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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인형(柳寅衡)



류인형 柳 寅 衡

<류인형 : 一名 寅萁, 字 聖弼, 1896.5.20.~1971.7.14. 孝子, 忠景公派 : 大丞公 31世>

옥천군수 수장(沃川郡守 壽長)의 후예로 참봉공 은(參奉公 垽)의 12대손이요, 부호군 원보(訓護軍 源輔)의 증손이요, 인근(仁根)의 손이요, 금양 기일(錦陽 基一)의 6남6녀 중 3남으로 대덕군 탄동면 내동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선호(善浩)의 따님이다.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를 역임한 부친은 재혜(才慧)가 절륜(絶倫)하고 필법(筆法)이 정통하였으며, 집안을 거느림에 법도(法度)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지효(至孝)하여 이미 어버이를 공경할 줄 알고,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부친은 본디 성품이 엄하여 혹 허물이 있으면 조금도 관용(寬容)함이 없이 노하여 종아리 때려도 기쁜 얼굴로 공경하고 이음에 별거(別居)함에 미쳐서도 항상 반드시 좋은 음식으로 봉공(奉供)을 게을리하지 않고 말하기를 “부자가 멀리 살이 어찌 사람의 정이리오”하고 드디어 집을 한 담장에 연하여 짓고 조석정성(朝夕定省)과 미식봉양(美食奉養)을 폐하지 아니하고 항상 부족함을 염려하였다.

만년에 부친이 풍질(風疾)로 자리에 눕게 되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약을 다려 드려 복용치 않으시니 진미를 진성으로 구헌하고 혹은 등에 업고 들에 나아가 구경케하였다.

병환이 조금씩 나아짐에 지팡이를 붙잡고 배행하여 친구나 형제 집에 가면 모두 효자라고 추켜 세웠다.

그 제매(弟妹)의 어린 것들을 교육시켜 취가(娶嫁)시킴에 모두 스스로 조판(措辨)하며 친노(親勞)를 끼치지 않았다. 이에 군내 유림(儒林)이 향리 입구에 효자비를 세우고 성균관에 계천(啓薦)하여 효자포창(孝子褒影)을 내리게하였다.

부인은 한산이씨 춘부(韓山李氏 春溥)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뛰어나서 지극한 효성으로 역시 유림(儒林)의 포장(褒獎)이 있었다.

묘는 신탄진 읍장동3구 진골 후록에 합부(合祔)로 모셨다.

슬하에 2남4녀를 두니 장자 웅렬(雄烈)은 대전시 부시장, 대덕, 공주, 연기군수를 차례로 역임하였는데 고을마다 선정비(善政碑)가 있고, 2자 억렬(億烈)은 효행으로 이웃의 칭송이 높았다. 딸들은 전주인 이상순(全州人 李相純), 파평인 윤석주(坡平人 尹錫周), 선산인 곽근태(善山人 郭根免), 풍양인 조병호(雲壤人 趙炳昊)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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