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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반계공(형원)행장 (磻溪公(馨遠)行狀) 285


반계공(형원)행장

磻溪公(馨遠)行狀

 

  반계(磻溪) 류선생(柳先生)의 휘(諱)는 형원(馨遠)이요. 자(字)는 덕부(德夫)니 문화인(文化人)이라, 시조(始祖) 휘 차달(車達)은 가정이 심히 부요(富饒)하여 고려(髙麗) 태조(太祖)의 정벌(征伐)을 도와 차마(車馬)를 내어 수차 공(功)을 세워 대승(大丞)이 되고 삼한(三韓)을 통합한 공신호(功臣號)를 받었다. 이로부터 대대로 귀현(貴顯)하더니 우리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휘 관(寬)이 계시어 세종(世宗)을 도와 우의정(右議政)이 되니 시(諡)는 문간(文簡)이오 호(號)는 하정(夏亭)인데 청렴한 덕이 국사에 실리었다. 휘 계문(季聞)을 생하니 형조판서(刑曹判書)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으로 시는 안숙(安肅)이오, 오세(五世)를 전하여 휘 위(湋)는 현령(縣令)이오, 휘 성민(成民)을 생하니 정랑(正郞)으로 증병조참판(贈兵曹叅判)이오, 휘 을 생하니 문과(文科)에 급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 검열(檢閱)이 되고 우참찬(右叅贊) 이지완(李志完)의 따님을 취하여 광해군(光海君) 1622 임술(壬戌)에 공을 낳았는데 검열공(檢閱公)이 원대한 희망을 두더니 불행이 28세에 졸하다. (781)   공이 태어난지 겨우 두살인데 능히비애(悲哀)하고 호모(號慕)할 줄을 알아 고기를 먹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더라. 3 · 4세에 무릇 일용사물(日用事物)을 접함에 반드시 본말(本末)을 물어 보고 그 지극(至極)한 곳에 이르러는 비록 초목(草木)과 금충(禽虫)의 미물이라도 참아 상해(傷害)치 아니하고 5세에 산수(算數)를 통(通)하고 이미 독서할 줄 알게 됨에 스스로 과정을 세워 비록 여러 아이들이 그 곁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 같이 하더라.   큰 외숙(外叔)인 이감사(李監司) 원진(元鎭)과 고숙(姑叔)인 김판서(金判書) 세렴(世濂)에게 나아가 글을 배울 때 한번 읽으면 문득 다 외더니 7세에 서전(書傳) 우공장(禹貢章)을 읽다가 기주(冀州)에 이르러는 번연(翻然)히 일어나 춤을 추거늘 그 연유(緣由)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기주(冀州) 이자(二字)의 존중함이 이에 까지 이를 줄을 생각치도 못하였다 하였다. 10세에 글도 잘 지으며, 경전(經傳)과 백가서(百家書)를 통하여 논난(論難)함이 범인의 의표(意表)에 뛰어나니 이(李) 김량공(金兩公)이 찬탄(贊歎)하여 이르기를「이 같은 재조(才操)는 옛적에도 혹 있었는가 하였다. 13 · 14세에는 개연(慨然)히 성현(聖賢)을 추모(追慕)하는 뜻을 두어 위기(爲己)의 학문에 전심하고 과거의 업에는 즐기지 않았다.   1636 병자(丙子)에 노란(虜亂)을 피하여 조부모(祖父母)와 모부인(母夫人)과 두 고모(姑母)를 모시고 행할제 조부(祖父)는 나이 늙고 삼가(三家)의 가속(家屬)이 공 한 사내만 믿고 있으니 그 때 나이 15세인데 강도(强盜)가 있어 산곡(山谷)에서 나와 길을 막으니 일행(一行)들이 다 두려워하거늘 공이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사람이 누가 부모가 없으리오. 