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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광덕(柳 光 德 )
 

류 광 덕 柳  光  德

 

<류광덕 : 175B~1802 : 正祖朝 學行 大丞公 26世 : 檢漢城公派>

 

자 윤경(潤卿). 호 눌은(訥隱).

백석 집(頗石 輯)의 5대손이요, 학성(學性)의 아들로 영조(英祖) 34년 戊寅 8월6일 김제 수곡(金堤 樹谷)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온후하고 용모가 단정할 뿐 아니라 도량이 또한 보통 사람과 달랐다. 한 마을 아이들이 까치 새끼를 잡아 희롱하는 것을 보고, 공께서 불쌍히 여기어 말하기를 『저것이 비록 미물(微物)이나 어미와 새끼가 서로 떨어져 슬퍼 부르는 것을 차마보겠는가 ? 』하고 권하여 놓아 주었다.

7.8세에 능히 책을 읽을 줄 알아 독촉을 번거롭게 아니 했고, 11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끝에 모친을 위하여 억지로 죽을 마시고 조석(朝夕)으로 궤전(壙奠)하되 애통함이 곁에 사람을 감동시켰다. 복을 마친후 기일(忌日)이 닥치면 그 달에는 주육(酒肉)을 먹지 않고 제수(祭需)를 친히 점검하여 넉넉하고 깨끗하게 성의와 공경을 다하였다.

어느때 몸이 불편함으로 자질(子姪) 들이 대신(代身)할 것을 청하거늘 공이 듣지 않고 말하기를 『공자(孔子)께서 이르지 않았는가? 내가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더라도 제사를 지내지 않음과 같다 하시었고 또 사계(沙溪) 선생께서도 몸소 참례(參禮)하심을 폐하지 않으셨다. 내 비록 병이 있으나 위독하지 않은데 홀로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본받지 않겠는가?』 하시고 제사에 참례하시어 슬퍼하심을 초종(初終) 때와 같이 하시었다.

매양 새벽에 일어나 모친의 침소(寢所)를 찾아 살피고 사당(祠堂)을 배알 한 후 책상을 바로 하고 그 앞에 끊어 앉아 깎은 손톱. 발톱과 빠진 머리카락을 거두어 모아 매월 초하루 성묘 때에 아버지 묘소 밑에묻었다. 평상시 출입이 드물었으나 혹 부득히 나가면 반드시 때를 넘기지 않고 만약 무슨 일이 있어 즉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으면 모친에게 편지를 올려 그 사유를 아뢰었다. 하루는 밖에 있으면서 마음이 갑자가 놀래어 바삐 돌아오니 모친께서 병으로 누우신지라 급히 치료하여 병이 낳음으로 사람들이 유금루(庾黔婁)의 고사(故事)에 비하였다.

일찍 모친의 명으로 과거 공부를 열중히 하여 마침내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선비들의 분경(奔競)함을 보고 마음으로 비루(鄙陋)하게 여기어 드디어 과거를 단념하고 위기(爲己)의 학문에 전심, 경적(經籍)에 몰두하는 한편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대학연의(大垈衍義)에 더욱 정력을 쏟았다.

항상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이 거칠어 언행(言行)이 바르지 못함은 모두 거경공부(居散工夫)에 능하지 못한 때문이다』 하고 매양 제생(諸生)들에게 순순히 효제(孝悌)의 도리를 힘쓰도록 권하고 주자(朱子)의 반일정좌(半日靜坐)와 반일독서(半日諒書)의 법을 본받도록 하며, 자신을 다스리는데 독실하되 충신불기(忠信不欺)를 위주토록 하였다. 또한 사람을 가르침에 먼저 경술(經術)이요, 뒤에 문예(文藝)라 하였으며, 의리(義利)와 시비(是非)를 분별함에 이르러선 확연함이 칼로 베는것 같았다.

제족(諸族)과 합모하여 김제읍 갈공리 선영(金堤邑 葛公里 先塋)아래 재실(齋室)을 짖고 선세에서 이루지 못했던 석의(石儀)를 갖춤은 물론 외조(外祖)께서 후사(後嗣)가 없음에 공이 주선하여 사손(鬪孫)을 세우고 제전(祭田)을 장만하여 드렀으며, 고모(姑母) 한분이 광산김씨댁(光山金氏宅)으로 출가, 일찍 홀로 되어 자녀가 없었는데 공께서 맞아 봉양하길 친모(親母)처럼 하고 마침내 돌아가심에 예제(禮制)를 갖추어 연산 김씨(連山 金氏)의 산으로 반장(返葬). 묘직이를 두어 영원히 보살피도록 하였다.

