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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차원부설원기 목판의 문제점 -류주환박사 글-

"차문절공유사목판"의 문제점

- 류주환, 2011. 4. 4.   


1. 서론

"차문절공유사목판"(이하 차씨목판)이란 "차문절공유사"라는 문헌을 찍어낸 목판으로서 현재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2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 목판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점에는 문제가 많아 필자는 2008년부터 지속적으로 그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차씨목판의 소개를 포함하여 그 동안 경과에 대해 간략히 요약하고, 다음으로 문제점에 대해 상세히 토론한 후, 마지막으로 맺음말을 제시한다.


2. 차씨목판의 현황과 경과

차씨목판에 대한 공식적인 묘사는 다음과 같다.

    ========================
    종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명칭: 차문절공유사목판(車文節公遺事木板)
    수량/면적: 53판
    지정(등록)일: 1999.07.05

    고려 말 조선 초의 충신인 차원부(1320∼1407)의 유고문집 『차문절공유사』를 정조 15년(1791)에 새긴 목판으로, 총 53매이다.

    차원부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당시의 대학자인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이름을 날리던 유학자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을 비판하였으며, 그후 숙적이었던 하륜이 보낸 자객에게 가족 및 일당 80여 명과 함께 살해되었다. 시호는 ‘문절’이다.

    나라에서 판각을 명령하여 국가기관인 운각(芸閣)에서 발행한 것일 뿐만 아니라 빠진 목판이 없고 중앙인쇄처에 판각하도록 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쇄사적으로 그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


이 목판은 당초 여수에 있었는데 2005년에 광양시 옥룡면으로 옮겼다. 그리고 2007~2008년경에 거액의 광양시 사업비와 국비를 들여 목판 보존각(보호각)을 세운 것으로 파악된다.

보존각에는 거액의 세금이 들어간 것이 확실해 보이는데, 어찌된 일인지 지방자치단체 홈페이지에서는 관련 정보가 전혀 검색되지 않는다. 또한 인터넷의 다른 곳에서도 관련 설명도, 사진 한 장도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보존각에 대한 상세한 내역은 행정공개를 요청해 놓은 상태이다.

광양시의회 사이트에는 2008년에 광양시 옥룡면 죽천리의 주민들이 보호각 건립을 반대하는 진정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2008. 6. 17.). 마을에 연고가 없는 이질적인 건물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그해 말의 광양시의회 회의록에는 주민과 차씨종친회 사이에 협의가 원만히 이루어졌다는 발언이 나온다(2008. 12. 4.).

필자가 광양시청에 보존각에 대해 2010년 중반에 공식적으로 확인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수 천 만원의 예산을 들여 추가 설비를 하는 계획이 잡혀 있었다.

한편, 2008년 후반기에 필자가 차씨목판이 담고 있는 문헌인 "차문절공유사" 곧 "차원부설원기"가 위서(僞書)요 악서(惡書)로서 우리 역사와 사회에 큰 해악을 끼쳐왔으므로, 유형문화재에서 해제해 달라는 요청을 전남도청에 제출하였다. 전남도청에서는 그에 대한 회신(2008. 12. 26.)을 통해, 필자의 요청을 기각하였다. 그 이유로 명기된 것은 다음과 같다.
    "차문절공유사목판은 조선시대 국가 기관인 운각에서 판각한 인쇄사적 가치를 평가하여 목판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으로, 지정해제 사유에는 해당되지 않음."