너희들은 우리 부모를 놀라게 하지 말고 행장(行裝)은 너희들이 마음대로 가져가거라.」하니, 강도(强盜)도 그 말에 감화(感化)되여 모두 흩어져 떠났다.   21세에 탄식(歎息)하여 이르기를 『선비가 도에 뜻을 두되 능히 뜻을 세우지 못한 것은 뜻이 기의 게으른 죄라.』 하며, 숙흥야매(夙興夜寐)도 능히 못하였고, 의관(衣冠)을 바로하고 첨시(瞻視)를 높히 함도 능하지 못하였고, 『어버이를 섬김에 안색(顔色)을 화(和)하게 함도 능히 못하였고, 실인(室人)을 접할 때 공경이 상대함도 능히 못하였다.』하고 사잠(四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고 이로부터 조심하여 오직 그 말을 이에 실천하더라, 친환(親患)이 있어 의원(醫員)에게 물으니 의원이 본래 교만하였으나 공의 행동을 보고서는 이 사람을 보고 화제(和劑)를 하되 마음을 다하지 않는 자는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 하였다. 집이 가난하여도 감지(甘旨)를 이바지함에 전력을 다하고 혹시라도 계속(繼續)치 못하면 척연(慽然)이 눈물을 흘리었다. 경사(京師)에 있을 때 명예(名譽)가 울연(蔚然)하여 일시(一時) 명사(名士)들이 모두 교유하기를 원하고 귀요(貴要)한 이들 (782) 이 한번 보기를 청하여도 공을 만나지 못하였다. 독서에 침식(寢食)을 잊기도 하고 마상(馬上)에서도 항상 생각(生覺)에 잠기여 말이 혹 다른 길로 가도 깨닫지 못하였다.   1644 갑신(甲申)에 대명(大明)이 망했는데 이해에 조모(祖母)의 상을 만나고, 1648 무자(戊子)에 모부인(母夫人)의 상을 만나고, 1651 신묘(辛卯)에 조부(祖父)의 상(喪)을 만났는데 상사(喪事)를 집행(執行)함에 예를 극진히 하고 상사를 모두 지낸 후 도원량(陶元亮)(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부안현(扶安縣) 우반동(愚磻洞)에 돌아가 은거(隱居)하니 공의 뜻을 가히 알찌라. 지역이 대해(大海)에 인접하여 어별(魚鱉)이 많이 생산되니 매양 가미(佳味)를 만나면 낯빛을 변색(變色)하여 이르기를 「어버이 계실 때에 이것을 항상 얻지 못함을 근심하였더니 이제 이를 얻으니 누구를 위하리오?」하고 문득 눈물을 흘리며 먹지 못하였고, 한 누이가 있어 서울에 사는데 의식을 같이 못함을 슬퍼하고, 경기도(京畿道)에 있는 전장(田庄)과 곡물(糓物)을 돌려 보내었다.   공이 이미 학문에 뜻 두기를 심히 일찍하고 또 중원(中原)이 망함으로부터 초연(超然)이 멀리 떠나 더욱 학문에 전정(專精)하여 뜻을 심각히 하고 깊이 생각하기를 밤부터 날을 이어 침상(枕上)에서도 묘안(妙案)이 뜻에 합한 것이 있으면 일야(一夜)에도 서너번씩 일어나 촛불을 밝히고 빨리 쓰고 매양 날이 저물면 이르기를 「오늘도 또 허송(虛送)했도다, 의리는 무궁하고 세월(歲月)은 유한(有限)한바, 고인은 무슨 정력(精力)으로 성취(成就)함이 저 같은고?」하였다. 