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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행직(柳 行 直 )
 

류 행 직 柳  行  直

 

<류행직 : 1725~1787 正祖朝 孝行 大丞公 26世 : 祗候使公派>

 

자 사심(士心). 호 용와(庸窩).

세자시강원필선(世予侍講院弼善) 오촌 기문(梧村 起門)의 5대손이요, 증동몽교관 시명(贈童夢敎官 時明)의 아들로 영조(英祖) 원년 乙巳 1월5일 생인데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아 평소에 곁을 떠나지 않고 만약 특이한 음식을 얻으면 품속에 싸가지고 돌아와 어버이께 드리었다.

부친께서 3년을 병석에 계심에 공이 힘을 다하여 간호하고 한편 어육(魚肉)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며 그 병세가 악화됨에 손가락을 깨어 피를 흘려 하루 저녁의 명을 연장하고 막상 돌아가심에 송종(送終)의 절차를 한결 예제(禮制)에 쫒아 행하였다. 그후 모친께서 병환으로 7년 남짓에 가산(家産)이 핍박하여 가히 말할 수 없었으나 심력을 다하여 공양(供養)에 조금도 결핍(缺乏)함이 없으므로 지주 임공덕항(地主 林公德恒)이 소문을 듣고 아름다이 여겨 매양 쌀과 닭 등을 보내 주었다. 마침내 돌아가심에 한결 전상(前喪)과 같이 행하고 기일이 닥치면 3일 동안 주육(酒肉)을 삼가 하였다. 젊어서 일찍 외종숙(外從減)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叢)의 문하에 출입하여 행검(行檢)이 바르고 규구(規矩)에 엄하여 항상 자제들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천하사(天下事)는 오직 의(義)와 이(利)일 따름이다. 의는 천리(天理)에서 나오고 이는 인욕(人慾)에 속하나니 사자(士子)는 이 두가지를 확실히 분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임종(臨終)에 정신이 밝아 조금도 괴로운 빛을 보이지 않고 부녀(嫦女)들을 물리치고 자리에 반드시 누워 태연히 돌아가시니 때는 정조(正祖) 11년 丁末 정월 16일로 향년 63세였다.

일두 조정경(一燾 趙鼎慶)이 만사(換詞)를 지어 애도(哀悼)하였고, 도백(道伯)이 공의 효행을 조정에 계 달(啓達)하였다.

배위 은진송씨(恩津宋氏)는 내전(來銓)의 따님으로 2남을 두고 진주강씨(晋州姜氏)는 필윤(弼潤)의 따님으로 3남을 두었으며 묘소는 연기군 남면 시목성 자좌(燕岐郡 南面 枾木城 子坐)에 고위(考位)와『品』자 형으로 3합부로 모시었다.

5남을 두어 제태(齋泰) . 제형(齋衛) . 제화(齋華) . 제항(齋恒) . 제숭(齋嵩)이다.

노탄 송규헌(老灘 宋奎憲)이 공의 표갈명을 지었다.

장자 제태 (齋泰)는 가정 교훈을 이어 받아 어려서부터 행실이 지극히 착하더니 9세에 모친을 여의었으나 범절(凡節)이 성인과 같았으며 아우로 더불어 여묘(廬墓)하면서 기물(器物)을 씻고 제전(祭奠)을 올림에 정성껏 받들어 행하였다. 한편 홀로 계신 부친의 공양에 성력을 다하고, 혹 환후(患候)가 계시면 밤에 산에 올라가 자신을 대신해줄 것을 기도하고 낮에는 탕약(湯藥)을 다려 올렸으며 병세가 더욱 위독함에 마침내 손가락을 끓어 그 피를 입에 넣어드려 하루의 명을 연장하였다. 드디어 돌아가심에 여막(廬幕)에서 하루에 세차례씩 묘소에 나아가 곡(哭)하며 3년을 마치었다. 일찍 깊이 감추어 두웠던 끊어진 손가락을  매양 볕에 쬐어 두었더니 임종에 가인(家人)을 시켜 그 손가락을 잇고 말하기를 『부모의 육체(肉體)이니 가히 온전히 돌아가야 한다』하고 심기(心氣)가 편안하더니 몸을 구부려 계모 강씨(繼母姜氏)에게 절하여 영결(永訣)을 고하고 말하기를『자식으로서 끝내 부모를 모시지 못하고 이렇게 죽게되니 불효가 막대하옵니다. 』하고, 또 아우 제형(濟衛)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어머님을 봉양하고 어린 자식을 돌봄을 오직 너만 믿는다』하고 돌아가시니 도백(道伯)이 공의 효행을 나라에 계달(啓達)하였다.

