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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경원부사증병조참판류공(경천)사장 (慶源府使贈兵曹叅判柳公(擎天)事狀) 310

경원부사증병조참판류공(경천)사장

慶源府使贈兵曹叅判柳公(擎天)事狀

 

  옥계(玉溪) 류공(柳公)의 휘는 경천(擎天)이요, 자는 중여(重汝)이다.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선조(宣祖)) 25년 1592 임진(壬辰)에 섬나라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대가(大駕)(어가(御駕))가 서도(潟)로 몽진(蒙塵)하고 온 나라가 난리로 어지러움에 이르러 대신(大臣) 김귀영(金貴榮) 동추(同樞) 황정욱(黃廷彧) 등이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를 모시고 회녕부(會寧府)로 들어갔다. 이 때 왜장(倭將) 가등청정(加藤淸正)이 곧바로 그 뒤를 쫓아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들어 옴에 마천령(摩天嶺) 북쪽 여러 고을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기와가 깨지듯 산산이 흩어졌다. 이때 회녕(會寧) 고을 백성 중에 국경인(鞠景仁) 등이 또한 왜적의 앞잡이가 되어 두 왕자와 여러 고을 수령들을 별관에 가두니 각 진(鎭)의 장교(將校)와 아전(衙前)들은 그들과 함께 호응하여 앞으로 나가 왜적을 토벌할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는 자가 없었다.   전(前) 북평사(北評事) 정공문부(鄭公文孚)가 문무(文武)를 온전히 갖춘 인재로서 왕명을 받아 정사를 보되 갑자기 난리를 당하여 어떠한 방책을 모르더니 이윽고 이웃 가까운 고을의 씩씩하고 날랜 충의의 의사를 모집 (882) 하여 부중(府中)에 모이게 할 계책을 세웠다. 공이 당시 고령첨사(高嶺僉使)로서 군병을 거느리고 다달아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기를 『적의 수효가 비록 많으나 난리를 일으킨 자는 몇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 편비(褊裨)(부장(副將))를 거느리고 손수 칼을 잡고 저들의 미비함을 틈타 그 괴수(魁首)를 잡아 목을 베면 그 나머지는 염려할 것이 못 된다.』하니, 정공(鄭公)이 그 말을 좇아 고을 사람 신세준(申世俊) 등과 힘을 합쳐 국경인(鞠景仁) 등 13인의 목을 베어 여러 진(鎭)에 조리 돌리었다. 이에 여러 군병(軍兵)들이 정공을 추대하여 의병대장(義兵大將)을 삼는 한편 그 위세의 소문이 크게 떨치어 맨 먼저 회녕(會寧)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 계책은 실로 공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짐에 경원부사(慶源府使)에 제수되어 우위장(右衛將)을 겸하였다. 이때 함경북도우후(咸鏡北道虞候) 한인제(韓仁濟) 등과 열하(涅河)를 지키다가 적을 석령(石嶺)에서 만났던바 공이 부오(部伍)를 정돈, 좌우로 진격하여 장평(長坪) 임명(臨溟)으로 부터 장덕산(長德山) 쌍개포(雙介浦)까지 둔치고 있던 왜적들을 모두 토벌 평정하였다. 또 가등청정(加藤淸正)과 백탑(白塔)에서 만나 세 번 싸워 세 번 이겨 변방 옛 강토를 오랑캐의 점령으로부터 면하도록 하였으니 이 또한 공께서 시종 곁에서 도운 힘이었다. 