매일 날이 샐 무렵에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衣冠)을 갖추어 가묘(家廟)를 알현(謁見)하되 심한 병(病)이 아니면 비록 심한 한서(寒暑)와 풍우(風雨)라도 일찍 폐(廢)하는바 없고 물러나 서실(書室)에 앉으되 반드시 항상 앉는 곳이 있었다. 서실(書室)이 송대하(松臺下) 죽림중(竹林中)에 있어 만권서(萬卷書)를 소장하고 첨축(籤軸)을 정제(整齊)하고 대사립을 항상 닫아도 사슴들이 대낮에 다니니 공이 돌아보고 즐거워하며 이르기를 「고인이 이르되 정한 후에야 능히 평안하고 능히 생각한다 하니 아름답다 이 말이여!」하였다. 또 일찍 사람더러 이르기를 「공부는 비록 동(動)과 정(靜)을 관통(貫通)할지라도 정이 아니면 근본이 되지 않는다. 다만 학자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화가 유행할 때에 동과 정이 서로 근본이 되나 그러나 그 주처(主處)는 정에 있기 때문에 옛 성인이 말하기를 흡취(翕聚)하지 않으면 발산(發散)이 되지 않는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물(物)이 각각 그 장소에 그치니 또한 정을 주(主)한 뜻이오, 성인(聖人) 정전(井田)의 법(法)은 지(地)를 근본하여 사람에게 고르게 함이니 정으로 말미암아 동을 억제한 뜻이라.」하였다.   매양 달밤이면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하니 노래는 주시(周詩)를 사용하고 소리는 한어(漢語)를 사용(使用)하여 (783) 성률(聲律)이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았으나 그 금운(襟韻)이 쇄락하여 참으로 천하(天下)의 고사(髙士)라, 내외(內外)간에 매우 엄숙하여 손님 같이 여기되 은(恩)과 의(義)가 심히 독실(篤實)하고 가사(家事)의 크고 작은 일에 모두 규제(䂓制)가 있었으며, 노복(奴僕)이 각각 그 일을 맡아 하니 문정(門庭)이 쇄락(灑落)하여 일한 자 없는 것 같고, 무고(巫瞽)가 문(門)에 들어오지 못하니 가인이 기도(祈禱)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인근(隣近)에 총사(叢祠)가 있음에 사람이 심히 물결같이 분주(奔走)하거늘, 공이 그 당(堂)을 헐어버리고 그 나무를 베어냄으로 폐단(弊端)이 드디어 그치니 문하(門下)에 이르는 자 그릇되고 간사한 마음이 자연히 없어지고 향당(鄕黨)이 모두 교화(敎化)되었다. 그 평상시 사람을 구제(救濟)하고 물(物)에 미치는 인(仁)이 사람을 감동시킴이 많았다.   때에 영력황제(永曆皇帝)가 남방(南方)에서 즉위(卽位)하였거늘 어떤 사람은 망하였다하고, 어떤 사람은 망하지 않았다 하든 차에 1662 임인(壬寅)에 북방사신(北方使臣)이 반사(頒赦)하려 온 자가 이르러 포금(捕擒)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그 허실(虛實)을 알지 못하므로 공이 서러워하더니, 1667 정미(丁未)에 당선(唐船)이 제주(濟州)에 표박(漂泊)했는데 다 복건성(福建省) 사람이라, 중화(中華)의 복제(服制)로 치발(薙髮)치 아니하였거늘, 공이 가서 보고 한어(漢語)로 황제(皇帝)의 일을 물으니 그 중에 글을 능히 하는 자가 있어 정(鄭) 희(喜)와 증(曾) 승(勝) 등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영력황제(永曆皇帝)가 남방(南方) 사성(四省)을 보존(保存)하여 금년이 영력(永曆) 21년이 된다.』 