필자는 당시 외국에 연구차 나가 있었기 때문에 위의 회신 공문은 몇 개월 후에나 볼 수 있었다. 그 후 대처를 여러 모로 궁리했지만, 업무로 인해 구체적인 대응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목판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파악하게 되어 다시 전남도청에 목판 관련 민원을 제기했고, 현재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차씨목판에 관련된 최근의 움직임 하나를 소개한다. 그것은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과 관련된 것이다. 최근 차문(연안차씨 문중)에서 차씨목판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려는 시도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실상을 확인해 본 결과, 정확한 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곧, 안동에 위치한 '한국국학연구원'이라는 곳에서 목판 관련 사업을 크게 진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각 지역에 퍼져 있는 목판들을 10만장을 목표로 수집하여 한 곳에 보존하고 연구 ․ 정리하여 활용하며, 궁극적으로는 세계기록유산 등재도 시도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연구원에서 기초조사로서 목판들의 현황을 조사 ․ 연구했는데, 그때 차씨목판도 포함되었으며, 현재로서는 차씨목판이 연구원에 기증된 상태도 아니고 향후 그럴 확률도 낮아서 등재 시도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을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세계기록유산에는 훈민정음, 팔만대장경, 동의보감 등 세계사에 미친 영향력이 큰 수 건의 문헌이 등재되어 있을 뿐으로, 만일 차씨목판이 그 시도의 대상이라도 된다면 세인의 비웃음을 받을 것이며, 국가 망신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이제 위의 차씨목판에 대한 묘사에 대한 토론을 중심으로 목판의 문제점에 대해 논해 보기로 한다.


3. 차씨목판의 문제점

차씨목판의 문제점은 목판 자체에도 있지만(상세한 것은 아래에 논함), 대개 그 목판이 담고 있는 문헌에 기인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소개했지만, 가급적 이 글이 독립적(self-contained)이도록 하기 위해 먼저, 다소 길지만 다시 정리한다.

(1) 위서이며 악서인 차원부설원기

차씨목판이 담고 있는 문헌인 "차문절공유사"는 원래 "차원부설원기", "차운암설원록", "운암선생설원록" 등의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데, 이하에서는 그 대표명인 "차원부설원기" 또는 약하여 "설원기"라 칭한다. 설원기는 서문, 본문(記), 응제시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책 자체에 서문은 하위지가, 본문은 박팽년이, 그리고 응제시는 48명이 지었다고 되어 있고, 본문의 주석자로 또 여러 명이 나온다. 모두 왕명을 받들어 지었다고 곳곳마다 명기되어 있으며, 지은 날짜는 세조 2년인 1456년 5월로 되어 있다. 바로 사육신변고가 일어나기 며칠 전이다.

내용은 차원부라는 인물이 선초(鮮初)에 억울하게 죽어 그 설원(雪冤)을 한다는 것이다. 그의 설원에는 태조에서 세조에까지 이르는 여러 왕들과 당시의 최상위층 신하들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적혀 있다. 그러면서 차원부의 가문인 차문(車門)의 시조의 내력과 그 전후의 계통이 적혀 있고, 차원부의 가계에 대해서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설원기는 식자도 그 진위를 잘 파악할 수 없게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고, 왕명이라 하여 권위를 최고로 높이고 있고, 그 저자들로서 집현전 학자들을 등장시켜 신뢰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충절을 강조하여 사실여부보다는 대의명분에 더 집착하던 시대에 전폭적인 수용이 가능케 만들었다. 그 결과 설원기는 사회에 널리 퍼져 사림(士林)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설원기라는 문헌이 저자들을 모두 조작해내고, 작성 시기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행적을 포함한 내용도 거의 예외 없이 꾸며냈다는 놀라운 사실에 있다. 이것은 일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이미 조선시대에 문인들(남극관(南克寬), 황윤석(黃胤錫), 이선(李選), 홍계희(洪啓禧), 하진현(河晉賢) 등)이 밝힌 것이다. 또한 이래에 언급한 바대로 "일성록(日省錄)"에는 정조와 조정에서 차원부의 행적을 믿을 수 없다고 밝히는 기사가 세 차례 나온다. 이는 곧 설원기 자체를 부정하는 내용이다. 또한 최근 학계의 연구자들이 다음과 같은 연구논문을 통해 설원기의 정체를 명백히 밝혔다.

    - 이수건, 이수환,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 대구사학, 86집, 2007년. "설원기는 조작된 위서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이 책은 편찬체제, 내용서술, 등장 인물들의 행적이나 序 · 記文, 48인의 應製詩 등 어느 것을 막론하고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 없다."

