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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인범(柳寅範)


류인범 柳 寅 範

<류인범 : 1931.6.18 서울大學校政治學科卒. 大田工業大學同門會長, 忠南柔道協會長, 제 11代國會議員, 民主韓國黨忠南支部委員長, 同黨黨紀委員長, 同黨中央政治訓鍊院長, 大田로타리크럽 會長, 大成學院院長, 大田車柳大宗會長, 肅慕會理事, 文化柳氏大宗會長 대전시 중구 대흥3동 427-6 忠景公派 大승公 31世>

소윤공 한생(少尹公 漢生)의 후예로 옥천군수 수장(沃川郡守 壽長)의 14대 손이요, 석근(錫謹)의 손이요, 기순(基淳)의 장자요 단양이씨 영식(丹陽李氏 永植)의 외손으로 대전시 중구 오류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간중영민(簡重潁敏)하여 항상 학업에 정진하더니 일찌기 대전공업중학교 학생회장을 역임 기계과 6년을 거쳐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장학생으로 졸업하였다.

1957년 군(軍) 복무를 마치고 대전공업고등학교 교사로 취임하였는데 5.16당시 한국교원노조사건으로 투옥된바 있으며 복직 후 2년 8개월 동안 홍성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64년 3월 대전고등학교 교사로 전임하여 72년 2월 사임과 동시에 대전 중구 대흥1동 「대성학원」(大成學院)을 설립, 원장으로서 현재까지 많은 인재(人材)를 양성하고 있다.

그후 일반 사회단체 주요경력으로는 76년 3월부터 79년 12월까지 한국학원총연합회 충남도지부장, 79년 3월부터 81년 2월까지 대전동산증 ․ 고등학교 육성회장, 79년 5월부터 현재까지 서울대학교동창회 충남지부이사, 80년 3월부터 82년 2월까지 대전신일여자중학교 육성회장 및 대전대성고등학교 육성회장, 80년 3월부터 현재까지 한국보이스카우트 충남연맹 실행위원, 80년 12월부터 82년 12월까지 충남도유도협회장, 81년 5월부터 현재까지 대전공업대학(舊大田工高) 동문회장, 81년 5월부터 현재까지 서울대학교동창회이사, 84년 2월부터 87년2월까지 대전동명중학교 육성회장, 87년 3월부터 현재까지 보문고등학교육성회장, 88년 7월부터 89년 6월까지 대전로타리크럽 회장, 88년 7월부터 현재까지 사단법인 숙모회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나라를 위하여 혹은 교육발전에 혹은 사회봉사활동에 혹은 체육발전에 혹은 모현진작(慕賢振作)에 간난(艱難)을 무릅쓰고 뛰어다니며 그 직분을 다하니 일일이 업적을 기록치 못하나 이미 세상에 그 훈공이 드러나 있다.

정치학을 전공한 나머지 항상 우리나라 정치현실을 직관하고 근심해 오던 중 자신의 정치이상을 구현코자 드디어 1981년 1월 민주한국당 충남제 2지구당(大田中區)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동년 4월 제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후 국회내무위원(1 ․ 2기), 국회예산결산위원, 제4차 AIPO회의 한국대표등을 역임하고 당직(黨職)으로 84년 11월부터 87년8월까지 민주한국당 충남지부 위원장, 85년 7월부터 12월까지 동당 중앙당기위원장, 86년 1월부터 87년 8월까지 동당 중앙정치훈련원장등을 역임하였다.

비록 초선의원이지만 뛰어난 원내활동, 핵심을 꿰뚫는 정치역량으로 정통정치인이란 평을 받았다. 예결위에서 구체적으로 수치를 들어가며 조목조목 따지는 모습이라던가 상임위의 발언등은 결코 무리가 없으며, 그러면서도 어떤일에 부딪치게 되면 그를 끈기 있게 밀어 부치는 저돌성을 발취하였다.

11대국회 등원이래 줄곧 내무위에 소속하여 직업공무원제도, 당정순환근무제, 공무원처우개선책,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방범대원의료보험제, 공유지분 토지분할에 대한 특례법제정을 촉구했으며, 특히 대통령 선거제도에서 선거인단을 통한 대통령선거는 민의를 굴절시키는 선거제도라고 지적하면서 평화적 정권교체는 사람이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그 직선제를 강력히 주장하여 주목을 끌었고, 대정부 공개질의 석상에서 국무총리에게 군(軍) ․ 관(官) ․ 재벌로 분류되는 이 시대 3강(强)의 지배원리를 신랄히 비판하고, 정의(正義)는 약자의 보호수단이라고 정의(定義)하면서 「자유당정부가 자유를 외면했기에 붕괴했고, 민주공화당이 민주의 공화에 역행했기에 자멸했다」고 규정하고 「민주정의당이 민주의 정의를 망각하고 있으니 그 앞날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고 예견하면서 민주정의의 현주소를 따지는 비수와 같은 질문으로 온 국회 안을 숙연케 한 바 있다.

중진(重鎭) 정치인으로 확고한 위치를 다지면서도 국민의 대변자로서 자신을 P.R하는데 결코 오만하지 않고 오로지 국회의원으로 뽑아준 주민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항상 성실히 봉사하는데 진력하여 왔으므로 세인의 추중(推重)한바 되었다.

한편 위선(爲先)에 성근하고 돈종(敦宗)에 곡진하여 1979년 대전차류대종회장(大田車柳大宗會長)에 추대된 이래 89년 현재까지3차를 역임중이며 그동안 차류대종회 중앙총본부 고문, 문화류씨대종회관 건립추진위원장, 충경공묘역 문화재지정추진위원장, 문화류씨대종회 고문, 문화류씨대종회장(現), 대승장학회 부회장(現)등을 역임 또는 재임중에 있다.

종중사업으로는 첫째 어려운 여건하에서 문화류씨회관을 건립하는데 중추적역할을 다하고 그밖에 충경공묘역을 지방문화재로 지정케 하고, 재각(齋閣)과 사우(祠字)를 건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또 소윤공(少尹公) 재각건립과 방아실 찰방공재각 중수 및 묘역정화등 기타 많은 업적을 남겼다.

종족간에는 한가지로 화합을 위주로하고, 선세의 유덕을 계술(繼述)하며, 종문의 전통을 유지 발전하는데 진력하고 있다.

부인은 함양박씨 병준(成陽朴氏 炳駿)의 따님으로 천성이 정순(貞純)하여 시부모를 섬기되 일찌기 그 뜻을 어기지 않고, 부군을 공경으로 받들며 오직 명을 쫓아 순응하니 남들이 여사(女士)라 청송하여 마지않았다.

슬하에 아들 수열(秀烈)과 재열(載烈) 형제를 두고, 큰딸 수애(秀愛)는 연주 현상훈(延州 玄相勳)에게, 둘째딸 수진(秀眞)은 의령 남종호(宜寧 南鍾鎬)에게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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