하고, 행장 속에서 역서(曆書)를 내어 보이니 과연 그러한지라, 공이 희비가 교체하여 시를 지었다.   성품이 산수를 사랑하여 족적(足跡)이 동방(東方) 명승지(名勝地)를 두루 밟았다. 사는 곳 우반동(愚磻洞) 또한 청절(淸絶)하고 가려(佳麗)하므로 관동(冠童)을 이끌고 오르내리면서 풍영(諷詠)하여 천하의 물이 족히 그 마음에 얽히지 않으되 그 자비(慈悲)한 일념은 출처에 사이를 두지 않은 때문에 유경(遺經)을 상고하여 성인의 뜻을 얻고, 인정을 연구하여 천리의 공정함을 천명하고, 고금을 관통(貫通)하여 치란(治亂)의 연유(緣由)를 살피고, 사물을 인하여 본말(本末)의 관계를 밝게 살피고, 문을 닫고 글을 저술하여 공언(空言)에 부친 것이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도우며 사람을 깨우치고 사업을 이루고자하는 지성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 이르기를 『이 천지며 이 인물인데 선왕(先王)의 정사(政事)를 하나도 행하지 못할 것이 없음은 군자의 천하를 다스림에 다스리려고 기필(期必)치 않코도 다스려지는 것을 스스로 이 천리에 부합함이 이 같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고인이 법을 지음에 도리로 사물를 헤아린 때문에 간이(簡易)하여 행하기 쉽거니와 후세의 법은 사물로 인하여 법을 만든 때문에 백가지로 교함을 막으나 다만 (784) 더욱 문란(紊亂)할 뿐이라.」하였고, 또 이르기를 『천하를 다스림에 공전(公田)과 공법(貢法)를 행하지 않으면 다 구차할 뿐이니 비록 선정(善政)이 있다 하여도 한갓 허문(虛文)만 되니 공전이 한번 행해지면 백가지 법도가 모두 드러남으로 빈부(貧富)가 스스로 안정(安定)하여지고 호구(戶口)가 스스로 명백(明白)하여지고 군대(軍隊)에 부오(部伍)가 스스로 정돈(整頓)되리니 오직 이 같은 후에야 교화를 가히 행할 것이오 예악(禮樂)이 가히 일어날 것이다. 그렇치 않으면 대본이 이미 문란(紊亂)하여 다시 말할 것이 없다.」하였고, 또 이르기를 왕정(王政)은「민산(民產)을 제정(制定)함에 있고, 민산(民產)을 제정(制定)함은 경계(經界)를 정함에 있거늘, 맹자(孟子)때로부터 폭군(暴君)과 오리(汚吏)들이 그 자기에 해됨은 싫어하고 모두 그 서적(書籍)을 없앳고, 또진화(秦火)를 겪음에 이르러 옛 성인의 제도(制度)와 절목(節目)이 탕실(蕩失)하여 하나도 보존(保存)되지 못했고 성현(聖賢)의 경전(經傳)은 다만 출치(出治)의 근원을 의론(議論)할 따름이라, 한(漢)나라 후로 수백천년(數百千年) 동안 성왕(聖王)의 도가 행해지지 못한 것은 모두 전제(田制)의 파괴(破壞)로 말미암아 마침내 융적(戎狄)이 중화(中華)를 교활(狡猾)하고 생민(生民)이 도탄(塗炭)에 빠짐에 이르렀다.』 