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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차車*류柳는 동조이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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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차씨와 류씨는 동조이성이아닙니다.

설명은 도산류열렬의 아래논문으로 대신합니다

車.柳는 한뿌리에서 나온 두성이(同根二姓)이 아니다

차류대종회 해체의 당위성을 논함 (一)

도산 류영렬

(문화류씨서울권종친회장 *문화류씨정신공종친회장*문화류씨고문*)

서언

우리는 車氏와 柳氏가 同祖異姓인 중 알고 車柳大宗會中央總本部 라는 간판을 걸고 이제가지 종친운동을 함께해 왔다. 우리 선조들께서도 차류는 한 할아버지 자손이라고 일러주시었고 심지어 결혼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柳門의 한편에서는 차원부설원기가 僞書라는 주장도 있어 왔지만 크게 공론화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연안차씨종친회에서 대전 뿌리공원에 연안차씨 유래비를 세우면서 차씨 측에서 대승공의 성이 잘 못되었다 성이 류씨가 아니라 車氏요 이름(휘)이 海라고 주장하고 차승색에서 류색으로 변성하여 5대동안 사용해오던 柳氏를 假性이라고 폄하하고 류문이 차문을 멸시하려 車字위에 柳자를 붙이어 柳車達로 만들었다 또 문화류씨의 시조는 대승공휘 류차달이 아니다.『柳孝金』이다. 차씨의 기록이 없는 『문화류씨 가정보』는 위보僞譜이다 등 일천여년의 종사를 왜곡하는 기록을 비문에 각자하여 입비하면서 우리 류문을 자극하여 문제는 발생되었다.

문화류씨대종회는 이 문제에 대한 대책회의를 수차 열어 차씨들이 비석에 새기고 족보에 올려놓은 기록이 사실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를 확실히 규명하여 만약 사실이라면 그들의 주장에 확실히 승복하고 거짓이라면 엄정히 대처하는 한편 우리의 종문 사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본인도 차류대종회사무총장을 다년간 역임했던 사람으로 황당한 국면을 만난것이다.

문화류씨대종회 회장직무대행을 맡고 있던 당시 이 사안은 적절히 덮어두고 세월에 맡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연구에 열정을 The았다.

그로부터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가정보를 위시하여 전래의 역대 족보 및 정사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삼국사기』『고려사』『동국여지승람』『조선왕조실록』 등은 물론, 그들이 내세우는 『차원부설원기』『강남보원파록』등 제반 공․사가문헌을 다방면으로 입수하여 널리 탐색하고 깊이 연구하였다. 이렇듯 모든 문헌을 수년에 걸쳐 탐구한 결과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모두 왜곡이요 허위이며 날조로서 이른바 환부역조(換父易祖)를 획책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에 대종회가발행하는 유주춘추에 차원부설원기와 강남보원파록의 허구(虛構)인 점을 아래와 같이 핵변(覈辨)하겠다.

먼저 車柳가 同根異姓인가에 대하여 고찰한 바를 설명 한다

우리 류문은 약100년간 차류는 同祖異姓으로 알고 서로 종씨라하며 숭조하고 애종하며 서로 결혼도 안하며 동종으로의 종친활동을 해왔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류씨와 차씨가 성은 다르지만 한 뿌리의 후손인 줄 알고 중앙은 물론 지방에서도 함께 종친회를 조직하여 서로 의좋게 지냈었다.

그런데 근 10년 전 연안차씨대종회에서 대전 뿌리공원에다 『연안차씨유래비』라는 큰 비석을 세우고, 뒤이어 그들의 족보를 간행했는데 그에 문화류씨는 『가성(假姓)』이다.

문화류씨의 시조 류차달(柳車達)은 류씨가 아닌 『車씨다 휘는 達』이다.

또는 문화류씨의 시조는 대승공휘 류차달이 아니다.『류효금』이다. 차씨의 기록이 없는 『문화류씨 가정보』는 위보僞譜이다 등 온갖 낭설을 기록하여 놓았다.

☐문화류씨대종회는 車柳가 同根異姓인가에 대하여 문헌적 고찰.

