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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영락보에 대한 고찰 - 류영렬글-

                

                   文化柳氏 永樂譜에 對한 考察

                                              문화류씨서울권종친회장 류영렬
                                      문화류씨대종회고문.한국성씨연합회고문
                                         전 성균관전학 .시인

서 론

문화류씨 영락보(文化柳氏 永樂譜)는 세종(世宗) 5년인 1423년 양도공류영(良度公 柳頴)이 편찬한 족보로서 문화유씨의 최초의 족보이다. 이는 또한 우리나라의 최초의 족보라는 것이 보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보책(譜冊)은 후손이나 타문 등 전국 어느 곳에서도 이제껏 발견되지 않아 접해 볼 수 없다.

다만 영낙보 서문만이 142년 뒤에 첨정류희잠(僉正 柳希潛)이 편찬한 문화류씨 가정보(嘉靖譜)에 실려 전해올 뿐이다. 혹자는 황해도 구월산 대승공(大丞公) 휘 차달(車達)의 묘하 재실에 소장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고 또한 해방 전 성묘 시 이를 직접 봉람했다는 후손이 생존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남북분단 이후 대승공 묘소를 성묘도 못한지 반세기가 넘도록 그곳의 근황을 전해 듣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북한은 조상에 제사도 지내지 못하게 통제하는 공산주의 치하에 이 소중한 보책이 이제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지 알길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는 이 영락보의 실체를 영락보 이후 54년 뒤인 1477년(成宗7年)에 간행된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와 성화보 이후 85년 뒤인 1565년(明宗 17년)에 간행된 문화유씨 두 번째 족보인 가정보를 통해 그 실체를 고찰해 보기로 한다.

족보에 대한 연혁과 의의

사람들이 족보를 만드는 목적은 혈연관계와 득성의 연원과 유래를 밝힘으로서 계대를 확실히 하고 崇祖孝親之心과 敦宗 愛族精神을 기록으로 남겨 종문의 영예를 후손에 전하며 慕先育英精神을 길러 선조의 공덕을 후세에 끼쳐 주자는데 있다. 그리하여 윤리도덕의 근본을 다져 사회질서에 순응토록 하여 미풍량속을 지키며 사람 답게 살아가는 도리를 밝히는데 있다 하겠다.

족보는 일찍이 중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왕가(王家)의 걔통(系統)을 적은 제왕년표로부터 시작되었고 한(漢)나라때 개인 가문에 대한 족보가 편찬되기 시작하여 그후 齊나라 시대에 매희경(買希鏡)의 중국전토 사족의 족보를 총망라하여 백질 7백권에 달하는 거서(巨書)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일반 사족의 족보 효시로 삼는다.

우리나라는 고려때부터 왕실의 계통을 적은김관의 (金寬毅)의 왕대실록「王代實錄」과 임경숙(壬景肅)의 선원록(璿源錄)이 그 효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사가의 족보로는 이조 세종 5년인 1423년 양도공 영이 文化柳氏 永樂譜를 편찬하여 그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락보는 전해지지 않고 안동권씨 성화보(1477)와 문화유씨 가정보(1565)가 전하는데 가정보가 그 편집 체계나 내용면에서 가장 우수한 보책(譜冊)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면 주요 족보의 연대와 성화 가정 두 보를 비교하여 보기로 한다.


주요 족보의 연혁

구분

본명

발행문중

간 행 년 도

편 찬 자

보전

유무

비 고

영락보永樂譜

문화류씨

1423년(세종5년)

량도공 영

서문만 전함

성화보成化譜

안동권씨

1477년(成宗7년)

안동권씨문중

현존

3권 364p

내외손 동격생년순

가정보嘉靖譜

문화류씨

1562년(明宗17년)

첨정희 잠

현존

10권 2204p

내외손 동격생년순

을축보乙丑譜

강릉김씨

1565년(明宗20년)

강릉김씨문중

현존

본손만 기재 선남후여순

기사보己巳譜

문화류씨

1689년(肅宗15년)

처후

현존

5권 198p

본손위주 선남후여

성화보와 가정보에 대한 비교

성화보(1477) 안동권씨

가정보(1562) 문화유씨

문헌

문헌 약간

문헌

문헌 152쪽

上권

天~果(114쪽)

1권

天~水( 88쪽)

中권

珠~平(108쪽)

2권

玉~身(206쪽)

下권

章~特(142쪽)

3권

髮~與(200쪽)

총 364쪽외에 문헌 1권

4권

敬~伯(200쪽)

5권

叔~對(200쪽)

6권

楹~公(198쪽)

7권

匡~峀(200쪽)

8권

香~奏(200쪽)