하고, 우리나라의 노비는 점점 많아지고 양민(良民)은 점점 감축(减縮)됨과 군정(軍丁)을 뽑아드림에 이웃 족인(族人)이 해(害)를 받음은 비유하건대 난사(亂絲)와 같으니 그 근본을 뽑아내지 않고는 그 실마리를 다스릴 수 없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의론(議論)하되 매양 산악(山岳)과 계곡(溪谷)이 험하여 균전(均田)하기 어렵다 말하나 그러나 기자(箕子)가 이미 평양(平壤)에 행(行)하였다 하고, 드디어 전자형(田字形)을 취하여 사구(四區)를 그려 만드니 구(區)마다 모두 백묘(百畝)라, 묘(畝)는 기자(箕子) 칠십묘(七十畝)를 사용치 않고 주(周)나라 백묘의 제도를 사용한바, 이는 이(李) 정(靖)이 땅이 협소하기 때문에 팔진법(八陣法)을 변하여 육화법(六花法)을 만든 뜻과 같음이오, 선비를 가르쳐 재사(才士)를 선발함과 관(官)을 명(命)하여 직(職)을 분(分)함과 녹(祿)을 반(頒)하여 병(兵)을 제(制)함과 폐(幣)를 조(造)하여 화(貨)를 통함에 이르러 차례로 조례(條例)와 절목(節目)이 자상하지 않음이 없어 이르기를「천하의 도는 본말(本末)과 대소(大小)가 시초(始初)부터 떠나지 아니하니 성(星)(저울 눈)이 그 당처(當處)를 잃으면 형(衡)(저울)이 형되지 못하고 촌(寸)(자의 눈금)이 그 당처(當處)를 잃으면 척(尺)이 그 척(尺)이 되지 못한다.」하고, 그 책을 수록(隨錄)이라 이름하니 혹 고금(古今)의 전적(典籍)을 읽고 혹 사려(思慮)의 미친바를 인하여 얻은 대로 따라 기록함이라. 그 규모(規模)가 광대(廣大)하고 조례(條例)가 진밀(縝密)하니 전현(前賢)의 발견치 못한 곳을 확충(擴充)하여 우리 동방(東方)에 없었던 글이라 말할지로다.   그러나 공의 이기총론(理氣總論)과 논학물리(論學物理) 경설(經說) 등 책을 열람(閱覽)한 연후에 수록(隨錄)의 근본이 있고 천덕(天德)과 왕도(王道)가 둘이 아님을 알지로다. 또 정음지남(正音指南)과 무경사서(武經四書)와 여지지(輿地誌)와 군현(郡縣)의 제도(制度) 등 글을 저술(著述) (785) 하니 그 음양(陰陽)과 율려(律呂)와 병모(兵謀)와 사률(師律)과 성위(星緯)의 전도(躔度)와 산천의 형상을 논변(論辨)함이 손바닥을 가르키는 것과 같으니 공은 가히 체용(體用)과 박약(博約)을 겸한 통유(通儒)라 이를 것이다. 그 우리나라 분야를 띄여 말하되 경기(京畿) 이북(以北)은 미기(尾箕)가 되고 이남(以南)은 기두(箕斗)가 된다 함은 공보다 앞서 천백년 전에도 일찍 이를 말한 자가 없었는데 공이 비로소 말하였으니 반드시 후세의 구안(具眼)이 있으리라.   국구(國舅)인 민유중(閔維重) 형제는 공에게 종숙(從叔)이 되어 행의(行誼)를 천거(薦擧)코자 하니, 공이 정색하여 이르기를 『아저씨는 나를 아는 분이 아닙니다.』하니, 드디어 천거(薦擧)치 아니하였는데 그 후에 서너 재신(宰臣)이 공을 천거하여 이르기를 「의리에 잠심(潛心)하고 효우가 출천(出天)하다.」고 하니, 공이 기뻐하지 않고 이르기를 「내가 시재(時宰)를 알지 못하는데 시재(時宰)가 어찌 나를 알리오.」하였다.   공은 괴걸(魁傑)한 안면(顔面)이오 넓은 이마이며 신체(身體)가 장대(長大)하고 골격(骨格)이 뛰어나며 성음(聲音)이 크고 울리며 아름다운 수염이오, 안광(眼光)이 사람에게 비치며 위의(威儀)와 동지(動止)가 뛰어나 보통 사람과 달랐다. 소시(少時)에 과장(科場)에 들어가니 만나 보는 사람마다 심취하여 시권(試卷)을 버리고 서로 따라다닌 자가 있었다. 만래(晚來)에 호연(浩然)한 기(氣)를 충양(充養)함이 더욱 심하므로 정신(精神)이 안정(安定)하고 기색(氣色)이 화평(和平)하며 수면앙배(粹面盎背)하여 바라보면 이미 그 유도자(有道者)인 줄 알게 되니 공의 품부(禀賦)의 남다름과 포부(抱負)의 큰 인격으로 독선(獨善)에만 뜻을 구하고 동방(東方) 민족(民族)으로 하여금 복(福)을 누리게 함이 없으니 애석하도다! 