그러나 그 당위성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대종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대책회의를 수차 열어 차씨들이 비석에 새기고 족보에 올려놓은 기록이 사실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를 확실히 규명하여 만약 사실이라면 그들의 주장에 확실히 승복하고 거짓이라면 엄정히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로부터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가정보를 위시하여 전래의 역대 족보 및 정사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삼국사기』『고려사』『동국여지승람』『조선왕조실록』 등은 물론, 그들이 내세우는 『차원부설원기』『강남보원파록』등 제반 공․사가문헌을 다방면으로 입수하여 널리 탐색하고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이렇듯 모든 문헌을 수년에 걸쳐 탐구한 결과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모두 왜곡이요 날조로서 이른바 환부역조(換父易祖)를 획책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차원부설원기와 강남보원파록의 허구(虛構)함을 다 들칠 수 없고 몇 가지 만 거론 하겠다.

☐신라개국초에 차무일공이 나라로부터 차성으로 사성 받았고 승상이 14인이라 했으나 모두 거짓입니다.

-차무일공이 신라시조 박혁거세로부터 사승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차씨로서 신라조에 승상을 지낸 분이 14인 운운하였는데 당시 미관말직에도 차씨 성을 가진 이름이 발견되지 않았다.

신라의 성씨를 고찰하건데

신라는 朴,昔,金,3성의 득성에 대한 전설이 있고 제3대 유리왕 때 6부촌에 李씨 崔씨 孫시 鄭씨 裵씨 薛씨등 6성을 賜姓했으며

신라진흥왕순수비(540-576>인 창령비,마운령비,북한산비,무술오작비,황초령비,남산신성비에 등 7세기 이전의 금석문에 등재 인물은 이름만 있고 성이 없다는 것이 사학계 및 보학계의 정설이다

신라조에 승상(丞相)이란 관직명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상당한 관직은 물론 차씨성을 자진 이름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승상 차승색이 그 아들과 함께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헌덕왕 언승을 복수하려다 미수에 그쳐 변성명 운운하였는데 이는 국가적인 대사건으로 그 주모자인 차승색의 성명이나 사건의 개요가 반드시 드러나야 되는데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고려 태조 왕건을 차씨의 후손 운운하는데 고려사 태조실록에 의하면 『고려 왕실의 조상은 역사기록이 없어서 자상하지 못하다』하였으며, 또한 태조 즉위 2년에 3대 조상을 추봉하고 고려 건국이후 400여년을 지내는 동안에도 선계에 대한 여하한 논란이나 기록이 없었다.

차원부설원기를 위서(僞書)라고 보는 근거 (一)

기사보의 원파록 분석

파록을 분석하면 의문점이 많아 왕명으로 지은 국가기관에서 지은 당대의 高官碩學의 所撰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 기록의 의문점을 아래와 같이 摘示하여 제종과 함께 연구하기로 한다

먼저 기사보를 찬술한 處厚公 제기한 의문을 살펴보자

『기사보(1689)의 범예에 『왕명차원부설원기』에 근거한 원파록 기사가 망매해서 알수 없다고 명시』

우리 문화류씨 역대족보를 거슬러 찾아보니 1689년 문화류씨 기사보(己巳譜)를 편찬할제 차원부 설원기에 근거한 소위 원파록(源派錄) 기사를 처음 다루었습니다. 處厚공은 이 기사를 등재하면서 많은 의문을 전제하고 후일 후손들은 더 고찰하고 연구하라고 범례에 명시하였고 또 원문에 다시 이를 수차례나 강조 하였다 .

즉 아래 (주)와 같이 『원파계도는 망매(茫昧:흐리멍덩하여 확실하지 않음)하여 알 수 없다. 여기 원문그대로 실어두어 후일 고구(考究)에 대비한다』고 했다.

그리고 또 그 문건을 전달한 류용수(柳龍壽)라는 사람에 대하여도 역시 계대(系代)가 불확실하여 가정보(嘉靖譜)에도 오르지 않은 사람으로 명시, 원파록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 후손들은 깊이 성찰하지 못하였다.

▶주; *源派之圖雖似茫昧難知而姑存之以備後考

* 柳龍壽則子孫失其世系而亦不載大譜無乃與柳智源論源派者乎- -

          1689년 기사보 범례-

그리고 또 『월파록 본문에 내 이미 서문에 말하였어도 그 자세함이 다하지 못한지라. 고로 이에 始末을 기록하여 후일의 고람을 대비하노라』고 재차 강조하였다.