    - 김난옥, "여말선초 정치변동과 배타적 가문의식(家門意識) - 정도전을 중심으로", 고려사학회, 2007년, p.243-274. "설원기는 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위작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 박은정, "≪차원부설원기≫ 이본의 유통과 그 배경", 한국사론, 56권, 2010년, p.209-275. "위작자로 판단되며, 동시에 이 문건{차원부설원기}을 처음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차식, 차천로..." "설원기의 내용 중 {설원기가} 위작이라 판단할 확실한 부분은 무엇인지, 내용 중 문제가 되는 점을 간략히 지적해 보고자 한다." ({ } 부분은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필자(柳)가 보충으로 넣은 것.)

    - 류주환, "차원부설원기 비평", http://kenji.cnu.ac.kr/ryu/, (2005~). 위의 박은정의 논문에서는 여러 군데에서 이 글을 참고문헌으로 인용하고 있다. "설원기는 그 작성자를 알 수 없고 내용에서도 역사적 신빙성이 결여된 위서(僞書)로 평가된다."

참고로, 고(故) 이수건 교수는 영남대학교 교수였으며, 김난옥 박사는 현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전임연구원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박은정의 논문은 서울대의 2009년 석사논문을 정리하여 "한국사론"에 게재한 것인데, 노명호 교수가 지도교수였다. 학위논문과 학술논문은 전문가들의 심사를 통해 발표된다. 혹시 여느 한 사람의 주장이라면 그 신빙성을 의심할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몇 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렇게 일관된 결과가 나온 것은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고도 남는다.

"차원부설원기"는 오로지 한 집단의 내력을 거짓으로 꾸며내기 위한 목적으로, 저자들을 위조하고, 하륜 등을 비천하고 극악한 인물로 날조하고, 등장인물들의 행적을 조작하고, 역사적 사실들을 왜곡하여, 역사와 사회에 중죄를 지은 위서(僞書)이자 악서(惡書)이다. 단적으로 말해 주인공인 차원부 자체가, 현재 주장되는 그의 과거급제는 아예 당시에 과거도 실시되지 않았고, 관직도 꾸며진 것으로 판명되어(박은정, p.232, 238-239), 그의 행적이 위조된 것이 명백할 뿐만 아니라, 차원부의 실재조차 의심된다. 그가 받았다고 주장되는 '문절'이라는 시호도, "일성록"의 세 번의 거절이 바로 시호를 내려달라는 요청에 대한 것인 바, 완전 날조이다.

설원기는 문제점이 많아 일찍부터 위작이란 사실을 지적한 사람들도 있었는데도 지속적으로 간행되어 왔는데, 위에 제시한 박은정의 논문에서는 그 이유로서, 설원기가 유통시키는 주체와 그것을 읽는 주체들의 목적에 부합하였기 때문에 확대 ․ 재생산되었음을 설파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이미 언급했듯이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가 용납해서는 안 될 성격의 것이다. 설원기는 김난옥의 논문에서 이미 지적된 바대로, 오로지 한 집단을 높이려는 배타적이고 왜곡된 의식이 만들어낸 심각한 부정적인 결과이다.

설원기는 역사서의 형식을 띠고 있어 수 백년 동안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어 왔다. 성씨와 신분 관념의 심각한 혼란을 일으켰고, 차씨 자체가 신라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는데도, 차건신(車建申)이라는 신라시대 최고위층 인물과 부산 기장에 그 무덤이라는 차릉(車陵)까지 조작하게 만들었고, 역사를 왜곡시켜 각종 공사가(公私家) 문헌뿐만 아니라 현재 권위 있는 국사사전에조차 오류가 여럿 들어가게 만든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시 그곳에서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같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필자에게 공문을 통해 차원부와 관련된 주제어와 내용도 모두 찾아서 수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공문은 필자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설원기는 요즘 "고려선양회"와 "고려통일대전"의 정당성이나 가치마저 크게 훼손하고 있어서(행적을 믿을 수 없는 인물들이 다수 고려 충신으로서 봉안됨) 고려에 대한 역사인식마저 손상시키고 있는 등, 단순히 문헌 하나가 위서라는 사실로 끝나지 않는 심각한 문제점들을 계속 던지고 있다. 이것이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역사가들과 관련 연구자들의 관심이 더욱 요구될 뿐만 아니라,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도 관심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 중 하나이다.

