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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광현(柳 光 顯 )
 

류 광 현 柳  光  顯

 

<류광현 : 1689~1760 ; 英祖朝 學行. 大丞公 25世 : 夏亭公派>

 

자 옥여(玉汝). 호 당암(棠巖).

증좌승지 의남(贈左承旨 義男)의 현손이요, 진사 수정(進士 壽鼎)의 2자로 숙종(肅宗) IS년 己巳 정월 29일 장성 기동(長城 基洞)에서 태어나 장성한후 종숙 수일(壽一) 후로 출계하였다.

품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총명함이 이를데 없었으며, 용모와 거동이 엄중하여 희로(喜怒) 를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한편 경학(經學)을 깊이 탐구하여 46년 庚子(1720)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일찌기 부친께서 안질(眼疾)로 고생하였는데 그때마다 공께서 혀로 빨아 치료하였다. 얼마후 눈이 심히 아파 능히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꿈에 노인이나타나 이르기를 『용봉수귀환(龍鳳壽貴丸)을 쓰면 낳으리라』하거늘 놀라 깨어 그 약을 제조하여 쓰니 부친의 눈병이 쾌유된지라,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된 소치라고 칭찬하였다.

공께서 제가(諸家)의 예설(禮說)을 참고 절충하여 몸소 실행하니 향당에서 모두 따라 행하였다.

도암 이 재(陶庵 李 縡)를 종유하여 도의(道義)로 사귀면서 성리(性理)를 토론하니 도암(陶庵)이 공의 실학 (實學)을 추허하였다.

영조(英祖) 23년 丁卯(1747) 9월2일 己末일에 호남 양전사(胡南 量田使) 원경하(元景夏)가 많은 명사들을 천거, 계주(啓奏)하였는데 그 가운데 『장성에 사는 류광현은 독서강의 고궁수정 (讀書講義 圈窮守靜)하여 백수에 이르도록 세상에 문달을 구하지 않았읍니다. 만약 조정에서 선발하여 등용 하신다면 가히 세도가 격려되고 사기가 흥기될 것입니다. 』하였다.

30년 甲成(1754)에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36년 庚辰 정월 20일 향년 72세로 돌아가시었다.

묘소는 정읍군 칠보면 반곡리 후록 간좌(井邑郡 七寶面 壟谷里 後麓 艮坐)에 모셔 있으며, 공의 행장은 관찰사(觀察使) 목산 이기경(木山 李基敬)이 지었다.

호남 사림(士林)에서 사우(祠宇) 건립의 논의자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배위 청송심씨(靑松沈氏)는 형(泂)의 따님인데 1남3녀를 두고 돌아가시니 묘소는 장성군 북일면 기동 선영 장검등 묘좌(長城郡 北一面 基洞 先塋 長劍嶝 卯坐)에 모셔 있다.

아들 성운(星運)은 호 호은(壺隱)인데 가정교훈을 독실히 익혀 효행이 지 극하였으니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을 봉양함에 풍우(風雨)와 한서(寒暑)를 피하지 않고 자식된 도리를 다하였다. 부친께서 돌아가심에 3년을 죽을 먹으면서 슬퍼한 나머지 몸이 지극히 쇠약하였지만 집례(執禮)에 더욱 엄정함으로, 온 고을에서 감탄하고 여러 차례 천장(薦狀)을 올렸고 온 도내(道內)에서 아름다히 칭송하여 그치지 않았다. 만년(晩年)에 장성으로부터 부안 변산(扶安 邊山)으로 이거하여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따님은 연안 이명수(延安 李命修). 전의 이기정(全義 李基正). 풍양 조수언(豊壤 趙壽彦)에게 출가하였다.

※ 朝鮮王朝實錄, 長城誌. 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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