☞ 주......余旣弁首未盡其詳 故玆記顚末以備後日之考覽焉..... - 원파록원문 중-

기사보 편찬자가 제기한 의문1.

_원파록에서 발췌_

강남보의 代數는 의혹이 있다. 王受克으로부터 廉에 이르기까지47세라 하였는데 강남보를 보면 29세라 하였음. 그러면 대저 受克은 周武王원년 기묘에 東來하여 八條를 펼 때에 敎民師士가 되었고 廉의 父 屹은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축성하자 축성하지 말라는 간한 기록이 있은 즉 周武王 己卯로 부터 동주군 임자에 이르기까지 무려 874년이 되고 진시황 32년에 장성을 쌓았으니 즉 그간의 歷年이 9백유여년에 불과하니 900여 년 간이 어찌 47대만 되는가? (一代를 30년으로 계산하면47*30=1410년이 된다) 古家文獻을 살펴보니 대수가 맞지 않아 믿지 못할 것이요 강남보계가 세세상승 29세라 적고 있으니 이 또한 믿을 수 없다.

기사보 편찬자가 제기한 의문2;

柳夢寅은 어찌된 사람인지 알지 못하거니와 군수 車軾비명을 찬 할제에 車濟能이하 21세의보계는 徐,鄭,金3인의 야사와 이예장의 소주(小註)를 인용했다고 그 근거는 제시했어도 諸本의 名字가 많이 부동하고

또 車甫傳이상으로부터 車無一에 이르기까지 16세보계인즉 어느 때 어느 누구의 기록인지 알 수 없고, 차무일로 부터 王受克에 이르기까지는 諸本의 기록된 代數가. 또한 같지 않은 데가 있다.

이예장도 선현의 출처에 자상하지 못함을 한탄한바 있었다..

기사보 편찬자가 제기한 의문3. ;

원본에 이르기를 祖明이 劉累로 더불어 평양에 같이 왔고 受克에 이르러 비로서 箕子를 섬기었다 함은 柳智源의 기록이 같은 데 柳夢寅이 인용한 야사는 「濟能은 유루의 후손이요 그 조상이 東으로 왔다고 말하여

일설은 祖明의 자손이라 하고 일은 劉累의 자손이라 하였으니 조상이 다르고 」,

또 2설은 가히 得失을 밝힐 수 없다.

또 東來한 사실이 어긋났는데도 그 기록을 말단에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후학들의 참고하는데 도움을 주고 저 합이라

..若元本旣云祖明與劉累俱來平壤至 受克始事箕子 柳智源所記亦與此同 柳夢寅所引鄭知常野史乃稱濟能之後 而其先與箕子俱東云 三以祖明之後 一以劉累之後 二說之得失無從可明印來之蹟隨而差焉 亦不得不錄於末端庸備參考耳 大抵柳氏之源最久 而吾東方文獻不足 雖國家事實亦多疏略 則 私傳譜系安保其無所差訛... (己巳譜載 原派錄中 抄)

기사보 편찬자가 제기한 의문 4.

또 가히 제사에 상고할진대 柳希潛공이 편수한 대보(嘉靖譜를 말함)의 기록에 조금도 보이지 안이 함은(대승공 이상의 황제헌원까지의 변천된 상계를 말함) 어찌된 일인가? 생각하건데 그때에 聞見이 미치지 못하여 그런 것 일까? 라고 스스로 의문하고는 만약 得姓하기 전의 기록이 멀고멀어 자세히 알기 어려워 소흘이 한 것이리라. 이는 멀고 먼 화주의 풍자를 피하지 않고 가만히 傳記의 믿음과 전기의 의문의 의의를 족보 머리에 붙여 두어 후일 군자를 기다리노라

주-.亦可考信於諸書 而抑希潛撰述大族譜時不少槪見何歟 抑無乃伊時 聞見有所不及 而然歟 若謂之在於得姓之前杳漠難詳以不之記焉 則기不然也 昔屈左徒離騷太史公自序皆先陳其所自出 何嘗以其世代之杳漠難詳以忽之也 ...竊附於傳信傳疑之義弁之族譜之首以俟後之君子.