차자 제형(濟衡)은 어려서부터 무릇 행동이 어버이를 즐겁게 하더니 7세에 모친을 여의고 백씨와 함께 아침 저녁으로 제전(祭奠)을 올리며 호곡(號哭)하는 절차가 문득 성인과 같으므로 보는 이마다 기특히 여기었다. 10여세에 이르러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닭이 울면 일어나 부친의 침실(寢室)에 들어가 따습게 덮어드리고, 잠자리에서 일어나심을 기다려 한결 지성으로 뜻을 받들었다. 연기(燕岐) 고을 수령으로 왔던 황공운조(黃公運祥)가 그 효성을 듣고 아름다히 여겨 매월 미육(米肉)을 급여(結與)하여 반찬을 잇게 하였다. 만약 친환(親患)이 계시면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어 조금도 떠나지 않고 탕약(潟藥)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을 뿐 아니라 반드시 맛을 본 후에 드리었다. 병환이 위독하심에 손가락을 깨물어 주혈(注血)하고 드디어 돌아가심에 슬퍼함이 이를데 없었으며 수장(水醬)을 3일 동안 입에 넣지 않고 여막(廬幕)에서 하루에 세차례씩 묘소에 나가 곡함에 울음소리가 산곡(山谷)을 진동하였고 비록 매서운 추위와 무더운 더위에도 폐하지 않고 3년을 마치었다. 매양 기일(忌日)이 닥치면 슬퍼 뛰고 울부짖음이 초상(初喪)때와 같았으며 형제에 우애하고 자질들을 가르침에 다 성법(成法)이 있을 뿐 아니라 덕망(德望)이 일향에 들리었다.

3자 제화(齋華)는 어려서부터 행실이 독실하여 어버이의 뜻을 순종함에 지극하더니 부친께서 병환이 위독하심에 손가락을 깨어 진혈(進血), 연명(延命)을 시도하였으나 마침내 돌아가심에 양형(兩兄)으로 더불어 여막(廬幕)에서 집례(執禮)에 성의를 다하고 슬픔이 절도(節度)에 넘어 담제(禪祭)전에 돌아가시니 때에 나이 30이었다. 그 계배 결정장씨(結城張氏)가 또한 천성이 온숙(溫淑)하고 자량(慈諒)하여 예절이 매우 밝더니 출가 후 구고(舅姑)를 성기고 부군(夫君)을 대함에 한결 뜻을 순종하고 행동이 여칙(女則)에 합당하여 질언(疾言)과 거색(遽色)이 없었다. 부인의 나이 21세에 부군(夫君)께서 돌아가셨는데 이에 앞서 손가락을 깨어 진혈(進血)하였으나 끝내 구하지 못하고 즉시 따라 죽으려 하니 가인(家人)이 심히 경계하고 한편 위로 시어머님이 계시고 아래로 갓난 어린애가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몸을 지탱하여 3년 동안을 질대(經帶)를 벗지 않고 주야(晝夜)로 눈물을 흘리며 성의와 공경을 다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옛적 여사(女士)의 풍도(凰度)가있다』하였다.

이렇듯 일문 삼세(一門 三世)에 효자가 6인, 열부가 1인이 남으므로 관찰사(觀察使)가 이를 계달하였다. 그리고 심암 조두순(心凌 趙斗淳)이 시를 지어 찬양하기를 『일렬도 아름다운데 육효를 겸했으니 단정과 화고가 시골에 빛나도다.』

一烈猶光六孝兼. 丹旌華詰鑛窮刊

※ 墓端銘 燕岐邑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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