애석하도다! 이같은 뛰어난 공과 큰 업적을 세웠으니 곧바로 격식 밖의 포상(褒賞)의 은전이 있어야 마땅한데 당시에 공을 시기하는 자들의 저지로 민멸(泯滅)되었다.   그로부터 60여년 후에 비로소 양파정상공(陽坡鄭相公)(정태화(鄭太和))의 연주(筵奏)로 인하여 기성이경(騎省貳卿)(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고 또 관북(關北)(함경도(咸鏡道)) 경성(鏡城)의 창렬사(彰烈祠)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전공(戰功)의 수말(首末)은 국조보감(國朝寶鑑)과 북관지(北關誌) 및 최곤륜(崔崑崙)(부제학(副提學) 최창대(崔昌大))이 지은 길주승전비(吉州勝戰碑)의 비문에 뚜렷이 상고할 수 있다. 그리고 경성(鏡城)의 강씨(姜氏)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또 쌍포파왜도(雙浦破倭圖)가 있어 당시 거의(擧義)한 제공(諸公) 31인을 열서(列書)하였는데 그 중에 공이 일곱 번째에 쓰여 있다. 이렇듯 공사문헌(公私文獻)에 또한 뚜렷할 뿐만 아니니 어찌 일시일인(一時一人)으로서 사사로운 추상을 용납하겠는가?   공은 문화(文化) 대성(大姓)으로 고려(高麗) 대승(大丞) 휘 차달(車達)을 시조로 하여, 칠대조(七代祖)는 휘 사공(思恭)이니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이고, 고조(高祖)는 휘 경인(敬仁)이니 문과(文科)에 급제 박사이고, 증조(曾祖)는 휘 해(荄)니 진사(進士)이고, 조(祖)는 휘 자신(自愼)이니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필선(弼善)에 이르렀고, 선고(先考)는 휘 희량(熙良)이니 관직이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이다.   공은 명종(明宗) 1553 계축(癸丑)에 태어나 선조(宣祖) 1594 갑오(甲午)에 졸하니 향년 42세로 부평(富平) 당악리(棠岳里) 자좌(子坐)의 언덕에 안장(安葬)되었다. (883)   배위(配位) 수원백씨(水原白氏)는 감정(監正) 의홍(義弘)의 따님이며, 아들 충진(忠進)은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이다.   아아! 충의의 성품은 인심의 천성에서 나온 바, 이름을 걸고 몸을 바쳐 임금을 섬기는 자 마땅히 그 뜻을 익히 외워야 할 것이다. 가만히 보건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전투에 능히 작은 고을 적은 수효의 군병(軍兵)으로서 목숨을 버리고 적을 무찔러 국가의 중흥(中興)을 도와 성취시킨 자 류공(柳公)과 같은 이가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이는 의리의 분별과 취하고 버림에 이르러 그 마음이 명쾌하여 이해와 화복(禍福)으로 흔들리지 않아야만 능히 그럴 수 있으니 공과 같은 이는 가히 그 본심을 얻어 인신(人臣)의 의리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이르겠도다.   익현(益鉉)이 문견(聞見)이 적고 고루하여 예전 일을 상론(尙論)함에 그 자격이 못되어 부끄러우나 덕을 좋아함은 타고난 천성(天性)이 한가지인바, 드디어 그 전해오는 문헌(文獻)을 취하여 대략 산삭(删削), 윤색(潤色)하여 그 후손 원렬(元烈)의 부탁에 응하노라.

