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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기현(柳基賢)


류기현 柳 基 賢

<류기현 : 字 君弼, 號 老雲, 1890.11.9~1949.3.30, 爲先人, 忠景公派 : 大丞公 31世>

노곡공(老券公) 동수(東秀)의 10대손이요, 상구(相龜)의 손자요, 문로(汶魯)의 독자로 부여군 세도면 청송리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김해김씨 태현(泰顯)의 따님이다.

어려서 선비의 집안에 태어나 천품이 영오(英悟)하고 인후독실(仁厚篤實)하며 효성이 또한 지극하여 일찌기 3세에 부친을 여인한을 지극히 통탄하여 마지않았다.

편모의 자애(慈愛)로 성장하면서 세번 이사하며 글을 배우니 맹자의 모친의 뜻과 같고, 공 또한 천부의 성품으로 사친(事親)의 도리를 다하였으니 이를테면 밤에는 이부자리를 깔아드리고 따습고 서늘함을 살피고, 나갈 때 고하고 돌아와 뵈오며 항상 즐기시는 바를 물어 봉양하고 심지(心志)를 즐겁게 하니 비록 나이는 젊었으나 증자(曾子)익 효성과 다를 바 없었다.

원래 선조로부터 대대로 충효를 가업으로 삼아 전승해 온지라 공이 21세에 한일합방의 경술국치(庚成國恥)를 당하여 위국단성(爲國丹誠)으로 의분통탄(義憤痛嘆)하고 이로부터 남과 더불어 희락(喜樂)하지 아니하고 국사(國史)를 탐독하며 모선계술(慕先繼述)에 정성을 다하였다.

일찌기 선조 묘역과 위토 일체를 종인(宗人)의 불량으로 그 실권을 잃고 여러해 동안 향사(享祀)치 못하고 있었으나 집안이 넉넉치 못하며 이를 복구하지 못함을 심히 근심한 나머지 묘소에 올라가 피를 토하고 통곡하며 밤을 지샘이 여러차례이며 근심으로 10여년을 지내다가 독실히 기도(企圖)하여 옛 구역을 복원하니 비곡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어도 이후로 세사(歲祀)를 봉행케 되니 종당(宗黨)에서 “어찌 봉선(奉先)하는 탄성(殫誠)과 보본망극(報本罔極)하는 충심이 아니면 그 누가 이를 능히 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우리 문중의 심히 다행한 일이니 누가 깊이 감흠(感欽)치 않으리오”하였다.

만년에는 더욱 수기치가(修己治家)에 힘쓰며 아들을 의방(義方)으로 교도하고 시우(詩友)와 더불어 소요자적(逍遙自適)하니 향당(鄕黨)이 “속세의 선사(善士)”라 칭하였다. 별세하시니 묘를 세도면 청포리 천동 등산 15-2간좌에 모셨다.

배위는 한산이씨 준직(俊稙)의 따님이요, 슬하에 2남을 두니 장남 인혁(寅赫)은 임천향교 전교(典校) ․ 문화류씨대종회 고문이요, 2남은 인섭(寅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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