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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동수(柳 東 秀 )
 

류 동 수 柳  東  秀

 

<류동수 : 1579~1654 : 仁祖朝 倡義 大丞公 20世 : 忠景公派>

 

자 수보(秀甫). 호 노곡(老谷)

종부시소윤 한생(宗簿寺少尹 漢生)의 4자 신천군수 작(信川郡守 綽)의 현손이요, 예빈시직장 선민(禮賓寺直長 先民)의 2자로 선조(宣祖) 12년 已卯 11월 25일 임천(林川)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 부모를 따라 강원도(江原道)로 피난 도중에 길을 서로 잃어 왜적에게 사로잡혔는데, 나무를 깎아 『父母』 두 글자를 써서 세워놓고 아침 저녁으로 절을 하며 땅을 치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니 왜적들이 그 지성에 감동하여 너그럽게 대하였다. 하루는 그 틈을 타서 가시덤풀을 헤치고 부모를 찾아 회양(淮陽)에 이르러 천행으로 부모를 만나게 되었다.

난리가 그쳐 임천(林川) 고향으로 돌아와 지성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한편 과거공부를 열심히 하여 선조(宣祖) 39년 丙午(1606)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항해군(光海君) 13년 辛酉(1621)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정국이 혼란함으로 출사하지 않고,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廢位)하자는 의논이 일어나므로 항소(抗疏)를 올리려 하였으나 모친께서 울면서 만류하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인조(仁祖) 2년 甲子(1624)에 부친을 여의고 3년을 여묘(廬墓)하며 피눈물을 흘리니 묘목(墓木)에 꽃이 피지 않았다.

11년 癸酉(1633)에 의금부도사(義禁莩事)에 제수되고 이어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을 거친 후 13년 乙亥(1635)에 모친상을 당하여 전상(前喪)과 같이 행하였다. 이듬해 丙子에 후금(後金)의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도성(都城)을 함락하여 어가(御駕)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호남(湖南)으로부터 의병(義兵)이 일어나 격문(激文)이 이르거늘 공이 거상(居喪)중이었으나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여산(礪山)에 이르러 화전(和戰)성립의 소식을 듣고, 통곡끝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관찰사(觀察使)가 공께서 거상(居喪)중에 창의(倡義)한 사실을 나라에 알려 19년 辛巳(1641)에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에 제수되고, 이어 의금부도사(義禁莩事) ․ 장예원사평(掌隸院司評)을 거쳐 21년 癸未(1643)에 이산현감(尼山縣監)으로 나갔다.

24년 丙戌(1646) 3월, 이산(尼山)에 재임중 토적 류 탁(土賊 柳 漂)등을 토벌하여 9월에 통정대부(通丁大夫)의 품계에 가자(加資)됨과 아울러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하사받는 특전을 입었는데 윤형각(尹衡覺)등이 공(功)을 시기, 무고(誣告)하여 한달 후에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

26년 戊子(1648)에 좌의정 남이웅(左識政 南以雄) ․ 도승지 정광성(都承旨 鄭廣成)등이 공의 억울한 사실을 왕께 아뢰어 마침내 사면(赦免)의 명이 내림과 동시에 무고(誣告)했던 무리들이 도리어 귀양을 당하고 공에게 오위장(五衛將)이 제수되었다.

이듬해 已丑(1649)에 천안군수(天安郡守)에 제수되자 이산(尼山)고을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사를 청렴하고 간결하게 다스리니 고을에서 선정비(善政碑)를 세워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

효종(孝宗) 5년 甲午(1654)에 김제군수(金堤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몸이 늙어 부임하지 못하고 병으로 동년 4월 28일에 돌아가시니 향변 76세였다.

이해 가을에 영국원종훈(寧國原從勳)에 책록되어 호조참관(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10년 己亥(1659)에 효종(孝宗)께서 丙戌, 丁亥년 간의 일기(日記)를 보시고 근신(近臣)에게 공의 거처를 물으셨는데 근신이 이미 작고했다고 아뢰니 특지(特旨)를 호조판서(戶曹判書)의 증직을 가자(加資)하시었다.

당시에 시남 유 계(市南 兪 棨) .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 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 등 거유(巨儒)들과 종유(從遊)하여 왕복 서한(往復 書翰)이 많았는데 그에 이르기를 “류공(柳公)의 나라를 위한 충성과 집에 있어 효행은 가히 백세(百世)의 스승이라,”하였으며, 설천 이봉상(雪川 李鳳祥)이 공의 저서(著書)인

 『역설(易說)』을 읽고 『소주정의(邵朱精義)라』고 칭찬하였으니 공의 학문이 경지를 가히 짐작하겠도다.

배위 해주오씨(海州吳氏)는 군수 이순(郡守 以順)의 따님으로 4남 1녀를 두어 장자는 후범(後範)이요, 2자는 후준(後準)인데 계부(字父) 연기현감 동발(燕岐縣監 東發)후로 출계하고, 3자는 후상(後尙)이요, 4자는 후정(後程)이며, 사위는 안동 권 업(安東 權 嶪)이다.

묘소는 임천 선원(林川 仙源), 지금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 선원곡 선영하 임좌(扶餘郡 世道面 花樹里 仙源谷 先塋下 壬坐)에 합부(合?)로 모셔있다.

저암 유한준(著庵 兪漢寯)에게 묘갈명을 받아 순조(純祖) 7년 丁卯(1807)에 묘비를 세우고, 전이조참판 민병승(前吏曹參判 閔丙承)에게 신도비명(神道碑銘)을 받아 지난 甲申(1944)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戊辰(1928)에 임천(林川)의 사림(士林)들이 공의 충의(忠義)를 흠모하여 공의 유지(遺地)인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 간은곡(扶餘郡 林川面 舊校里 艮隱谷)에 단(壇)을 설치하여 제향을 드리다가 己酉(1969)에 사우(祠宇)를 복설(復設)하고, 辛亥(1971)에 정부(政府)로부터 보조를 받아 사우를 중수(重修)하니 이른바 간곡서원(艮谷書院)이다. 乙卯(1975)에 원지(院誌)가 간행되었다.

※ 朝鮮王朝實錄, 墓碣銘, 湖南節義錄, 畏谷書院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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