(2) 목판 자체의 문제

필자는 학자적 양심상 거짓이 진실을 파괴하는 일을 알고도 지켜볼 수가 없어 설원기에 대해 세상에 널리 알리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 알게 된 이 설원기 목판이 문화재라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관계기관에 문화재 지정 해제 요청을 제기했었다. 그 요청에 대한 기각 내용은 위에 밝혀 놓았는데, 곧 차씨목판에 대한 공식적인 묘사에 의거한 것이었다. 이것이 1999년 7월에 문화재로 등록되면서 공고된 지정 사유로 판단된다. 여기서 그 공식적인 묘사의 검토를 통해 목판의 문제를 짚어본다.

우선 차씨목판의 명칭을 살펴보자. 이것을 보면 필자가 왜 '차씨목판'이라는 호칭을 계속 쓰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곧, 목판의 공식 명칭인 "차문절공유사목판"에서 '문절공(文節公)'은 차원부에게 내려졌다는 시호인데, 조작된 것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바, 바로 "조선왕조실록" 못지않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국보 "일성록(日省錄)"에 나온 세 차례의 "차원부설원기" 관련 상언(上言)에 관한 기사이다(정조 10년 1786년 9월 7일, 정조 11년 2월 6일, 정조 12년 4월 4일). 이 세 번의 상언은 모두 차원부의 시호를 내려달라는 요청인데, 정조와 해당관청은 "믿을 수 없다, 믿을 근거가 없다(無以考信)"라 하여 거절하고 있다. 이것은 차원부의 행적, 나아가서 "차원부설원기"를 모두 부인하는 것이라 평가된다. 또한 "유사(遺事)"라 함은 '죽은 사람이 남긴 사적'을 일컫는데, 차원부의 행적이 조작되었음이 이미 증명되었다. 따라서 목판의 명칭에서 '문절'도 날조요 '유사(遺事)'도 날조여서 취할 수 있는 것이 '목판'밖에는 없다. 따라서 이런 잘못된 명칭을 사용하면 안 되며, 더구나 국가기관에서 그 잘못된 명칭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가 제안하고 사용하는 명칭은 '차씨목판'이다.

차씨목판에 대한 공식적인 묘사에서 차원부 관련 부분은 모두 날조로서 제외하고 나면 남는 것은 차씨목판이 정조 15년(1791년) 새겨진 것, 총 53매로 구성된 것, 그리고 마지막 문단인 인쇄사적 가치에 대한 평가이다. 앞의 두 가지는 단지 현상적인 사실이라서 특별히 언급할 것이 없다. 그럼 지방문화재 지정의 가장 중요한 근거인 마지막의 '인쇄사적 가치'에 대해 고찰해 본다.

우선 편의상 그 부분을 다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라에서 판각을 명령하여 국가기관인 운각(芸閣)에서 발행한 것일 뿐만 아니라 빠진 목판이 없고 중앙인쇄처에 판각하도록 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쇄사적으로 그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이 문단을 분석해 보면 두 가지, 곧 빠진 목판이 없다는 사실과 목판의 인쇄가 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후자는 '나라에서 판각을 명령', ‘국가기관인 운각에서 발행', '중앙인쇄처에서 판각'이라는 내용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이것은 다시 '나라에서 판각을 명령', '운각에서 발행'이라는 두 가지로 정리된다. '운각'이란 말 자체에 국가기관과 중앙인쇄처라는 사실이 내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라에서 판각을 명령했다는 말도 운각이 공식 기관이므로, 운각에서 발행했다는 말과 통하는 말이다. 여기서 '빠진 목판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평가는 잠시 미뤄둔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목판의 역사는 길어서 차씨목판보다 더 오래되고 더 중요한 목판들도 많고 그것들이 모두 지방문화재나 국가문화재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 지적하면 충분하다. 이들 중에는 '문화재자료' 정도의 지위를 갖고 있는 것도 여럿 있다.