(己巳譜載 原派錄中 抄)

 

기사보편찬자가 제기한 의문 5.

 

-王,車,柳,三姓이 과연 同祖異姓이가 -

....원파록기사에 의하면 중국黃帝로부터 시작하여 夏禹氏의 13세손 왕조명에 이르러 조명이 유루와 함께 동으로 와 평양 一土山하 은거했는데 그 후손 왕수극이 箕子를 스승으로 섬기었다. 受克의 33세손이 王蒙이다. 『一土山下 草家者王矣』라는 참설(讒說)에 따라 세 번 변성하니, 곧 王에서 田으로 ,田에서 申으로, 申에서 車로, 세 번 변성하여 車씨가 되니 즉 王蒙이 車無一이 된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태조가 되니「 왕몽의 세 째 아들이 王式인데 이가 곧 고려 왕건태조의 선조라 하고 그 비결이 此派에 適中했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런데 차씨로 변성한 차무일의 7자는 琳(一諱 神乙)이 있다 琳의 31세손이 車承穡이요 변성명하여 柳穡이 되었다. 류색의 장자는 恭叔이요. 次子 恭道인데 逃入江南하여 複姓王氏라고 간략한 기록이 전한다. 그런데 어느 근거에 의해서인지 왕건의 선조가 王式의 후손이 아니고 차무일의 7자인 림의 후손 차공도恭道(복성하여 왕공도)후손이 되었는지가 명요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다. 개성왕씨 족보에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고조(高祖)라고 1993년 왕씨 족보에 기제 3자 王式의 후손이 아닌 7자 琳의 후손으로 1100년 만에 바꾸어 놓았다.

중국성보관련기록을 살피면

그런가하면 중국의 華夏氏叢書에 의하면 고려태조 왕건은 영주왕씨에 기원하였다고 적고 있고 또 中華氏姓通書에는 북방의 蘚卑族 簁王國에서(BC108년)기원된 拓王氏의 후손이라고 기록하였다 즉 왕건태조의 선계를 믿을 수 없다

주; 三改車氏卽無一也 第三子王式時卽高麗太祖王建之先祖 其讖應於此派也. 第七子曰琳卽神乙也 琳之31世孫車穡 初上大等彦昇弑哀莊王自立 穡謀復讎事敗逃竄. .... 改姓柳穡之五世孫曰 車達....

 

기사보편찬자가 제기한 의문 6.

차*류 가 아니고 류*차다

원파록기사 및 설원기중 성삼문 주 및 최항의 주에 柳車라고 기록하여 柳를 먼저 쓰고 車를 다음에 섰다. 그런데 어찌하여 병진보의 원파록에 柳車가 車柳로 선후가 바꾸어 적고 있는가?. 이미 차류대종회가 조직하여 종친활동을 하고 있어 영향을 받은 것일까? 차씨의 주장대로라도 설원기가 세조왕명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면 이는 국가의 문서요 즉 왕명이다 .왕명을 봉교한 성삼문 최항 박팽년이 작성한 주(註)에 柳車라고 적었으니 그대로 따라 적어야 옳지 않은가? 잘못된 작명이다.

▶주= 雪冤記成三問註왈 ...河崙等俱以 車門近孼嫌車原頫直書族譜 盡焚蕩柳車二姓同源之世系

海州神光寺..../泰景七年丙子 즉 世祖二年刑曹參判 朴彭年撰車原頫雪冤記而 崔恒申叔舟成三問等奉교 註曰柳車新羅本系云云.. /崔恒註曰此謂麗宗室子孫一端譜系也 柳車同源之大系雖已焚蕩....柳車大系....-원파록 및 차원부 설원기중에서-

 

또 일반적으로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고조가 류씨라면 그 후손은 당연히 류씨가 되는 것이 맞지 않은 가?

왕건태조의 명에의 하여 차성을 복성하여다 하여도 류씨에서 차씨로 변성한것이 사실 아닌가?

그렇다면 효전의 본성은 류씨가 아닌가?

