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포럼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아이디 패스워드    
 
   
 
     
 

          
View Article  
  작성자  편집인
  제    목  반계수록해제 (磻溪隨錄解題 ) 287


반계수록해제

磻溪隨錄解題 


  『磻溪隨錄』은 우리나라의 實學의 創始者라고까지 일컬어 지고 있는 柳馨遠의 著作이다. 柳馨遠은 그의 生存時에 十數種의 著述을 남겨 놓았으나 오늘날까지 보존 전하여지는 것으로는 이 隨錄하나 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柳馨遠의 思想體系를 파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그의遺著가 된 셈이다.
  『磻溪隨錄』은 언제 著述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 책에 明示되어 있지 않으니 명확히는 알수 없고 따라서 學者들 사이에 여러가지로 異說이 있다. 어떤 분은 孝宗 3년(1652)에 원고를 쓰기 시작하여 顯宗 11년(1670)에 완성하였을 것이라고 하고, 또 다른 분은 그가 이 책을 서술하기 시작한 것은 빨라도 顯宗 元年(1660)이후 顯宗 4년(1663)에 이르는 시기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推定은 그의 文章과 이 책에 수록된 내용과 그의 成長經歷 및 시대적 배경 등에서 얻어진 결론이나 아직까지 定說은 없다고 하겠다.   『磻溪隨錄』은 그 것이「隨得錄之」라고 하여 느끼는 데로 적어둔 것이라고는 하나 今日의 隨筆 등 속과는 다르며 당시의 國家政䇿을 비판하고 救世濟民을 위한 강렬한 革新䇿을 제안한 것인 만큼 결코 사사로운 備忘錄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이 서술은 그의 生存時에는 刊行되지 못하였으며 爲政者들의 주의를 끌지 못하였다.   肅宗 4년(1678)에 그의 벗 裵尙瑜는 『磻溪隨錄』 중의 七個項目의 改革䇿을 들어 그 實施를 論한바 있었으나 國䇿에 반영되지 못하였고, 肅宗 20년(1694)에는 盧思孝 등의 儒生들이 上疏文과 함께『磻溪隨錄』의 寫本 일부를 國王에게 올렸으나 歡心을 받지 못하였고, 그 후 英祖 17년(1741)에 承旨 梁得中에 의하여 進呈된바 비로소 王의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英祖 45년(1769)에 王은 儒臣 洪啓禧에 命하여 이를 刊 (793) 行하게 하였으니 이는 柳馨遠이 별세한지 거의 一세기가 지난 뒤의 일이었다. 이때에 간행된『磻溪隨錄』은 各處의 史庫에 分藏되었던 것이니 이것이 今日에 傳하여지게 된 것이다.   『磻溪隨錄』의 저자인 柳馨遠은 光海君 14년(1622) 正月에 서울 貞陵洞에 있는 外家에서 태어났다. 그의 父는 翰林의 檢閱을 지낸 柳 이고 그의 母는 右叅賛 李志完의 딸이었다.   柳馨遠의 字는 德夫요 號는 磻溪이며 本貫은 文化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나라에 功을 세워 벼슬을 지낸 士大夫家門이었으며 그의 代에 와서도 家勢는 넉넉한 편이었다.   그는 士大夫의 家門에 태어났어도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평생을 讀書와 著述로 보냈다.   그가 官界에 나서지 않은 것은 당시의 社會事情이 너무나 어지러워서 官界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는 이유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그의 성품이 벼슬보다도 草野에서 백성과 더불어 즐기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庶民적인 기질의 탓이었다고 하겠다.   柳馨遠은 일생을 村夫와 더불어 어울리면서 讀書와 著述에 精力을 다하다가 顯宗 14년(1673)3月에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슬하에 一男六女를 두었고, 그의 遺骸는 京畿道 竹山 湧泉里 鼎排山에 있는 先塋 아래 安葬되었다.   柳馨遠이 학문에 힘쓰고 또 愚磻洞에서 執筆에 전념하고 있은 17세기 中葉은 社會經濟적으로 多岐多端한 시기였고 또 思想적으로는 새로운 思潮가 움트기 시작한 때였다.   柳馨遠이 어렸을 때 訓導를 받은 스승은 李元鎭과 金世濂이었다. 李元鎭은 柳馨遠의 外叔으로서 監司까지 지낸 사람이요 「하멜」의 漂流當時에는 濟州牧使로 在任하고 있었으므로 西歐의 문명에 대해서는 당시로서는 밝은 편이었으나 그 자신의 思想은 朱子學에 執念하고 있었다. 金世濂은 柳馨遠의 姑母夫로서 日本에 使臣으로 왕래한 일도 있고 淸나라와 (794) 의 國交에 밝은 사람이었으나 그도 역시 전통적인 儒學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 두 스승은 柳馨遠에게 士大夫로서의 敎養을 길러주는데 중점을 두었던 것이며, 柳馨遠이 家廟祭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朱子學에 대한 깊은 지식을 터득한 것은 이 두 스승의 訓導의 所產이라고 하겠다. 