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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인복(柳寅復)


류인복 柳 寅 復

<류인복 : 字 致圭, 號 樵隱, 1885.6.22~1957.10.18, 漢學者, 林川鄕校 直員, 爲先人, 忠景公派 : 大丞公 31世>

노곡공(老谷公) 동수(東秀)의 11대손이요, 금파공(今坡公) 철로(徵魯)의 손자요, 긍파공(肯核公) 기원(基源)의 4남 2녀중 2남으로 부여군 세도면 청송리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강릉김씨(江陵金氏) 연옥(演玉)의 따님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수(潁秀)하여 학문이 일찍 성취되고 어버이를 섬김에 승순무위(承順無違)하였다. 장성함에 지제(持制)를 더욱 엄중히 하여 부모상에 삼복 더위에도 질대(絰帶)를 풀지 않고 매일 성묘하며 애곡(哀哭)하니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항상 형제간에 돈목하고 아들을 의리로써 가르치며 몸가짐을 공겸(恭謙)하고 안빈락도(安貧樂道)로 아조(雅燥)를 견지(堅持)하며 공맹(孔孟)의 도를 쫓아 영리를 탐방하지 않고, 왜정하에서도 끝내 굴하지 않고 보발(保髮)한채 향리 깊숙한 곳에 은거하여 학업에 정진하며 향리 자제를 교육하니 사우(士友)가 모두 추중(推重)하였다. 공의 학행이 가림교지(嘉林校誌)에 소상히 기록되었다.

또한 위선(爲先)에도 탄성(殫誠)하여 추암공파보(秋巖公派譜)(乙未譜 ․ 丁卯譜) 두차례 간행 당시 편수 ․ 교정을 담당하여 공로가 많았으며, 노곡공(老谷公)의 간곡 서원 구허(舊墟)에 헌신 노력하여 설단봉향(設壇奉享)하였다.

1939년 임천향교(林川鄕校) 직원(直員)을 역임하고, 그후 왕의 영당(旺義影堂) 장의(掌議), 문산(文山) 향현사(鄕賢祠) 장의, 동곡서원(東谷書院) 장의를 역임하고 1956년 연산 돈암서원(遷巖書院) 원장에 추대되었으나 병환으로 행하지 못하였다.

별세하시니 많은 원근 사우(士友)가 비통하며 문제(門弟)와 더불어 복 입은 분이 30여인에 이르렀다.

묘는 세도면 청송리 천상 손좌(巽坐)합폄이요, 비문은 광주 정환(光州 鄭鐶) 배위 비문은 전성 이종흔(全城 李鍾欣)이 짓고, 글씨는 족후생 응렬(應烈)이 졌다.

배위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좌의정 국광(國光)의 후손 재열(在說)의 따님이요, 슬하에 2남을 두니 명렬(明烈)과 중렬(中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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