기록대로 볼때 류씨에서 차씨로 변성한 것이다. 그럼으로 아버지, 할아버지, 그 이상 6대조부터 변성하여 사용한 조상의 성을 먼저 써야하는 것이 옳치 않는가?

큰아들이 차씨로 복성하였다하여도 이는 왕명으로 복성한 것인 즉 류에서 차로 변성한 것이요 당연히 효전은 차씨의 시조가 된다.

그런데 1964년 차류대종회를 창립할 때 어찌하여 柳車大宗會가 아니라 車柳大宗會라고 이름을 지었으니 그 시말이 의아스럽고 개탄할일이다.

참으로 신중하지 못한 과오가 욕급선조(辱及先祖)가 되었음을 개탄하는 바라.

가사 설원기내용을 그대로 인정하고 보더라도 아버지할아버지가 柳氏이고 하물며 5대조에서 柳로 변성하여 柳로 내려왔고 류차달의 장자가 孝全이라 했으니 당연희 柳車大宗會가 맞지 않은가? 車효전은 류씨에서 차씨로 변성하여 분파 한 것이다 .

류문의 기사보 原派錄과 차문에서 발행한 車原頫雪冤記중 류차달과 차효전의 기록의 상이점

류씨에서 차씨로의 변성과정과 공적등에 관한 기록의 차이점

 기사보에 실린 원파록 원문

승색은 또 고려개국공 류차달 五世 조이다 양곡을 운반한 공으로서 특별히 차달의 이름을 주었다. 그 뜻의 으뜸은 웃 조상 본성을 잊지 않으려 함이요 그 아들 효전은 전자가 생자가 된 것이니 별도로 성씨를 주었으니 그 장자로서 상조의 홍렬을 있고 저 함이라 또 차달의 본성의 忠貞의 意志을 나타냄이라

하였다

⃚⃚▷ 원파록 원문*

承穡又麗朝開國公柳車達五世祖也 雖以運糧之功 特贈車達之號 原其意則 不忘上祖之本姓也 其子孝全 全字爲生字別賜姓氏以其長而承襲上祖之弘烈也 又顯車達本氏忠貞之志也 車達初名海 其父普林........이예장 봉 교주

 

차문이 발행한 설원기

그런가하면 차문이 1999년에 발행한 차원부 설원기에 의하면 부자간의 공적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성삼문 봉교 주에서

「사간원좌정언차원부는 문성인 류차달의 첫째 아들 대광지백효전의 후예이다 차달은 고려의 병력을 수송하는 일에 열심히 근무하였으며

효전은 임금을 섬김에 곡식이 없을 때에 흥원에서 구제의 곡물을 실어 나름으로써 현릉(고려시조의 묘호)의 정사에 공을 세웠다

나라를 위하여 실을 수 있는 수레와 양곡을 변통하여 줌으로써 남쪽을 정벌할 때 쌀을 수송하였다고 하여 특별히 그 아버지에게 차로써 달성한 공으로 세적의 칭호를 내리고 별도로 차씨 성을 내리었다

이에 따라 효전은 首功을 세운 성씨라는 것으로 표창하였으며 천호의 식읍을 봉하고 이어 연안의 땅을 관향으로 삼도록 하였으니 효전은 귀족의 집안이요 원부 또한 대대로 드러난 명문세족의 후예이다」

 

차원부설원기;

成三問奉敎註 司諫院左正言車原頫文城人柳車達第一子大匡之伯孝全之後也

孝全一名孝生 右加一劃爲全字 全字爲人王之故不幸於邪人之讒說 又不幸人王之時讖史滅其行蹟現在于內史徐熙家歷言正言者 康獻命起特拜諫官之意今此發現而使聞于後意也 臣崔恒臣成三問等奉 敎註

車達之於丁麗室 輸勤之日孝全之於當王事 靡鹽之時輿興原賑貸之粟樹顯陵定社之勞 顯陵者高麗始祖墓號也 定社者開國而定宗社之功也臣崔恒奉 敎註

國以爲辨出車乘繼粮道運米征南特贈其父以車爲達世績之號 別賜車氏以表孝全首功之姓而以食邑千戶之封仍宗籍延安之地 孝全仍穿耳雕靑之後原頫又連軒世族之裔也 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같은 왕명설원기인데 1689년 최초 세상에 나온 기록은 대승공류차달의 군양을 운송한공으로 특별히 차달이란 칭호를 주었고 그 뜻은 상조의 本姓을 잊지않게 함이라했고 그장자에게는 별도로 사성하여 웃대조상의 홍렬을 있계했다고 했는데