柳馨遠의 저서중에는 『理氣總論』,『論學物理』,『經問答』,『朱子纂要』등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전통적 儒學敎育의 結晶이다. 柳馨遠의 두 스승은 이와 같이 전통적인 儒學者였고 그에 대한 訓育도 徹頭徹尾 儒學敎理에 바탕을 두었다고 하더라도 이 두 스승은 당시로서는 外國文化에 접할 기회가 많았던 것이니, 그들과의 日常對話 속에서 새로운 外國文化에 대한 동경과 관심이 싹텄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된다.   柳馨遠의 實事求是의 학문적 기초는 그가 愚磻洞에 있을 때 탐독한 淸의 考證學과 宣祖이래 소개된 科學書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淸代의 考證學은 宋·明代의 經學解釋에 있어서 實事考證을 爲主한 學風이었는데 그 후 대상을 넓혀서 歷史學, 地理學, 文字學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方法論을 개척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학문의 方法論은 燕京使臣들의 왕래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전해졌으며, 柳馨遠을 비롯한 實學派學者들의 學風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되었다. 또 西歐의 科學知識은 中宗· 宣祖 이래 李 碩, 李晬光 등과 그 후 우리나라로 건너온 西歐人들에 의하여 소개된 것이며 이것이 또한 淸의 考證學과 더불어 實學者들의 思想적 기반이 되었다. 전통적인 儒學思想은 이미 매너리즘에 빠졌고 壬辰亂 이후 혼란된 社會의 救濟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있던 때에 이러한 新思潮는 社會革新을 갈망하는 學徒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柳馨遠의 저술로 알려진 『東史綱目條例輿地志』,『歷史東國可攷』,『書說書法』,『地理群書』 등은 그가 淸의 考證學研究에서 이어 받은 新學風의 產物이라고 보겠다. 그러나 그의 晚年의 著作으로 알려진 『磻溪隨錄』은 그가 자주 地方을 遊覽하면서 民情을 살피고 특 (795) 히 愚磻洞에서 농민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얻어진 그의 濟世救民論의 集大成이라고 하겠다.   柳馨遠이 생존하여 있은 17세기 中葉은 壬辰 · 丙子兩亂을 겪은 뒤를 이은 혼란이 極에 달한 시대였다. 兩次의 戰亂으로 많은 人命이 殺傷되었고 離鄕하는 농민이 많아 農土는 황폐화하였다. 壬辰亂 직전인 宣祖 24년에는 國家의 土地台帳에 등록된 田地는 一百五十一萬五千五百結이었고 實田은 一百萬九千七百結이었으나 壬辰亂을 겪은 후의 光海君 三년에는元帳에 등록된 田結은 五十四萬二千結이고 實田은 겨우 二十九萬餘結에 불과했다. 또 戰亂을 겪는 동안 土地制度가 문란한 틈을 타서 權門勢家들의 土地兼倂은 더욱 甚하여졌으며 賦歛을 과중히 하여 한편으로는 백성을 수탈함이 우심하여진 반면에 國庫의 稅穀은 줄어들어 財政은 파탄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國家는 三手米· 結錢 등 새로운 稅目을 만들어 農民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져만 갔다. 거기에 더하여 還糓制度는 農民收奪의 高利貸로 변하여 그 數量은 九百九十九萬石에 달했고 이에 대한 利息만도 매년 七十萬石이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판국에 官界는 더욱 부패하여 수회가 성행하고 鄕品冷族들도 官吏를 매수하여 양반을 칭하고 身役을 피하고 따라서 軍役도 피폐한 農民만이 專擔하게 되어 있었다.   柳馨遠은 이러한 社會의 實情을 보고 크게 뜻한 바 있어 『磻溪隨錄』의 執筆에 착수하였으며 여기에서 그는 혁신적인 濟世救民論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그는 草野에 묻혀 社會秩序紊亂의 직접적인 被害者인 農民과 더불어 起居함으로써 그의 思想은 현실에 뿌리를 박고 그로부터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磻溪隨錄』은 總二十六卷, 十三册 및 補遺로 되어 있다. 그 編制를 보면 田制,敎選制, 任官制, 職官制, 祿制, 兵制의 六部門과 미완성인 補遺 「郡縣制」一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各編에서는 攷說을 붙이고 韓國과 中國의 옛 文獻을 引擧하면서 그가 주장하는 論說의 이론적 뒷받침을 삼았다. (796)   그는 田制의 정비 위에 國民의 부담과 國家의 財政을 論하고 그 기초 위에 國防과 官制를 바로 세울 것을 주장한다. 