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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인봉(柳寅鳳)



류인봉 柳 寅 鳳

<류인봉 : 字 朝卿, 號 月山, 1912.2.19~1969.9.23, 車亞日報 林川支局長, 獨立運動家, 訓學者,忠景公派 : 大丞公 3世>

노곡공(老谷公) 동수(東秀)의 11대손이요, 계은공(溪隱公) 면로(冕魯)의 손자요, 후곡공(後谷公) 기홍(基洪)의 1남 1녀 중 독자로 부여군 장암면 지토리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한산이씨(韓山李氏) 명구(明求)의 따님이다.

일찌기 어려서부터 총명(聰明)이 뛰어나 조부로부터 학문을 수업하여 투철한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해방을 이룩하기 위하여 언론계에 진출, 동아일보 임천지국을 경영하면서 독립지사 류기섭(柳基燮), 이호철(李戶喆), 강일(姜日)등과 “부소회”(扶蘇會)를 조직하고 자신은 선전책의 임무를 맡아 여의사(如意思)라는 구호를 지어 신호로 대신하며 활약하던 중 1936년 왜경에 체포되어 감옥에 갖히었다.

그해 윤 3월 16일 모친상을 당하여 지방 유지들의 진정과 신원보증으로 풀려나 장례를 마치고 한때 두문불출하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에 이호철, 강일과 함께 사숙(私塾)을 개설하고 청년들을 훈학(訓學)하며 민족정신과 배일사상을 주입시키고 “한성은 내고향 님이여 속히 오소서”라는 구호를 아침 인사로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구호가 배일사상 구호라는 밀고를 받고 다시 체포되어 법정에서 2년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훈학을 계속함으로서 항상 요시찰인물로 감시를 받으며 지내오다가 드디어 해방을 마지하였다. 59세를 1기로 별세하니 묘를 세도면 화수리 사동 조부 묘하에 모셨다.

그후 인근 유지들과 문하생들이 공의 우국충정(憂國衷情)녈 기리고 그 유업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공이 사시던 성흥산(聖興山) 밑에다 송모비(頌慕碑)를 세우니 『공의 인품과 사상은 후세에 밑거름이 되어 길이 빛나리라』하였다.

배위는 풍양조씨(豐壤趙氏) 동길(東吉)의 따님이요, 후배는 전주이씨(全州李氏) 만제(萬濟)의 따님이다.

슬하에 5남을 낳으니 장자 응렬(應烈)은 금성공업사 대표이사요, 2자 공렬(公烈)은 사무관으로서 서울시교육위원회에 재직중이며, 3자 방렬(芳烈), 4자 오렬(旿烈), 5자 도렬(道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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