1999년 간행한 차원부 설원기에는

차달은 고려의 병력을 수송하는 일에 열심히 근무하였으며

효전은 임금을 섬김에 곡식이 없을 때에 흥원에서 구제의 곡물을 실어 나름으로써 현릉(고려시조의 묘호)의 정사에 공을 세웠다

나라를 위하여 실을 수 있는 수레와 양곡을 변통하여 줌으로써 남쪽을 정벌할 때 쌀을 수송하였다고 하여 특별히 그 아버지에게 차로써 달성한 공으로 세적의 칭호를 내리고 별도로 차씨 성을 내리었다

이에 따라 孝全은 首功을 세운 성씨라는 것으로 표창하였으며 천호의 식읍을 봉하고 이어 延安의 땅을 관향으로 삼도록 하였으니 효전은 귀족의 집안이요 원부 또한 대대로 드러난 명문세족의 후예이다」

즉 기사보 원파록에는 아버지의 공으로 장자에게 차성을 사성하여 상조의 홍렬을 잇게 하고 차달본씨의 忠貞之志를 현창하게 함이라 했는데

차문의 설원기는 효전의 공으로 아버지가 차달의 사호를 받은 것으로 효전은 곡식을 실어 나르고 약곡을 빌려줌으로고려건국에 큰공을 세웠다고적고 이어수공지성으로 찻정을 하사하고 천호만읍을 봉해 영안을 관향을 하게되었다고 적었다 즉 아버지의공으로 아들이 귀하게 된것이 아니라 아들의공ㅇ,로 아버지가 오히려 훈공을 받은 것으로 격하 날조하고있다.

孝全의 공적이 유용수가 적은 기록에 누락인가. 아니면 공적기록을 옮겨 적지 않음인가. 또 아니면 異本이 있어서일까. 혹 후일 改作 添書한 것은 아닐까】】

*********************

 

차원부설원기가 위서(僞書)라고 보는 근거(二)

 

1. 車柳가 同祖異姓이이라는 『왕명차원부설원기』의 虛와 實

차류가 동조이성이라는 原初的근거문건은 세조2년(1456년)에 세조의 왕명으로 제작

된 『차원부 설원기(車原頫雪冤記)』이다 柳씨는 車씨로부터 변성하여 得姓 되었고 車씨는 王씨로부터 王씨는 姒씨로부터,姒씨는 姬씨로부터. 중국 전설속의 황제인 軒轅씨까지 상계를 일목요연하게 연결하였다. 우리나라의 선원록 및 각 성씨의 족보나 중국의 수많은 성시의족보도 상계를 황제까지 이어 계대를 기록한 것을 볼수 없다. 황제헌원은 전설적 인물이다.

그리고 신라 애장왕시 승상을 지낸 차승색이 애장왕을 죽인 헌덕왕을 복수하려다 미수에 그쳐 류씨로 변성하게 되고, 그 6세손이 대승공 류차달이되며 그 장자가 차車孝全이요 차자가 류효금이라는 내용을 적고 있다.

2. 기사보(1689)의 범예에 『왕명차원부설원기』에 근거한 원파록 기사가 망매해서 알수 없다고 명기

우리문화류씨 역대족보를 거슬러 찾아보니 1689년 문화류씨 기사보(己巳譜)를 편찬할제 차원부 설원기에 근거한 소위 원파록(源派錄) 기사를 처음 다루었다. 처후시는 이 기사를 등재하면서 많은 의문을 전제하고 후일 후손들은 더 고찰하고 연구하라고 범례에 명시하였다 . 즉 아래 (주)와 같이 『원파계도는 망매(茫昧:흐리멍덩하여 확실하지 않음)하여 알 수 없다. 여기 실어두는 것은 후일 고구(考究)에 대비함이라』 했다. 그리고 또 그 문건을 전달한 류용수(柳龍壽)라는 사람에 대하여도 역시 계대(系代)가 불확실하여 가정보(嘉靖譜)에도 오르지 않은 사람으로 명시, 원파록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 후손들은 깊이 성찰하지 못하였다.