아아 고상(髙尙)을 귀(貴)하게 여긴 것은 그 현달(顯達)할 수 있는 도구(道具)가 있으되 능히 거두어 감춤을 말함이니 세상에서 이른바 고상(髙尙)하다는 자가 과연 그 도구가 다있는가? 그 도구(道具)가 있고 불출한 자는 적으니라. 그러나 도구(道具)도 대소(大小)가 있으니 소자(小者)는 조처(措處)하기 쉬우되, 대자(大者)는 시용(施用)하기 어려우니 그 도구(道具)가 있으되 불출한 자는 그 도구가 큼이라, 공의 하고 저한 바는 오직 삼대이상인(三代以上人)이라야 허여(許與)할지니 이 어찌 배운 바를 놓고 사람을 좇으리오. 공의 불출함이 마땅하도다. 하물며 후에 의론(議論)을 숭상(崇尙)하는 자는 그 때를 고찰(考察)하면 반드시 선생의 유풍(遺風)에 기립(起立)할 이 있으리라,   허미수(許眉叟)가 일찍 왕좌(王佐)의 재(才)로 허락(許諾)하니 확실(確實)한 의론(議論)이다. 세상에 또 공을 문중자(文仲子)에게 비하는 이 있으니 고금인(古今人)의 정신력량(精神力量)은 비록 알지 못하나 공의 측달(惻怛)하고 순정(純正)함은 의심컨데 문중자(文仲子)의 모의(模擬)하고 잡박(雜駁)한 짝이 아니오, 이기론(理氣論)과 논학(論學) 등의 학설에 이르러는 또 문중자(文仲子)에 없는 바라, 그러나 이로서 미루어 말하건대 정주(程朱) 전후(前後)에 출등한 인물이라고 하여야 가하다. 다만 공이 세(世) (786) 녹(祿)의 신(臣)으로 성명(聖明)의 세를 만나면 가히 하고픈 일을 하여 교연(皎然)히 존주(尊周)의 대의를 폄이 있을 것이어늘, 수록(隨錄)을 안고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모책(謀策)을 드리고 임금을 개유(開喩)한 자로 더부러 한가지로 말하리오?   공의 향년이 52라, 부음(訃音)이 들림에 원근(遠近)에서 회곡(會哭)한 자 수백여인이러라, 죽산(竹山) 용천리(湧泉里) 정배산(鼎排山)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배위(配位)는 풍산심씨(豐山沈氏)니 철산부사(鐵山府使)로 증병조참판(贈兵曹叅判) 항(閌)의 따님인데 부덕이 있어 공을 규도(䂓度)로 받들어 공의 뜻을 도와 이루었다. 일남과 육녀를 두니 남(男)은 하(昰)오, 여(女)는 정광주(鄭光疇)와 박(朴) 삼(森)과 백광저(白光著)에게 출가하고, 하(昰)가 사남일녀를 생하니 남(男)은 응린(應麟) 응룡(應龍) 응봉(應鳳) 응붕(應鵬)이다.

후학복천오광운찬

 

磻溪柳公馨遠行狀

 

磻溪柳先生諱馨遠字德夫文化人也始祖諱車達家甚富佐麗太祖出征多出車乘累功爲大丞號統合三韓功臣自此奕世貴顯入我 朝有諱寬佐 世宗爲右議政諡文簡號夏亭淸德載 國乘生諱 (778) 季聞刑曹判書修文殿提學諡安肅五嬗而諱湋縣令生諱成民正郞 贈兵曹叅判生諱登文科入翰苑爲檢閱娶右叅贊李志完之女以天啓壬戌生公檢閱公有遠大之望不幸二十八而卒公生纔二歲能知悲哀號慕不食肉人異之三四歲凡遇日用事物必問本末至其極處雖草木禽虫皆不忍傷害五歲通算數旣知讀書自立課程雖羣兒喧㒮其傍而若不聞也就學於伯舅李監司元鎭姑夫金判書世濂一讀輒誦七歲讀禹貢至冀州翻然起舞問之對曰不圖二字之尊重至於此也十歲善屬文通經傳百家論難出人意表李金二公歎曰此等才古或有之耶十三四慨然有慕聖賢之志專心爲己之學於擧業不屑爲也丙子避虜亂將王父母母夫人及兩姑以行王父年老三家家屬仗公一丁男時年十五歲有强盜出山谷攔道一行懼公挺身曰人孰無父母爾無震驚我父母行裝從汝取去盜感其語散去二十一歲嘆曰士志於道而未能立者志爲氣惰之罪也夙興夜寐未能也正衣冠尊瞻視未能也事親和顔色未能也居室敬相對未能也因作四箴而自警自是兢兢然惟其言是踐有親癠問醫醫素驕及見公曰視此人而不盡心於命劑者非人子也家貧竭力致甘旨或不繼戚然出涕在京名譽蔚然一時名士皆願與之交若貴要者求一見不得也讀書忘寢食馬上常沉思馬或從他道不覺也甲申 