그는 이 뜻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록 國家를 다스리기를 원하는 王이 있어도 만일 土地制度를 바로잡지 않으면 백성의 產業은 마침내 영구히 안정시키지 못하고 賦稅와 力役을 고르게 하지 못하고 軍隊를 정돈하지 못하고 訟事를 멈추지 못하고 刑罰을 줄이지 못하고 賂物을 막지 못하고 風俗을 도탑게 하지 못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하고서 어찌 능히 政治와 敎育을 잘해 나갈 者가 있으리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土地는 天下의 大本이니 큰 근본이 이미 바로 서면 一百制度가 따라서 하나도 바로 서지 못함이 없고 큰 근본이 이미 헝클어지면 一百制度가 따라서 하나도 바로 섬이 없는 까닭이다』   柳馨遠의 이와 같은 思想은 壬辰·丙子兩亂 이후 田制紊亂으로 國家의 모든 일을 그르치고 있음을 직접 목격한 데서 얻어진 결론이다. 그리하여 그는 王道之本은 田制를 바로잡는 데 있다고 보고 均田制를 내용으로 하는 田制改革案을 제창하였다. 柳馨遠의 田制改革에서는 農民給田이 중심이 되고 있다. 즉 농민에게는 每一人에 一頃의 토지를 주고 이로써 農家의 生計를 도모케 하는 동시에 그 土地로부터 田稅를 받아 國家財政을 튼튼케 하며 이 土地를 기반 삼아 賦役·兵役·貢物을 納付시킨다는 것이다. 一頃의 土地를 갖는 農家 四戶를 한 단위로 佃이라 하고 一佃을 한 단위의 保로 삼아 保로부터 一丁의 兵役夫를 徵集하자는 것이다.   그는 또 農民에게 토지를 주는 동시에 官吏들에게도 토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官吏給田은 종래의 科田과는 달라서 토지를 官吏로 하여금 경작케 하는 것이며 農民地에 대한 收租權은 아니다. 즉 官吏는 分給된 토지를 家率奴婢를 시켜 경작케 하고 官에서 물러나도 이를 國家에 도로 바치지 않으므로 이 土地는 文字 그대로 私有地가 된다. 이것은 朝鮮朝 後期에 이미 私田의 私有地化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정책이라고 보겠다. 그러 (797) 나 柳馨遠은 官吏에게 주는 田地에 대해서는 役丁이나 兵丁을 징집치 말라고 주장한다. 즉 士夫는 선비를 기르니 兵役, 賦役을 면제할 것이며 농민이 응당이 役을 부담하여야 하는 것은 身分과 階層이 구분되는 근본이라고 설명한다. 柳馨遠이 항상 농민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서민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는 하나 身分階層의 구별은 이처럼 엄연히 가려내고 있으니 그는 아직도 封建秩序의 테두리를 깨뜨리고 나갈만한 革新論者는 못되었다고 하겠다.   柳馨遠의 思想은 오히려 그를 뒤따른 後學들에 의하여 더욱 전진하고 발전했다. 그의 뒤를 이은 星湖 李 瀷과 茶山 丁若鏞은 柳馨遠의 學統을 계승하고 實學을 하나의 學派에까지 이끌어 올리는 데 성공한 학자들이다. 李 瀷의 『星湖僿說』이나 丁若鏞의 『經世遺表』,『牧民心書』등은 모두『磻溪隨錄』에서와 한가지로 당시의 당면한 政治· 經濟· 社會· 文化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건설적인 비판을 시도한 著作들이다. 丁若鏞은 柳馨遠보다 一세기나 뒤에 나타난 學者이다. 그 사이에 實學의 思想도 많이 달라졌다. 제도는 침체되어 크게 변한 것은 없었으나 社會生活· 經濟生活의 변천과 더불어 思想은 이미 자라서 새로운 거센 思潮를 이루었고 庶民階層도 그대로 억압만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時代思潮의 변천과 더불어 李 瀷, 朴趾源, 丁若鏞, 朴齊家 등 일련의 實學者의 社會批判은 보다 더 날카로와 졌다.   柳馨遠은 支配層인 官吏에 대한 給田을 주장하면서도 그들에게 대한 兵役·賦役의 면제를 당연한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社會階層의 구분은 엄격히 지켜왔으나 그보다 一세기를 지난 후의 丁若鏞은 선비를 반드시 神聖不可侵의 社會階層으로는 容認하지 않았다. 그는 『대체 선비란 어떤 人間들이기에 손과 발을 놀려두고 남의 땅과 財物을 삼키고 있는 것인가?』라고 하면서 士大夫의 無爲徒食을 가차 없이 힐난하였다.   柳馨遠에서 丁若鏞에 이르는 기간에 實學思想도 많은 변천을 보이고 있으나 전통적 儒學 (798) 의 訓導를 받으며 성장한 柳馨遠이 과감하게 新思潮를 받아들여 現實을 直視하고 날카롭게 舊弊를 분석 비판하고 참신한 改革論을 제창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傳統思想에서 近代思想에로의 轉換期에 先導적 사명을 충분히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이후 각 學問分野에서 革新思想을 제창한 수많은 著作이 서술되었는데 이러한 新思潮는 직접이건 혹은 간접이건 柳馨遠의 『磻溪隨錄』에서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磻溪隨錄』은 실로 韓國近代史硏究의 길잡이가 되는 귀중한 史料이다.

