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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기찬(柳基粲)


류기찬 柳 基 粲

<류기찬 : 字 德立, 號 澗松. 1892.6.28~1962.11.18 爲先人, 漢文修學, 世道面長, 忠景公派 : 大丞公 30世>

신천군수 작(信川郡守 綽)의 후예로 상겸(相謙)의 손이요, 곡운 형로(谷雲 亨魯)의 1남2녀 가운데 외아들로 충청남도 부여군 도면 화수리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광산김씨 명흠(命欽)의 따님이다.

부친께서는 일찌기 자수성가하여 부유한 가정을 이루었으며 인정이 많고 의협심이 강하여 동리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대소가 친족들의 생활 터전을 마련해 주어, 인근 여러 사람들로 부터 후덕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면서 효행이 남달리 출중하고 선현의 도학과 예학에 큰 관심을 가졌다.

용모가 근엄단정하고 관후인자하여 가히 장자의 기풍이 있었으며, 특히 좌담에 논리적이며 설득력이 있어 항상 좌중을 압도하였다.

1928년 세도면장(世道面長)에 취임, 이후 약 10여년간 재임하면서 일제의 식민정책에 시달리는 지역 주민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방향으로 각종 행정을 수행하였을 뿐 만 아니라, 탁월한 추진력으로 학교 설립, 수로 건설, 농지 확장, 영농 개량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0여년간 일제 치하의 면장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민족정신이 투철하여 일본어를 일체 배우지 않고, 사용하지도 않아 하나의 일화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1945년 광복후 당국으로 부터 수차 군수직 수락을 권유 받은 바 있으나 완강히 사양하고 모성 존현(幕聖尊賢)하는 일에만 주력하였다.

임천(林川) 향교의 직원(直員)이 되어서는 낡은 건물을 보수하고 제례(祭禮)을 바로 잡았으며 강회(講會)를 자주 열어 지방 유림(儒林)들에게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넓혔다.

1947년부터 3년간 논산군 강경읍 황산동에서 살면서 황산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중건을 주도하였으며, 또한, 지역 사회에 유도(儒道)를 홍보하는 데 힘썼다.

이후, 임천의 칠산서원(七山書院)과 세도 동곡(東谷)의 퇴수서원(退修書院)을 중건 복설하여 선현의 위업을 계승 발전시켰다.

6 ․ 25동란 후로 고향 화수리 본가로 돌아와 주로 위선사업에 힘써, 추암(秋巖), 노곡(老谷)공 이후의 대 ․ 소 종사를 이끌었으니 추암공 선민(先民)의 묘갈(墓碣), 선교랑(宣敎郞)공 동영(東榮)의 묘갈, 노곡공 단소(壇所)를 임천면 간곡(艮谷)에 설단, 향사하도록 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향리 주민들에게 유학과 예법을 계도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향년 71세로 화수리 자택에서 갑자기 뇌일혈로 운명하였다. 장례식에 많은 지역 인사와 유림 및 종친들이 100여장의 만장(輓章)으로 슬퍼하였다.

배위 청해이씨(靑海李氏)는 준성(條性)이 따님이요,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상학(相學)의 따님이다. 슬하에 3남1녀를 두니 아들은 인식(寅植) ․ 인봉(寅奉) ․ 인각(寅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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