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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호(柳 灝 )
 

류 호 柳  灝

 

<류 호 : 1576~1646 : 仁祖朝 學者 大丞公 21世 : 祗候使公派>

 

자 중원(仲遠). 호 뇌천(磊川).

석헌 옥(石軒 沃)의 증손이요, 종사랑 홍원(從仕郎 洪源)의 2자로 선조(宣祖) 9년 丙子 정월 9일에 창평 유곡(昌平 維谷)에서 태어났다.

공은 지절(志篩)이 고상하고 문장(文章)이 유여하여 당시 명류(名流)들의 추중한 바 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후로 항상 강개한 뜻이 있어 시(詩)를 지어 이르기를,

 

『들으니 되놈들이 강을 건너 쳐들어 옴에,

한양성 밖으로 임금이 피란했다 하네

가련하다 동국에 좋은 계책이 없어서

화친이 성립되니 열사의 슬픔이 더하누나』

<楣虜兵渡江時漢陽城外 翠華移. 可憐東國無長策和宇終成烈士悲>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고 오직 학문에 전력하여 세상에 나서지 않고 산중에 묻쳐 시부(詩賦)로 여년을 마치니 뇌천처사(磊川處士)라 일컬었다.

인조(仁祖) 24년 丙戌 4월11일에 향년 71세로 돌아가시니 동년 10월13일 乙酉일에 담양 원효산(漂陽 元曉山) 석헌공 묘하 자좌(石軒公 墓下 子坐)에 장례를 모셨다.

배위 순천김씨(順天金氏)는 봉사 복지(奉事 復址)의 따님으로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는데 공께서 돌아가신 이듬해 11월18일 乙酉일에 천묘(遷墓), 공의 묘소에 합폄하였다.

기암 정홍명(崎庵 鄭弘溟)이 묘갈명을 짓고, 외예(外裔) 양천허교(陽川許翹)가 행장을 짓고, 수종재 송달수 (守宗齋 宋達洙)가 묘표를 지었다.

철종(哲宗) 말엽에 공의 유고 뇌천집(磊川集)이 간행되었는데 노사 기정진(蘆浴 奇正鎭) 이 그 서문을 지었으며 창평지(昌平誌) 및 용성지(龍城誌)에 사적이 등재 되었다.

4남 4녀를 두어 아들은 동숙(東淑). 동순(東洵). 동연(東淵). 동유(東遊)요, 사위는 남원양여균(南原楊汝筠). 승지 삭녕최온(承旨 朔寧崔蘊). 진사 성주현적(進士 星州玄績). 진사 순천박상순(進士 順天朴尙純)이다.

장자 동숙은 호 야망당(野望堂) 인데 일찌기 기암 정홍명을 스승으로 섬겨 과업(科業)을 폐하고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니 기암께서 칭찬하여 마지 않고 야망당기(野望堂記)를 지어 주었다. 덕행과 문학으로 일시에 명성을 떨치고, 동향의 곡구 정한(谷口 鄭漢) 희과당 고두장(悔過堂 高斗綱). 장계 오이정(藏溪 吳以井)으로 더불어 도의로 사귀어 당시 창평사현(昌平四賢)으로 일컬었다. 또한 자신의 표지명을 지었고 후손이 창평(昌平)에 세거하고 있다.

2자 동순은 호 어목(漁牧)인데 천성이 어질고 효성과 우애가 독실할 뿐 아니라 마음 가짐이 공손하고 집 다스림이 법도가 있었으며 자질들은 잘 가르쳐 모두 학행이 있었다. 중년에 외가(外家)를 따라 아우 동연과 동유를 거느리고 남원 강촌(南原 江村)으로 이거하였다. 현종(顯宗) 원년 庚子(1660)에 진사(進士)에 급제, 고상한 행의(行誼)로 사우(士友)의 추중을 받았으며, 후손은 강촌에 세거하고 있다.

3자 동연은 호 남간(南磵)인데 품성이 밝고 조행이 바르며 경전(經博)을 깊이 탐구하여 조예(造詣)가 깊었다. 일찌기 양의사상도(兩儀四象圖)를 저술하고 효종(孝宗) 원년 庚寅(1650)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으며, 7년 (1656)에는 감역(監役)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여년을 마치었다. 유고(遺稿)가 있고 사행은 용성명현록(龍城名賢錄)에 실리었다. 공의 묘지는 좌랑 삭녕최치옹(佐卽 朔寧崔致翁)이 짓고, 묘갈명은 문인(門人)인 남양방두천(南陽脣斗天)이 지었다. 후손은 강촌에 세거하고 있다.

4자 동유는 호 호계(虎溪)인데 천품이 순수하고 조예가 깊어 숙형 남간공(叔兄 南磵公)과 함께 효종 庚寅에 진사에 동방(同榜)으로 급제하였다. 천성이 염정(恬靜)하여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만년에 호계정(虎溪亭)을 지어 많은 선비들과 교류하여 문학으로 명성을 떨쳤다. 형제자매 8인이 매년 세시(歲時)에 단란하게 모여 즐기니 당시 사람들이 우러러 사모하였다. 후손은 순창군금과면남계리(淳昌郡金果面南溪里)와 담양군고서면성월리(漂陽郡古西面聲月里)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 行狀 : 磊川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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