趙璣濬謹述 

......................................................
[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반계수록해제 (磻溪隨錄解題 ) 287     편집인 2012/11/28  [682]  
278  반계류공형원전 (磻溪柳公馨遠傳) 286     편집인 2012/11/28  [923]  
277  반계공(형원)행장 (磻溪公(馨遠)行狀) 285     편집인 2012/11/28  [1396]  
276  좌윤공(봉징)약사 (左尹公(鳳徵)略事) 284     편집인 2012/11/28  [845]  
275  갑산부사공(구징)약사 (甲山府使公(龜徵)略事) 283     편집인 2012/11/28  [977]  
274  적암공(상진)사적 (適菴公(尙軫)事蹟) 282     편집인 2012/11/28  [729]  
273  결청재공(담후)행장 (潔淸齋公(譚厚)行狀) 281     편집인 2012/11/28  [1455]  
272  황해도도사용당공(인량)묘표 (黃海道都事龍塘公(寅亮)墓表) 280     편집인 2012/11/28  [1032]  
271  대사간공(상재)묘표 (大司諫公(尙載)墓表) 279     편집인 2012/11/28  [1044]  
270  영의정충간공(상운)묘갈명 (領議政忠簡公(尙運)墓碣銘) 278     편집인 2012/11/28  [1240]  
269  백암공(인)약사 (白菴公(忍)略事) 277     편집인 2012/11/28  [959]  
268  치헌공(세훈)묘갈명 (恥軒公(世勛)墓碣銘) 276     편집인 2012/11/28  [1102]  
267  원주공(철)약사 (原州公(澈)略事) 275     편집인 2012/11/28  [987]  
266  수신재공(사신)칠세연행 (守愼齋公(士信)七世聯行) 274     편집인 2012/11/28  [1159]  
265  진해공(지정)약사 (鎭海公(之禎)略事) 273     편집인 2012/11/28  [807]  
264  운강공(항)행장 (雲江公(沆)行狀) 272     편집인 2012/11/28  [847]  
263  반곡공(도)묘갈명 (盤谷公(棹)墓碣銘) 271     편집인 2012/11/28  [1027]  
262  백석공(즙)묘갈명 (白石公(楫)墓碣銘) 270     편집인 2012/11/28  [978]  
261  초료당공(덕용)묘갈명 (鷦鷯堂公(德龍)墓碣銘) 269     편집인 2012/11/28  [1032]  
260  칠송공(곤수)묘지 (七松公(鵾壽)墓誌) 268     편집인 2012/11/28  [959]  

    [1][2][3][4] 5 [6][7][8][9][10]..[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