그렇다면 차씨목판의 '인쇄사적 가치' 중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국가기관인 운각(芸閣)에서 발행했다는 점이다. 곧, 차씨목판의 말미에는 "辛亥仲夏芸閣刊印"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그 근거이다.

 


여기서 '辛亥'는 1791년이고, '仲夏'는 계절이며, '刊印'은 새겨서 찍어냈다는 말이다. '芸閣' 그리고 관련된 '교서관'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운각(芸閣): 조선시대의 교서관(校書館)의 별칭. 운관(芸館) 또는 외각(外閣)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운각이라고 하면, 흔히 서고(書庫)또는 장서실(藏書室)을 뜻하기도 한다. 교서관은 경서(經書)의 인행(印行)·향축(香祝)·인전(印篆) 등을 맡았던 관아로서 태조원년에 창설될 당시는 교서감(校書監)이라고 했으나, 태종 원년에 교서관이라고 그 명칭을 바꾸었다가 정조 6년에 다시 규장각이라고 개칭했다.

    교서관(校書館): 조선시대 종이품아문(從二品衙門)으로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의 인쇄·반포와 향축(香祝)·인전(印篆)의 임무를 관장하였다. 1392년(태조 1)에 설치한 교서감(校書監)을 1401년(태종 1)에 개칭하였다. 세조 때 전교서(典校署)로 고쳤다가, 1484년(성종 15)에 다시 교서관(校書館)으로 복칭하고, 1782년(정조 6)에 규장각(奎章閣)에 예속시켰다. 그래서 규장각을 내각(內閣), 교서관을 외각(外閣)이라고 하였다. ([별칭] 외각(外閣), 운각(芸閣), 운관(芸館), 내서(內書), 비서(秘書), 전교(典校); [참고문헌]《대전회통(大典會通)》)

실제 "조선왕조실록"이나 "일성록"을 보면 '운각'이란 명칭은 영조, 정조 시대에 특히 많이 사용되었으며, 조선말까지도 계속 사용되었다. 그런데 차씨목판에 운각에서 발행했다고 적혀 있는 사실에 대해, 한국국학연구소의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목판의 말미에 芸閣에서 판각,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즉 이 책을 간행할 당시인 1791년에 운각은 이미 규장각에 흡수, 통합된 기구로, 과연 이때에 운각에서 간행된 책이 맞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남아 있다. 또한 운각에서 개인 관련 기록물을 판각한 예가 없는 것도 진위를 의심케 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
    (출처: http://mokpan.ugyo.net/ (장판각) > 영남의 목판 > 경남목판현황 > 합천 > 차문절공유사)

연구자들의 조심스런 표현방식은 대개 처음으로 사실을 지적할 때 사용되며, 이것은 과학이나 공학에서도 자주 있는 일이다.

비록 '운각'이라는 용어는 계속 사용이 되었지만, 현 규장각의 소장 책판을 조사한 연구를 검토해 보니("규장각 소장 책판의 현황과 가치", 김남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운각'을 간지로 사용한 책판은 18세기에 여럿이 있는데, 그 중 마지막이 1773년의 '어제준석년정동위관례문'이며, 19세기에는 내각, 춘방 등이 간지로 쓰였다. 이는 규장각이 1776에 설립되고, 1781~2년에 체재가 정비되었다는 사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차씨목판이 간행된 1791년에는 '운각'이라는 명칭이 간지에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당 목판은 차석주(車錫周)의 주도로 순천(順天)에서 간행된 것이다(박은정, p.228). 차문(車門)에서도 이 판본을 "정조 15년 신해(辛亥)의 순천판(順天板)"이라 부른다("국역 차원부설원기", p.7). 규장각의 기관으로서 '중앙인쇄처'인 운각과 이 사실은 부합하지 않는다.