大明亡是歲丁王母憂戊子丁母夫人憂辛卯丁王父憂執喪盡禮旣免喪和陶元亮歸去來辭南歸于扶安縣愚磻洞居焉公之志可知也地濱海多產魚鼈每遇佳味變色曰親在恒憂不得此今得此誰爲輒涕泣不忍食有一姊在京恨不與同衣食以畿庄糓歸之公旣志學甚早又自神州陸沉超然遐擧益專精於學問刻意覃思夜以繼日枕上有妙契者夜三四起取燭而疾書之每日暮曰今日又虛度矣義理無窮歲月有限古之人以何精力所成就如彼每日昩爽而起盥洗衣冠謁家廟非甚病雖寒暑風雨未嘗或廢退坐書室坐必有常處室在松臺下竹林中藏萬卷書籖軸整齊竹扉常掩麋鹿晝行公顧而樂之曰古人云靜而後能安能慮旨哉言乎又嘗謂人曰工夫雖貫動靜非靜無以爲本不但學者爲然造化流行動靜互爲其根然其主處在靜故曰不翕聚則不發散又曰物各止其所亦主靜之意聖人井田之法本地而均人由靜璪之意也每月夜彈琴而歌歌用周詩音用漢語聲律若出金石其襟韻飃灑眞天下之高士也內外斬斬如賓而恩義岳家務細大皆有規制奴僕各事其事而門庭落然若無事 (779) 者巫瞽不入門家人不知祈禱隣有叢祠人甚奔波公毀其堂伐其樹而弊遂止及門者非僻自消鄕黨皆化焉其平居濟人及物之仁多有感動人者時 永曆皇帝卽位於南方或謂之亡或謂之不亡壬寅北使頒赦來者至謂之擒焉我國猶未知其虛實公慟之丁未有唐船漂泊耽羅皆福建人華制亦不薙髮公往見操漢音問 皇帝事中有能文者鄭喜曾勝等流涕言 永曆皇帝保有南方四省今年爲永曆二十一年云取裝中曆書示之果然公悲喜作詩性愛山水足跡殆遍東方名勝所居愚磻亦絶佳提携冠童上下諷詠天下之物無足以攖其心者而若其慈悲一念不以出處而有間故其稽遺經而得先聖之意原人情而闡天理之正貫古今而審治亂之所由因事物而察本末之所係杜門著書寓之空言者無非出於濟世拯民開物成務之至誠嘗曰古今此天地此人物先王之政無一不可行者君子之爲天下非有爲而爲自是天理合如此又曰古人制法皆爾揆事故簡易易行後世之事皆緣事爲法故百道防巧只益紊亂耳又曰治天下不公田不貢擧皆苟而已雖有善政徒爲虛文公田一行百度擧矣貧富自定戶口自明軍伍自整惟如此而後敎化可行禮樂可興不然大本已紊無復可言又曰王政在制民產制民産在正經界自孟子時暴君汚吏惡其害己皆去其籍及經秦火古聖人制度節目蕩然無一存者聖賢經傳只論出治之源而已漢後數百千年聖王之道不行者皆由田制之壞而卒至於戎狄猾夏生民塗炭如我國奴婢漸多良民漸縮捜括軍丁隣族受害譬如亂絲不捄其本無以理緒議者每謂山溪之險難於均田然箕子已行之平壤矣遂取田字形畫爲四區區皆百畝畝不用箕子七十畝而用周家百畝之制如李靖爲地狹故變八陣爲六花之意焉至於敎士選才命官分職頒祿制兵造幣通貨無不次第條例節目纎悉而曰天下之道本末大小未始相離星失其當則衡不得爲衡寸失其當則尺不得爲尺也號其書曰隨錄或讀古今典籍或因思慮所及隨得隨錄者也其規模廣大條例縝密可謂擴前賢之未發而我東方所未有之書也然覽公理氣總論論學物理經說等書然後知隨錄之有本而天德王道之不二也又著正音指南武經四書輿地誌郡縣之悰書其論陰陽律呂兵謀師律星緯之躔度山川之形便如指諸掌公可謂體用博約之通儒而其爲我國分野之說京畿以北爲尾箕南爲箕斗者前公千百年未嘗有道此者而公始言之必有後世之具眼矣 國舅閔維重兄弟於公爲從叔 (780) 欲薦行誼公正色曰叔非知我者也遂不果薦後數三宰臣薦公曰潛心義理孝友出天公不樂曰我不知時宰時宰豈知我也公魁顔廣顙身長骨秀聲音宏亮美鬚髥眼光映人威儀動止絶異於人少日入塲屋邂逅者心醉至有棄試劵而相隨者晩來充養益甚神定氣和面粹背盎望之已知其有道者以公禀賦之異抱負之大求誌善使東民無福惜哉噫所貴乎髙尙者以其有達施之具而能卷而懷之也世所謂髙尙者果能盡有其具乎有其具而不出者鮮矣然具有大小小者易措大者難施有其具而不出者必其具之大者也若公之所欲爲者惟三代以上人許之公豈捨所學從人者耶宜公之不出也况後之尙論者以其時考之則必有起立於先生之風者矣許眉叟嘗許以王佐才確論也世又有以公比文仲子者古今人精神力量雖不可知而公之惻怛純正恐非文仲模擬雜駁之倫至若理氣論學等說又文仲子所無然此則諉之曰所生者程朱前後可也第公以世祿之臣逢聖明之世可以有爲皎然有尊周之大義抱隨錄而歿此豈可與獻策開皇者同日道哉公得年五十二訃聞遠近會哭者數百餘人葬于竹山湧泉里鼎排山酉坐卯向之原配豐山沈氏鐵山府使 贈兵曹叅判閌之女也有婦德奉公規度以助成公志有一男六女男昰女適鄭光疇次適朴森次適白光著昰生四男一女男應麟應龍應鳳應鵬