▶주 *源派之圖雖似茫昧難知而姑存之以備後考

* 柳龍壽則子孫失其世系而亦不載大譜無乃與柳智源論源派者乎- 1689년 기사보 범례-

그리고 또 『월파록본문에 내 이미 서문에 말하였어도 그자세함이 다하지 못한지라 고로 이에 시말을 기록하여 후일의 고람을 대비하노라』

▶ 주-......余旣弁首未盡其詳 故玆記顚末以備後日之考覽焉.....- 원파록원문중

리고 우리 문화류씨는 영락보 이후 10여 차례의 대동보와 수십차례의 파보를 편수하였지만 차효전(車孝全)이 대승공의 큰아들로 기록된 곳이 없다는 사실이다.

3. 1830년연안차씨 족보서문을 지은 류정양( 柳鼎養) 공도 차류동근애 이의를 표시했다

연안차씨경인보서문(庚寅譜序文-1830순조30년) 을 전주류씨 류정양柳鼎養(嘉善大夫行龍讓衛副護軍 兼同知經筵事) 씨가 지었는데 그는 서문에서 ⌜차씨와 류씨가 함께 고려조대승 휘 차달을 비조로 하고 있다. 나는 전주의 류씨이다 고려조이상은 중간에 보계를 잃어 증거 할 수 없다. 대승공의 후손이라 하는 것은 특히 전함에 의심이 있을 따름이다. 훗날 이로써 병이 되리라 이제 차씨의 보를 보니 헌원으로 부터 비롯하여 상하 수 천년으로 기록이 심히 가추어 졌으니 가히 공경할만하기도 하고 기이 하기도 하다⌟고 걱정어린 술회를 하였습니다.

주『車與柳 俱以麗朝大丞諱車達 爲鼻祖 余全州之柳也 中佚譜系 麗以上無徵焉 其謂大丞之後者 特傳疑而已 嘗以是病之 今觀車氏之譜 自軒轅始 上下數千年 記載甚備 可敬亦可異也』

ㅡ차씨 경인보 서문 중-

 

4. 차문에서도 위서僞書라고 이의제기한 설원기

 

강남왕계변위록(江南王系辨僞錄)

더욱 경이로운 사건은 이제까지 알고 있던 원파록 내용이 차씨문중에서도 이미 진위에 대한 시비가 예ㅛ날 부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순조(純祖) 12년(1812)에 곡성(谷城) 차헌기(車憲基)라는 사람이 이익을 챙길 요량으로 계책을 교묘하게 꾸며 왕계(王系) 57世를 위조(僞造)하고 선세(先世)에 근거 없는 사적을 억지로 갖다 붙여 허위의 보책을 만들은 것이라는 내용의〈강남왕계변위록(江南王系辨僞錄)〉을 작성 차문종원에 널리 공개했고, 이 주장을 제기 법적시비까지 있었다는 기사가 연안차씨강렬공파보(延安車氏剛烈公派譜)의 문헌편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유주춘추2005년간 000페지 전문 게재)

 

5. 왕조실록 중 차원부의 이름은 물론 억울한 사연의 설원기록이 없다

설원기는 세조 2년(1456)에 왕명으로 차원부의 억울한 죄를 설원됐으며 동 설원기 동년에 만들어 진 것이라 되어있으나 왕조실록 세조실록에 가운데서 설원기록은 물론 차원부의 성명마저도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고려사에도 차원부의 이름은 물론 유사한 기록이 없다.

 

6. 세조실록편에 차원부설원에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차원부의 억울한 사연이 실록에 기록으로 나와야하고 설원을 하려면 대신 누군가의 설원상소가 있어야 한다. 이어 경연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되어야하며 왕이 합당하면 설원을 명하는 것이 절차일 것이다. 이와 관련 경연에서 이루어진 기록이 분명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이런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설원은 요즘의 대통령이 행하는 사면형식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럼으로 왕명에 의해 이루어진 차원부설원기라고 볼 수 있을 까요?

 

7. 차원부설원기는 간행될 때 마다 제목이 다르고 내용도 수시 수정되었다.

