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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웅렬(柳雄烈)



류웅렬 柳 雄 烈

<류웅렬 : 1913.4.13 日本明治大學 法學部 卒業, 大田市副市長, 車柳大宗會忠南道本部長, 大田車柳宗親會長, 文化柳氏大宗會副會長, 忠景公派 : 大丞公 32世>

효자 인형(孝子 寅衡)의 2남 4녀 중 장자로 대덕군 탄동면 내동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한산이씨(韓山李氏)니 춘부(春溥)의 따님이다.

부친은 지극한 효성으로 대덕유림(大德儒林)의 칭송한 효행비가 있고 모친 역시 부덕(婦德)과 지효(至孝)로 유림(儒林)의 포장(襃獎)이 있다.

어려서부터 정훈(庭訓)을 복응(服膚)하여 천성이 온후영민(溫辱潁敏)하고 효우명리(孝友明理)하였다.

일찌기 일본에 건너가 학비(學費)를 스스로 조달하여 고학으로 도경도목백상업학교(東京都目百商業學校)를 거쳐 41년 명치대학 전문부 법과(明治大學 專門部 法科)를 졸업하고 43년 동대학 법학부(法學部)를 졸업함과 동시에 법학사(法學士) 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44년 충남도 산업과(忠南道 産業課)에 재직하다가, 해방후로 부여, 대덕, 연기군등 산업, 내무과장(內務課長)을 역임하고 60년, 대전시 산업, 회계과장을 거쳐 61년 대전시부시장(大田市副市長)에 승임되고, 66년부터 71년까지 대덕, 공주, 연기군수를 차례로 역임하는 동안 간데마다 선정(善政)을 베풀고 치적(治緯)이 많았으므로 그 성망(聲望)이 멀리까지 미쳤다.

특히 공주군수로 재임시에는 사곡면(寺谷面) 마곡사 입구 태화대교(麻谷寺 入口 泰華大橋)를 가설하여 교통을 원활히 하고 수리시설(水利施設)을 갖추어 농촌소득 증대사업을 장려하여 비약적인 식량증산을 이룩케 하였을 뿐 아니라 사사로움을 배척하고 공리(公利)로 민생(民生)을 도와 농촌생활을 윤택케 하였다.

이로써 68년 9월 사곡면민의 숙원사업(宿願事業)인 태화교를 가설한 공으로 면민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우고, 70년 3월 공주군민이 또 선정비를 세우니 그 비에 이르기를

“아름답다 우리 군수 이 공주(公州)딴에 나와 이로움을 흥케하고 제단(弊端)을 물리치니 이가 산천에 미쳤도다. 사방(沙防)과 교량공사로 사방에 길을 내었도다. 진실로 공렴(公廉)에 의거하니 누가 흠덕(欽德)치 않으리오, 흐르는 은택과 넓은 은혜, 감히 잊을 수 있으리오. 그 공덕 돌에 새겨 성망(聲望)을 한 고을에 떨치리”하였다.

또 71년 연기군수(燕岐郡守)로 재임 하면서 금강연안(錦江沿岸)일 대가 호안제방(護岸堤防)이 없어 홍수가 범람하면 농작물 피해는 물론 주민들의 생활이 비참한 지경이었던 호암평 삼성천(孤岩坪 三星川)에 큰 제방(堤防)을 쌓아 올리고 도로를 개설하고 전기까지 가설하니 이때부터 오곡(五穀)이 풍등(豐登)하고 백성이 평안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치원읍(鳥致院邑)의 발전과 이밖에도 여러 가지 지역개발 숙원사업을 이룩한 치적(治蹟)이 많고 방위협의회 연기군의장(防衛協議會 燕岐郡議長)으로서 향토방위에 제반 기반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이로서 대통령, 내무부장관, 충남도지사로부터 우수공무원(優秀公務員) 표창을 받았다. 이 고을에 베푼 치적(治蹟)을 잊을 수 없어 1985년 11월 군민(郡民)이 반곡(盤谷)에 또 공덕비(功德碑)를 세우니 이 비는 군수직(郡守職)을 퇴임(退任)한 14년만에 세운 것이다.

이 군수문화류공웅렬공덕비『郡守文化柳公雄烈功德碑』는 충남대학 교수 문학박사 최원규(文學博士 崔元圭)가 지었다.

그후 대전견직공업주식회사(大田絹織工業株式會社)회장직에 재임하면서 화사발전은 물론 대전상공회의소(大田商工會議所) 육성에 진력하여 크게 공헌(貢獻)하기도 하였다.

한편 조상(祖上)의 음덕을 경앙(景仰)하고 종친간의 돈목(敦睦)을 바라는 소망이 간절하여 대전차류대종회(大田車柳大宗會)를 창설, 초대회장(初代會長)을 역임하면서 종친간의 숭조목종(崇祖睦宗)의 기풍(氣風)을 진작(振作)하고 문화류씨 대종회가 창립되자 부회장 겸 간사장(幹事長)으로서 세계보편간사업(世系譜編刊事業)과 대종회관(大宗會館)건립에 헌신하고 모든 종사에 진력 그 열업(烈業)과 공훈(功勳)이 울울(蔚蔚)하고 덕의(德義)와 아조(雅操)가 빈빈(彬彬)하였다.

그러나 1985년 73세에 풍질(風疾)로 인하여 기동(起勳)이 어렵게 되자 배 남양홍씨(配 南陽洪氏)는 원래 천성이 숙미정각(淑美貞慤)하여 항상 부군(夫君)을 긍경으로 대함이 빈객(資客)과 같더니 이때를 당하여 극히 잠시라도 곁을 떠나지 않고 시종하니 비록 교만한 자라도 와서 보고 그 지성에 감탄치 않은 자 없었다.

그러한 병환중(病患中)에서 도공은 선영(先塋)의 황폐(荒廢)함을 근심하고 자손으로 하여금 사초(莎草)하게 하고 또한 선친(先親)의 유업(遺業)이 민몰(泯沒) 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몸소 가상(家狀)과 실기(實記)를 갖추어 족인 재호(族人 在浩)로 하여금 비문을 짓게 하고 사인 송준영(士人 宋浚永)의 글씨를 받아 돌에 새겨 영원히 전(傳)하게 하였다.

입비(立碑)하는 날 기동이 불편한 몸을 자질(子姪)의 부축으로 산상(山上)에 이르러 지휘감독(指揮監督)함을 본 사람은 위선(爲先)하는 정성에 감탄치 않은 이가 없었다.

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는 아들 지택(志擇) ․ 지백(志泊) ․ 지인(志仁)과 딸 송인근(宋仁根) ․ 하영웅(河英雄)의 처를 낳고 1952년 42세에 별세하시고, 계배 남양홍씨(繼配 南陽洪氏)는 참봉 순익(參奉 淳翼)의 따님으로 아들 지명(志明)과 딸 정승호(鄭昇湖) ․ 윤성룡(尹成龍) ․ 임원식(任元植)의 처를 낳았다.

손자 성현(成鉉) ․ 별현(秉鉉)은 장자 지택(志擇)의 소생이요, 호현(豪鉉) ․ 정현(正鉉)은 지백(志泊)의 소생이요, 일선(日善) ․ 음선(隆善)은 지인(志仁)의 소생이요, 웅선(雄善) ․ 익선(益善)은 지

명(志明)의 소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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