9권

遣~床(202쪽)

10권

絃~暉(204쪽) 총 2,204쪽


성화보와 가정보의 출현

최초의 족보인 영락보는 현존하지 않고 안동권씨 성화보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족보요 그다음이 문화류씨의 가정보라 할 수 있다. 영락보는 황해도 구월산 대승공 재실에 소장된 것으로 전할 뿐이며 얻어 볼 수 없고 성화보는 국립도서관에 1질이 소장되어 안종권씨 문중에서 1929년(소화 4년) 필사하여 영인본을 제작 배포하였고 또한 가정보는 류문 후손 집에는 전해지지 않았으나 다행히 문화류씨 외예인 이퇴계사손수졸당 이재령(李退溪嗣孫 守拙堂李在寧)씨댁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1979년에 발견되어 문화류씨 대종회에서 영인복사본을 제작 분질함으로써 후손은 물론 세인이 넓게 접하여 보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성화보와 가정보의 비교적 고찰

지금으로부터 520년 전인 1477년에 만들어진 성화보와 그 후 85년 뒤인 1562년에 제작된 가정보를 살펴보면 두 보는 몇 가지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시조로부터 세대별로 기록했고 1면을 6세로 나누어 子女의 생년순으로 내․외손 및 외외손(外外孫)을 차별 없이 기록하여 각 성씨와 얽힌 인척간의 인맥을 뚜렷이 하였다는 점이요, 둘째는 사위를 女 또는 여부(女夫)라 적고 성명만 썼을 뿐 본관이나 선조의 기록을 일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사위의 손 즉 외손 및 외외손은 6대~7대까지 소상히 적었을 뿐 상계의 선조 휘는 일체 기록치 않았으며 후손중 혹자 대표적 관작만 기록했고 일체 개인 기록을 등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화보는 시조만 성을 썼고 자(子)는 자자(子字)아래 휘자만 기록 했으며 면이 바뀌면 上단의 첫 자손은 반듯이 성명을 함께 적었으나 가정보는 시조부터 모든 등재 인물의 전원을 성(姓)과 명(名)을 함께 적었으나 가정보는 시조부터 모든 등재 인물의 전원을 성과 명을 함께 적어 본손(本孫)과 외손(外孫) 및 외외손(外外孫)의 계대를 분명히 하였다는 점에서 안동권씨나 문화류씨 두 문중의 보책이라기 보다는 만성보(萬姓譜)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만 하다.

성화보는 3권 364면에 9천명이 기록된 반면 가정보는 11권 2204면에 4만2천명이 등재 되었다. 성화보는 양자 제도가 없는 반면 가정보는 126건의 양자기록을 볼 수 있다. 또한 신주양자(神主養子) 제도가 가정보에서 발견 되었으며 양보 공히 서자(庶子)라는 기록은 전무하고 가정보에서는 개가한 여자의 남편을 전부(前夫) ○○○, 후부(後夫) ○○○으로 함께 기록 본종위주사상(本宗爲主思想)을 중시하여 편찬 했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성화, 가정 양보는 이조 초기 이세기간의 정치적 영역의 여러 측면을 구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가계와 혼인 관계를 통해 이조 초기의 지배계층(支配階層)의 구성과 성격 연구에도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소중한 민속자료(民俗資料)라 하겠다.

여기서 성종~중종의 75년간 89회의 文科 시험을 실시하여 1,595명을 배출 했는데 그중 80%인 1,120명의 이름이 가정보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중 1,071명은 문화유씨와 혼인관계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연결 되었다는 사실도 중요시 된다.

또한 조선조 초에서 명종(明宗) 말까지 문과급제자 2천여명중 60%의 인물이 양보에 등재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임진왜란전 간행된 두 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양반가문의 흐름과 왕실관계, 역사적 주요 명사의 혼인관계 등도 살필 수 있어 이 두 족보는 이조 초기의 인맥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국보적 가치가 충분함으로 반듯이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한다는 보학계의 의견이 높다.

