336年에 소부少尹과 통예문 부사를 역임하였으며 忠肅王8年 己卯 1339년에 밀직代言이 되셨다. 배위는 원주 원씨 첨의를 지낸 선지의 따님이다. 1340年8月에 돌아가셨다. 墓所는 장단군 대덕산 복성동이다. 公의 高祖父는 仁琦이며 高麗 忠烈王9年 癸未 1283年에 出生하여 文科에 급제하고 대광삼사 文化君에 봉작된 분으로서 忠肅王11年 甲子 1324年에 大司憲을 역임하고 密直副使로도 지내셨다. ``愍王23年 甲寅 1374年에 돌아가셨으며, 諡號는 溫靖이다. 忠景公 後孫들은 忠景公 祠堂 100여M 지점에 判尹公의 祖父(繼祖) 曾祖父 (甫發) 高祖父(仁琦) 3代 祖孫을 기리는 마음에서 단을 모아 매년 음10月7日에 時享을 올리고 있다. 끝으로 判尹公께서는 內外 職에서 많은 惠政을 베풀어 가적과 의행이 口傳으로는 많이 전해지고는 있으나 文獻의 記錄이 있는 것은 위에서와 같이 尙瑞司兼主簿, 護軍, 僉節制使, 府使, 牧使, 漢城判尹만 記錄되어 있다. 公께서는 一身의 榮達을 추구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 獻身하셨으며 孝誠이 극진하신 士大夫이며 學者이셨다.
                     忠景公派 判尹公宗中 會長 柳瑢鎭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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