세조2년에 설원된 차원부 설원기를 252년 뒤인 숙종 무자년(戊子:1708)에 차문에서 발행한 것이 평산판 이다, 이해는 즉 연안차씨대동보를 처음 간행하던 같은 해였다. 이어 1768년(戊子) 순천판, 1781년(辛丑) 서흥판, 1791년(辛亥) 순천판이 10여년 간격으로 이어 나왔고,

1998년 말 연안차씨대종회에서 차원부설원기 국역본을 발간하였다. 이로서 차원부설원기의 전편을 접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발간할 때마다 내용을 계속 고친 흔적이 있습니다. 특히 무자년에 연안차씨대동보에 실린 설원기 내용은 그보다 19년전 발간된 우리 문화류씨의 기사보(己巳譜)에 실린 최초의 설원기 내용과 현저히 다르다.

어떻게 왕명에 의해 작성된 국가문서라면 이렇게 출간할 때 마다 고칠 수 있습니까? 설원기는 왕명의 어보가 찍힌 국서임으로 일자일구(一字一句)도 고칠 수 없으며, 개인이나 집단이 자기에 유리하게 조작할 수 없다.

 

8. 응제시應製詩는 아무나 짓는 것이 아니다.

벼슬을 한일이 없는 白頭나 初試의 등제인물 또는 문과에 급제한 초임의 약관에게 까지, 심지어 3살짜리 어린 애기인 남효온에게까지 글을 지어 올리라고 어명을 내렸다는 것은 語不成說이다. 그 당시 정치, 행정 문화등 제도에 비쳐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9. 세조정권의 청치혼란기인 세조2년에 차원부를 설원했다는 시점에 대한 의문점이다.

차원부를 설원했다는 세조 2년은 국정혼란기였다 세조가 단종을 밀어내고 강압으로 왕위를 찬탈한 어수선한 때였다 응제시를 지은 상당수의 인물이 단종복위 운동에 가담하여 세조2년에 6-7월에 처형당했거나 일부인사는 세조정권을 등지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피신한 분들이다. 하필이면 이때에 사면을 명하고 이분들에게 응제시를 지어 올리라고 왕명을 내리었을 까도 의문이 든다.

대부분의 신하들이 단종 복위운동으로 파직되었거나 처형되고 또는 파직되거나 사직 은둔했을 당시이다.

 

10. 세조2년6월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거열형등 극형에 처했거나 귀양을 가는등 정치적 혼란기였다. 이난국에 하위지가 48명의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걸로 되어있습니다.

설원기에는 48명이 지은 72수의 응제시를 69세인 노 신하 하위지가 주석을 달아 서문을 지었다 즉 하위지가 48명의 응제시 한수마다 시구 하단에 하나 하나 주석을 했다. 그러나 하위지는 단종복위 운동으로 영오의 몸이 되었고 거열형의 극형에 처했다.

( 崔恒,申叔舟,成三問,李碩亨,姜希顔,姜孟卿,兪鎭,朴彭年,李禮長,鄭麟趾

, 權擥,李塏,尹子雲,李諴長,黃孝源,元孝然,尹士昐,姜希孟,韓繼禧,李叔琦,

權攀.沈澮,柳誠源,魚世謙.梁誠之,盧思愼,李恕長,金礩,李淑瑊.鄭昌孫,

李克堪,李克墩,李季甸.韓確,黃守身,徐居正,洪達孫,朴元亨,具致寬,李克增,

李克培,李克均,李陸,洪應,尹弼商,洪裕孫,金國光,南孝溫 계48명)

 11. 응제시를 지은 인물 중 직접 응제시를 지었다고 보기 의문이 드는 인물

개인 약사 고찰

남효온(南孝溫)
남효온은 당시 3살의 유아였으니 왕의 응제시를 명받을 나이가 아니었고
〖 (1454∼1492(단종 2∼성종 23))

박팽년

세조를 '나으리'라고 부르면서 끝내 뜻을 굽히지 않다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옥사했다.
얼마 후 아버지 중림, 동생 대년(大年), 아들 헌(憲)·순(珣)·분(奮) 등 3대가 처형되었으며, 어머니·처·제수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의 가족으로 노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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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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