족보 체계의 변화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안동권씨의 성화보와 문화유씨의 가정보는 본손, 외손, 외외손 등을 차별없이 동격으로 기록하여 만성보적(萬姓譜的) 문헌으로 평가를 얻으나 1565년에 간행된 강릉김씨 을축보와 1689년에 편찬된 문화유씨 기사보는 선남후여로 자손록을 적고 있어 부계중심의 본손위주로 편집하여 족보편집 형태의 큰 변화를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강릉김씨의 을축보는 본손만 기록했는가 하면 문화류씨의 기사보는 외손을 일대 또는 이대까지만 적었으며 가정보 1권 및 2권에 등재된 문간공공권(文簡公 柳公權)의 외손과 외외손의 기록을 비롯 문산군 류성비(文山君 柳成庛), 문정공 류경(文正公 柳璥) 등의 외손 및 외외손의 많은 외예손록(外裔孫錄)이 의도적으로 삭제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적서(適庶)의 구별을 엄격하게 보책에 기록하여 개가한 여자의 자손은 반드시 서자, 서녀라 적어 양반사회의 의식구조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상의 을축보와 기사보 이후 모든 가문의 족보가 부계 위주의 선남후여를 축으로 하는 족보형태가 크게 발전 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안동권씨성화보에 류총(柳總), 류혜방(柳惠芳), 류혜손(柳惠孫)의 자손록(子孫錄) 등재사실

안동권씨의 성화보는 3권으로 天~恃까지 364면에 약 9천명이 등재 되었다. 그중 문화유씨의 柳總, 柳惠芳, 柳惠孫, 柳滋 등의 손록이 발견되는데 이들은 안동권씨의 사위로 내외손 및 외외손이 28면에 무려 591명이나 기록되었다. 이는 364면중 7.7%에 해당하는데 두 족보의 기록은 대체적으로 일치함을 발견하게 된다.

성화보의 기록

구 분

항 수

면 수

등재인원

비 고

류 총 柳 總

恭~敢

12

300

류혜손 柳 惠 孫

晨~宿

6

120

류혜방 柳 惠 芳

首~戎

6

114

류 자 柳 滋

女~慕

3

57

28

594


성화보와 가정보의 자손록 비교적 고찰

성화보중 柳惠孫(10면), 柳惠芳(12면), 柳總(14면)의 子孫錄

가정보중 柳惠孫(18면), 柳惠芳(19면), 柳總(17면)의 子孫錄

註:편의상 가정보중 六世까지만 게재하였음. 문화류씨세보 참조.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성화보와 가정보는 편집 자체가 같고 자손의 기록도 거의 일치함을 발견할 수 있다. 성화보는 영락보 보다 54년 뒤에 만들어졌고 가정보보다 85년 전에 만들어졌음을 앞서 살핀 바와 같다.

그런데 어떻게 안동권씨 문중이 권씨가문의 족보를 만드는데 사위인(즉 외손인) 柳總, 柳惠芳, 柳惠孫 등의 외손 기록을 28면을 할애 5,939명의 자손록을 상세히 기록할 수 있었을까 하고 의문을 갖어 보게 된다.

14세기 성종조 당시의 문물 사정을 생각할 때 자료 수집이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동권씨 종보 편집자가 유사(有司; 자손 록을 수집하는 책무를 맡은 사람)를 전국에 보내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기도 교통 통신사정과 비용 등의 여건 등을 생각할 때 그리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는 외손(권부의 외손)인 당사자들에게 자료 제공을 요청하여 협조를 얻어 이루어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외손 문중의 특정 책임자가 자손록을 작성하여 필사해서 권씨 보소 측에 제출했을 수 있다. 그러면 류문의 작성자는 전국 각지의 자손들 생거지(生居地)를 순방하여 일부는 수집했을 수 있고 상계는 기존의 가승보를 참고하여 작성했을 것으로 추상할 수 있다.

성화보에는 대승공 12세손에서부터 18세손까지 6대 또는 7대까지의 내외손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 기록은 성화보의 기록과 가정보의 기록이 대체로 일치함을 알 수 있다(물론 생년순이 바뀐것 또는 휘자의 오기, 누락, 증보 등도 간혹 있음) 이는 류문 상계기록의 일치는 이미 작성된 자료가 있어서 이를 토대로 편집했기 때문에 가능 했으리라 생각된다.

육세조의 외손 및 외외손의 기록을 180년 뒤의 자손이 상세하게 작성하기란 쉽지도 않고 작성한다 하더라도 일치된 문서를 작성하기란 쉽지않다. 성화보의 1항(總 惠芳 惠孫)은 고려 말 인물들이고 5항~6항의 인물들은 성종 조 전후 생존자들임을 참고하여야 한다.

이것은 성화보 보다 54년전에 양도공 영(潁)이 제작한 영락보가 이미 기존의 선계기록을 등재 하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영락보는 성화보 가정보의 모체(母體)

가정보는 1562년 첨정 유희잠에 의해 편집되었다. 희잠은 대승공 20世 손으로 이조 명종때의 사람이다. 가정보는 귀양살이를 하는 적지에서 24년간의 긴 세월을 父子 양대에 걸쳐 이루어낸 大力作이다. 그러면 희잠은 무엇을 기초로 가정보를 만들었을까?