친척 중에 외롭고 가난하여 의탁할 곳이 없는 이를 거두어 의식(衣食)을 제공하고 또는 가취(漆娶)를 시켰으며 향리에서 배우고자 하나 자력이 없는 이는 도와 교육(敎育)시키고, 어느 사람이건 상장(喪葬)이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위로하고 부조(煦助)하였다.

정조대왕(正祖大王)께서 『鄕禮』를 새로 간행(刊行), 반포(頒布) 하셨는데 공께서 받아 읽으시고 문도(門徒)들로 하여금 그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운 것을 뽑아내어 방리(坊里) 사람들을 깨우치니 향속(鄕俗)이 크게 변하여졌다.

일찍 진위(振威)를 지나는 도중 성답 선생(性潭 先生)께서 소명(召命)을 받아 상경(上京)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시(詩) 일수를 지어 올렸는데 선생께서 기쁘게 받아 들이시고 공에게 눌은(訥隱)의 재호(齋號)와 벽련(壁聯)을 써 보내시었다.

24년 庚申(1800) 6월, 정조대왕(正祖大王)께서 승하하시니 공께서 고을 객사(客含)에 마련된 곡반(哭班)에 참여하였는데, 제반 의절(儀節)을 반드시 공에게 물어 행하였다. 군수 이공재익(郡守 李公在翼)이 탄식하여 마지 않고 말하기를 『지례고사(知禮高士)를 이제 비로서 보겠다』 하였다.

공은 천성이 경치를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여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문득 가서 구경하였다. 또한 근엄(謹嚴)하고 장중(莊重)하여 권귀(權貴)를 가까이 하지 않고, 성예(聲譽)를 구하지 않았으며 오직 영재(英才)를 교육하므로 평생 사업을 삼고, 일찍 말하기를 『사람의 일생에 삼가하고 두려운 마음을 잊지 않으면 무릇 큰 허물은 가히 면하리라. 가장 어려운 것은 분욕(忿慾)의 마음인데 그를 막으려면 함양(涵養)의 공부(工夫)가 있지 않으면 능치 못하다』하시었다.

거처의 좌우에 도서(圖書)를 많이 비치하고 화초(花草)를 많이 길러 초연히 물외(物外)의 정경(情境)이 있었다.

강산 이서구(薑山 李書丸) 선생이 일찍 백석선생문집(白石先生文集)을 구하여 읽고자 하였는데 공께서 책을 모시고 상경(上京)하니 강산(薑山)이 공과함께 이야기 하다가 도취되어 『南州高士』라 칭탄하였다.

순조(純祖) 2년 壬戌 6월19일 향년 58세로 졸하니 친척과 지구(知舊)가 모두 향선생(鄕先生)이 돌아가셨다고 탄식하고 문인(門人) 중에 가마(加癩) 한이가 백여인 이었다. 동년 9월 2일 고을 서쪽 갈공산 선영 북록 오좌(葛公山 先塋 北麓 午坐)의 언덕에 장례를 모시었는데 당시 만사(換辭) 와 제문(祭文)이 40여 장이었다.

공의 묘지명은 선공감부정 이인승(繕工監副正 李寅升)이 짓고, 묘표는 이조판서 김상휴(吏曹判書 金相休)가 짓고, 행장은 고재 이병은(顧齋 李炳殷)이지었다. 공의 유고(遺稿)가 지난 丙辰(1976)에 발간되었는데, 서문(序文)은 강진 김 균(康津 金 菌)이 짓고, 5대손 인좌(寅佐)가 간행하였다.

배위 반남박씨(潘南朴氏)는 광원(光源)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두어 아들 명기(命基)는 호 보만재(保晩齋)요, 경기(敬基)는 호 항헌(恒軒)인데 함께 송성담환기(宋性潭煥箕)의 문하에서 수업(受業), 학행(學行)으로 유명하였으며, 따님은 파평윤취진(坡平尹就鎭)에게 출가하였다.

후손은 김제군 성덕면 대목리(金堤郡 聖德面 大木里), 백산면 부거리(白山面 富巨里), 김제읍 교동리(金堤邑 校洞里)에 세거하고 있다.

※ 行狀, 謫隱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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