면암최익현찬

 

慶源府使贈兵曹叅判柳公擎天事狀

 

玉溪柳公諱擎天字重汝我 昭敬大王二十五年壬辰漆齒匪茹 大駕西狩中外板蕩大臣金貴榮同樞黃廷彧等奉臨海順和両王子入會寧府倭酋淸正直躡其後踰摩天嶺嶺北列邑望風瓦解土民鞠景仁等又爲其前導執兩王子及諸守宰囚之別館各鎭將吏并聲和應無肯以向前討賊爲己任者前北評事鄭公文孚以文武全材受 命視事猝當搶攘未知所出方召募傍近壯勇忠義之士㑹府中計事公時以高嶺僉使率兵來會倡言衆中曰賊衆雖多稱亂者不過數人請率褊裨手執一劒乘其未 (881) 備擊斬渠魁則餘黨不足慮也鄭公從其言卽與府人申世俊等合力討斬景仁等十三人徇于諸鎮於是衆推鄭公爲義兵大將威聲大振首建㑹寧之捷實計自公出也事聞移拜慶源府使兼右衛將同北虞候韓仁濟等守涅河與賊遇於石嶺公整勅部伍左右奮擊自長坪臨溟以至長德山雙介浦之賊並就討平又與淸正遇於白塔三戰三勝使豳岐故疆免爲左衽亦公始終左右之力也惜乎以若殊功大業宜卽有格外褒典而爲當時忌公者所沮泯没六十餘年始因陽坡鄭相公筵奏 贈騎省貮卿因又配食於關北彰烈祠戰功首末備載國朝寳鑑北關誌及崔崑崙所撰吉州勝戰碑文斑斑可考而鏡城姜姓人家又有雙浦破倭圖列書擧義諸公三十一人而公居第七則公私文獻又不啻章章豈容一時一人所可任私推移也耶公文化大姓以高麗大丞諱車逹爲鼻祖七代祖諱思恭 世子翊衛司洗馬高祖諱敬仁文科博士曾祖諱荄進士祖諱自愼以學行薦官至弼善考諱熙良官訓鍊主簿其生以 明宗癸丑卒於 宣祖甲午享年四十二葬于富平棠岳里枕子之原配水原白氏正義弘女子忠進訓鍊主簿噫忠義之性出於人心之秉彝䇿名委質以事君人者宜其講之熟矣而竊觀壬辰之役能以下邑偏師捨命討賊贊襄中興若柳公者有幾人哉是非義理之分取舍之極洞然胷中不爲利害禍福所摇奪而能然乎若公可謂得其本心而無愧爲人臣之義矣益鉉聞見孤寡尙論前古慚非其人而聞風好德彝性所同遂就其傳來文獻略加删潤以屬其後孫元烈甫

勉菴崔益鉉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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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319  사월당공(시번)묘갈명 (沙月堂公(時藩)墓碣銘) 327     편집인 2012/11/29  [1165]  
318  수촌공(발)약사 (秀村公(發)略事) 326     편집인 2012/11/29  [879]  
317  농수공(정서)묘표 (聾수公(廷瑞)墓表) 325     편집인 2012/11/29  [855]  
316  학유공(추성)약사 (學諭公(樞星)略事) 324     편집인 2012/11/29  [892]  
315  예조참판공(중무)약사 (禮曹參判公(重茂)略事) 323     편집인 2012/11/29  [1058]  
314  통상공(중기)약사 (統相公(重起)略事) 322     편집인 2012/11/29  [822]  
313  귀정공(사온)묘갈명 (龜亭公(思溫)墓碣銘) 321     편집인 2012/11/29  [983]  
312  자인공(덕중)약사 (慈仁公(德中)略事) 320     편집인 2012/11/29  [797]  
311  호조정랑공(영)약사 (戶曹正郞公(泳)略事) 319     편집인 2012/11/29  [1040]  
310  박사공(성홍)약사 (博士公(聖洪)略事) 318     편집인 2012/11/29  [887]  
309  한림공(수함)약사 (翰林公(壽咸)略事) 317     편집인 2012/11/29  [832]  
308  롱암공(수원)사적 (聾菴公(壽垣)事蹟) 316     편집인 2012/11/29  [921]  
307  사헌부집의공(필원)약사 (司憲府執義公(弼垣)略事) 315     편집인 2012/11/29  [997]  
306  황간공(여림)약사 (黃澗公(汝霖)略事) 314     편집인 2012/11/29  [966]  
305  병조좌랑공(일상)행장 (兵曹佐郞公(一相)行狀) 313     편집인 2012/11/29  [939]  
304  사제수사공(징구)사제문 (賜祭水使公(徵龜)賜祭文) 312     편집인 2012/11/29  [804]  
303  염재공(영)묘표 (濂齋公(渶)墓表) 311     편집인 2012/11/29  [1004]  
 경원부사증병조참판류공(경천)사장 (慶源府使贈兵曹叅判柳公(擎天)事狀) 310     편집인 2012/11/29  [974]  
301  매돈공(광선)묘지명 (梅墩公(廣善)墓誌銘) 309     편집인 2012/11/29  [863]  
300  수초당공(현)묘갈명 (遂初堂公(俔)墓碣銘) 308     편집인 2012/11/29  [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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