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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몽정(柳 夢 鼎 )
 

류 몽 정 柳 夢 鼎

 

<류몽정 : 1527 ~ 1593 : 宣祖朝 文臣. 大빙公 19世 : 夏亭公派 >

 

자 경임(景任). 호 학암(鶴巖).

예조참판 맹문(禮曹參判 孟聞)의 5대손이요 사헌부감찰 용량(司憲府監察 用良)의 3자로 중종(中宗) 22년 丁亥 10월 5일 충주(忠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스스로 학문에 힘쓰더니 41세 되던 명종(明宗) 22년 丁 (1567)에 사마 양시(司馬 兩試)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음사로 사포서별검(�諒��)에 제수되어 의금부도사(義禁莩事) · 주부(主簿) · 사평(��)을 역임하고 선조(宣祖) 5년 壬申(1572)에 모친상을 당하여 복제를 마친 후 7년 甲成(1574)에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재직 중 문과(文科)에 급제하니 당시 나이 48세였다.

10년 丁丑(1577)에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전직되고, 12년 己卯(1579)에 승문원교리(承文院敎理)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온 후 예조정랑 (禮曹正郞) · 장예원첨정(掌禮院僉正) · 예빈시판관(禮賓侍判官) · 장흥고령(長興庫令) · 직강(直講)을 두루 거쳐 14년 辛巳(1581)에 영암군수(靈岩郡守)로 나갔다가 장단부사(長湍府使)로 옮기고 몇 달 안되어 다시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옮겨 정사를 잘 베풀었다.

17년 甲申(1584)에 내직으로 들어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거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하였더니 이듬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나갔었다.

20년 丁(1587)에 성균사예(成均司藝)에 전직되고, 그 후 내자시(內資侍). 내섬시(內贍侍)· 상의원(尙衣院) · 제용감정(濟用監正)을 두루 지내고 이듬해 산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옮겼다가 셩균사성(成均司成)에 체임되어 왕명을 받들고 평안도(平安道)에서 올라온 상소(上疏)를 점검하여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구언해 줄 것을 청하였다.

22년 己(1589)에 봉상시정(奉常侍正0을 거쳐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나갔다가 이듬해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및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다 사양하고 내직으로 들어와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가 되었다.

25년 己(1592) 5월에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들어가니 황조(皇朝)에서 영접하고 연희를 베풀어 술과 안주를 크게 대접하였다. 공께서 굳이 사양하고 마침내 울면서 말하기를 “군부(君父)께서 난리를 피하여 생사(生死)를 알지 못하는데 신자(臣子)로서 어찌 연락(宴樂)을 즐기겠는가?”하니 좌중(座中)이 모두 숙연하여 얼굴 빛을 고치었다. 그로부터 난리의 상황을 자세히 말하고 원병(援兵)을 청하여 울면서 여러 날을 그치지 않았다.

병부상서 석성(兵部尙書 石聖)이 감탄하고 이르기를 “그대는 진(晋)나라의 호언(狐偃)과 월(越)나라의 범려(范蠡와 초(楚)나라의 신포서(申包胥)와 같도다. ”하고 또 동국(東國)의 산천 형세와 병기군량등을 물었는데 공이 자세히 아뢰어 마침내 그 전황(戰況)이 황제(皇帝)에게 상달되었다.

동년 9월 환국(還國)하여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고 이어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전직되었더니 이듬해 2월 우승지(右承旨)가 되고 8월 선릉회장(宣陵會葬)시에 왕께서 해주(海州)에 머물러 계셨는데 공이 아뢰어 속히 환도(還都)하여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을 위로하실것을 간청하였다.

공이 아뢰어 행역(行役)에 피곤함을 보이더니 연안부(延安府)에 이르러 병이 더욱 악화되어 객관(客館)에서 돌아가시니 때는 선조(宣祖) 26년 巳 9월 5일로 향년 67세였다.

28년 乙未(1595)에 비로소 충주 고곡 선영 을좌(忠州 羔谷 先塋 乙坐)에 장례를 모셨으니 이는 당시 난리가 치열했던 때문이었다.

선조(宣祖)께서 공의 노고를 추념(追念)하여 이조판서(吏曹)를 증직 하였으며, 난리가 평정된후 선무원종훈(宣武願從勳)에 책록됨과 아울러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가증(加贈)되었다.

공은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 친환(親患)에 분뇨(糞尿)를 맛보고, 막상 상을 당함에 3년을 여묘(廬墓)하였으며 제사는 반드시 정결하고 넉넉히 행하며 백씨(伯氏)로 더불어 우애와 공경을 다하여 공무(公務)가 아니면 아침 저녘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일찍이 정여립(鄭汝立)과 한 마을에 살았었는데 마음속으로 못마땅히 여기고 한번도 찾지 않았었다.

마침내 정여립의 역변(逆變)이 일어나 종제 몽정(從弟 夢井)이 그에 연좌되어 참혹한 죽음을 당했으나 공은 홀로 무사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배위 예안김씨(禮安金氏)는 참봉(參奉) 응천(應千)의 따님으로 3남 1녀를 두었다. 장자 철(澈)은 백부 몽열(伯父 夢說) 후로 출계하고, 2자 영(泳)은 호 침계당(枕溪當)이니 장예원사의(掌隸院司議)를 지냈고, 3자 윤(淪)은 건원릉참봉(建元陵參奉)이며, 사위는 이보판서(吏曹判書) 의령남이공(宜寧南以恭)이다.

공의 묘갈명은 대제학 검재 검유(大提學 儉齋 金蹂)가 짓고, 비문은 좌의정 단암 민진원(左議政 丹巖 閔鎭遠)이 썼다.

※朝鮮王朝實錄, 人物誌, 幕碍銘, 號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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