그것은 거금 600년간의 선조 사적을 집필한다는 것은 기존의 자료가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는 1423년 세종 5년에 양도공 류영(良度公 柳潁)이 제작한 영락보가 있었기에 선대자료로 삼았을 수 있다. 영은 대승공 14세 손으로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이조 초의 인물이다. 그가 제작한 영락보는 문화류씨 최초의 족보이다.

족보를 편집할 때는 상계의 기록은 기존의 기록을 인용하는 것이 관례이다.

편집체계도 성화보와 가정보는 크게 닮았다. 이는 우연일까 가정보는 영락보 체제를 본체(本體)로 편집할수도 있지만 성화보는 무엇을 본체로 하였을까 성화보와 가정보는 첫째로 자손록을 생년 순으로 기록했다는 것. 둘째 본손, 외손, 외외손을 동격을 다룬 것. 셋째 사위 이상의 선대기록을 다루지 않고 자손록은 제한없이 기록한 것. 넷째 100여개의 성씨가 등재되었으나 관향을 일체 쓰지 않았다. 다섯째 등재인물의 개인기사를 생략한 것. 여섯째 직함은 대표적인것 하나만 적은 점. 일곱째 1면을 6행으로 나누어 5세를 기록한 것 등이 일치한다. 또한 안동권씨의 사위인 류총(柳總)류혜방(柳惠芳) 류혜손(柳惠孫)의 두 족보의 자손록이 일치하다는 것은 크게 시선을 끈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볼때 영락보의 체계가 성화보 가정보의 편찬에 모체가 되었다는 추론(推論)이 가능하다.

영락보의 실체

그렇다면 영락보의 실체는 어떤 것일까?

가정보는 문헌 1권 76면과 자손록 19권 2,204면의 보책이다. 1권은 대승공 휘 류차달(大丞公 諱 柳車達)을 시조로 1세에서부터 7세까지, 7세 공권(公權)부터는 본손과 외손, 외외손까지 상세하게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가정보의 대승공 15세손 이상의 선대기록은 영락보의 기록을 적었고 그 이후 손록은 자료를 수집편찬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영락보를 편찬한 영이 대승공 14세 손이니까 본인의 자 및 손자대까지인 15세 또는 16세까지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으로 영락보는 대승공으로부터 15세 손까지의 자손록을 적었고 자손록 순서는 선남후녀가 아닌 생년순서로 적었으며 본손과 외손 그리고 외외손까지를 동격으로 기록했다.

또한 개인 기사 보다는 혈통을 중시한 세계위주(世系爲主)로 편찬한 만성족보(萬姓族譜) 성격의 한국 최초의 족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영락보의 실체는 가정보의 15세 이상의 선대기록이 영락보의 본체(本體)라고 할 수 있다.

가정보는 국보급의 문화재

가정보는 문헌 1권과 자손록 10권으로 편집된 족보로서 시조로부터 약 600년간의 선대기록과 100여 성씨의 혼인으로 인한 인맥 관계를 소상히 적은 만성보적 족보라고 평가된다. 이 보책은 많은 문중의 보책과 달리 본손과 외손 및 외외손까지를 가리지 않고 동격으로 남녀평등 정신에 입각 생년순에 의거 편집 했으며 수많은 씨족의 인맥관계를 폭넓게 수록했다는데 이 세보의 특징적 의미가 있다 하겠다.

22년간의 긴 세월에 걸쳐 제작된 이 보책은 참여인원만도 대, 소 관원과 각 문중 참여종사자가 무려 300여명이나 되었다고 발문(跋文)은 밝히고 있어 당시의 문물(文物)을 생각할 때 그 얼마나 어려운 대작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본 가정보 이후 많은 성씨에서 만든 족보는 본손 위주의 편집 체계와 개인 기사를 기록하는데 중점을 두어 발전 했으며 자손록도 생년순(生年順)에서 선남후녀(先男後女)로 적고 있어 가정보는 남녀평등(男女平等)의 씨족관념에서 남존여비사상(男尊女卑思想)으로 변해온 사회문화변천사를 고찰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가정보는 단순한 사문(私門)의 족보라는 일반적 의미를 벗어나 씨족 문화와 인맥 연구 자료로서 완벽한 사료적 가치가 안정되어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하겠다.

자료 비교

성화보기록 ; 성화보의 류만수기록 (자료-1) / ;류혜방, 류혜손의 기록 (자료-2)

좌상공파파보중 류만수 손록 (자료-3) /

진주류씨 족보중 혜방, 혜손의 손록(자료-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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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안동권씨성화보, 강릉김씨을축보, 문화류씨 가정보,문화류씨대동보,

                  진주류씨족보, 문화류씨 좌상공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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