後學福川吳光運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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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279  반계수록해제 (磻溪隨錄解題 ) 287     편집인 2012/11/28  [683]  
278  반계류공형원전 (磻溪柳公馨遠傳) 286     편집인 2012/11/28  [923]  
 반계공(형원)행장 (磻溪公(馨遠)行狀) 285     편집인 2012/11/28  [1396]  
276  좌윤공(봉징)약사 (左尹公(鳳徵)略事) 284     편집인 2012/11/28  [845]  
275  갑산부사공(구징)약사 (甲山府使公(龜徵)略事) 283     편집인 2012/11/28  [977]  
274  적암공(상진)사적 (適菴公(尙軫)事蹟) 282     편집인 2012/11/28  [729]  
273  결청재공(담후)행장 (潔淸齋公(譚厚)行狀) 281     편집인 2012/11/28  [1455]  
272  황해도도사용당공(인량)묘표 (黃海道都事龍塘公(寅亮)墓表) 280     편집인 2012/11/28  [1032]  
271  대사간공(상재)묘표 (大司諫公(尙載)墓表) 279     편집인 2012/11/28  [1044]  
270  영의정충간공(상운)묘갈명 (領議政忠簡公(尙運)墓碣銘) 278     편집인 2012/11/28  [1240]  
269  백암공(인)약사 (白菴公(忍)略事) 277     편집인 2012/11/28  [959]  
268  치헌공(세훈)묘갈명 (恥軒公(世勛)墓碣銘) 276     편집인 2012/11/28  [1102]  
267  원주공(철)약사 (原州公(澈)略事) 275     편집인 2012/11/28  [987]  
266  수신재공(사신)칠세연행 (守愼齋公(士信)七世聯行) 274     편집인 2012/11/28  [1159]  
265  진해공(지정)약사 (鎭海公(之禎)略事) 273     편집인 2012/11/28  [807]  
264  운강공(항)행장 (雲江公(沆)行狀) 272     편집인 2012/11/28  [847]  
263  반곡공(도)묘갈명 (盤谷公(棹)墓碣銘) 271     편집인 2012/11/28  [1027]  
262  백석공(즙)묘갈명 (白石公(楫)墓碣銘) 270     편집인 2012/11/28  [979]  
261  초료당공(덕용)묘갈명 (鷦鷯堂公(德龍)墓碣銘) 269     편집인 2012/11/28  [1033]  
260  칠송공(곤수)묘지 (七松公(鵾壽)墓誌) 268     편집인 2012/11/28  [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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