이런 지적을 다 떠나서도, '운각'이 날조임은 이미 앞에 언급한 "일성록"이 증거한다. 곧 1786~8년에 세 차례나 차원부의 시호를 내려달라는 상언(上言)이 '믿을 근거가 없다'하여 명백히 거절되었는데, 이것은 해당관청의 품계를 받아 정조가 친히 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3년 후인 1791년에, 정조가 왕권강화의 수단의 하나로 야심만만하게 시작하고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규장각의 교서관('운각')에서 그 조작된 시호인 '문절공'의 호칭이 들어간 "차문절공유사"라는 문헌을 '나라에서 판각을 명령하여' 공식적으로 간행하였다고 주장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신빙성이 전혀 없는 어불성설이다.

덧붙여, 이 '나라에서 판각을 명령'하였다는 표현은 '운각간인'이라는 말 한 마디를 누군가 확대해석한 것일 따름이다. '나라'는 곧 '왕'을 의미하니, '정조'가 그랬다는 말을 하려고 한 듯한데, '왕명'을 도배한 설원기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묘사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차씨목판의 '인쇄사적 가치'에서 남는 사실은 "빠진 목판이 없음"뿐이다. 종합적으로 정리해보면, 목판의 공식적 묘사, 곧 지정 사유 가운데 취할 수 있는 것은 목판 자체에 관한 사항인 새긴 시기, 매수, 결판(缺板)이 없음 등의 목판 자체에 관한 사실뿐이다.

또한 설원기는 이본이 많은데, 차씨목판의 명칭에 들어 있는 "차문절공유사"라는 문헌만 해도 4종류의 이본(異本)이 있고, 그 사이에 상위점도 존재하여 혼란스럽다. 이 대목에서도 문화재로 지정된 특정한 목판의 가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4. 맺음말

결론적으로, 차씨목판의 가치로서 목판이 200년이 넘었다는 사실과 빠진 판이 없다는 사실만이 남는다. 지금에 와서 이런 맥락의 이해 없이, 혹시나 있을 인쇄사적 가치만을 앞세워서 무작정 중시되고 그 실체마저 숨겨진다면 거짓이 진실의 탈을 쓰고 민족의 정기를 해하는 심각한 형국이 아닐 수 없다.

차씨목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예를 들어, 일제가 우리 민족의 수탈에 이용한 건물도 문화재로 보호되어야 함은 이해를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반면교사로서 소중하기 때문이며, 그 자체로서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 문화재의 묘사뿐만 아니라 바람직하게는 명칭에도 그런 사실이 항상 따라다녀야 함은 실로 당연한 이야기이다. 차씨목판은 꼭 이와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것이 보호되어야 한다면 바로 거짓의 표본으로서이고 또한 역사에 오점이 끼어들어간 사실 자체로서이다. 지금도 개인적인 영달만을 위해 양심과 사회와 민족을 해하는 역사적 왜곡이 자행되고 있지 않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차씨목판의 가치는, 그런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에 대한 커다란 경계의 귀감으로 삼을 수 있음에 있다.

이상의 사실에 입각하면, 차씨목판에 대한 평가는 달라져야 하며, 그 문화재의 지위도 재검토되어야 할 절대적인 필요가 있다. 부득이 문화재로 남는다 하더라도 '문화재자료' 등으로 지정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며, 목판 관련으로, 이미 발생한 것으로 판단되는 바, 더 이상 거액의 혈세가 들어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그 실체가 목판에 대한 묘사(설명)뿐만 아니라 명칭에까지 반영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이 사안을 인지하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필자는 지방자치단체에 이런 취지의 요청을 제기하여 그 회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거짓은 또 거짓을 낳게 마련이다. 내력을 꾸미기 위해 조작된 위서 "차원부설원기"는 그 후에 많은 거짓을 낳았다. 그동안 '차릉(車陵)'과 '교지(敎旨)'가 그 대표적 사례였는데, 이제는 '목판(木板)'의 인쇄처 위조도 들어가게 되었다. 언제나 이런 오류가 우리 역사와 사회에서 말끔히 제거될 수 있을지, 막막한 심정이 든다.


                                                                           2011년 4월 4일 
       
                                                                                              彩霞 류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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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류주환박사의 글입니다.      우리 류문이 모두 읽어 옳바른 종사지식을 거져야하겠기에 이글을  필자 양해를 얻어 옮겨 슫는다.

싰습니다.
위작이 차원부설원기 목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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