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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사헌부장령관재공(정수)묘갈명 (司憲府掌令觀齋公(廷秀)墓碣銘) 188


사헌부장령관재공
(정수)묘갈명

司憲府掌令觀齋公(廷秀)墓碣銘


 
   형조판서(刑曹判書) 류공(柳公) 관(灌)이 그 선고비(先考妣)의 행장(行狀)을 자신이 기술(記述)하여 나에게 그 묘갈명(墓碣銘)을 청하는 바, 나와 판서공(判書公)과는 친우(親友)인지라 감히 글이 옹졸하지만 사양하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류씨(柳氏)는 문화현(文化縣)의 망족(望族)이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남방(南方)을 정벌할 때 휘 차달(車達) 이란 분이 있어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軍糧)을 조달함으로써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號)를 내렸는데 문화류씨(文化柳氏)가 이로부터 현달(顯達)하였다. 휘 경(璥)이란 분이 있어 고종조(高宗朝)를 당하여 권신(權臣) 최(崔) 의(竩)를 죽이고 정권을 왕실에 회복시켰으며 관직이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고 시호(諡號) 문정(文正)이니 곧 공의 구대조(九代祖)이다. 고조(高祖)는 휘 양(亮)이니 홍무(洪武)(명(明) 태조(太祖)) 1382 임술(壬戌), 고려(高麗) 우왕(禑王) 8년 과거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고 본조(本朝)(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策錄)되어, 관직이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올라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봉(封)하고 시호(諡號)는 충경(忠景)이다. 증조(曾祖)는 휘 좌(佐)니 전사령(典祀令)이며, 조(祖)는 휘 상영(尙榮)이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증병조참의(贈兵曹參議)이며, 선고(先考)는 휘 주(霔)이니 금천현감(衿川縣監)으로 증리조참판(贈吏曹參判)이다. 참판(參判)이 호조참판(戶曹參判) 신계조(辛繼祖)의 따님과 결혼(結婚)하여 경태(景泰)(명(明) 경제(景帝)) 1451 신미(辛未), 조선(朝鮮) 문종(文宗) 원년 11월 초이일에 공을 출생하였다.   공의 휘는 정수(廷秀)요, 국준(國俊)은 그 자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학문에 힘써 과거 공부를 익히더니 성화(成化)(명(明) 헌종(憲宗)) 1474 갑오(甲午), 성종(成宗) 5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1483 계묘(癸卯)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전교서부정자(典校署副正字)에 보직(補職)되었더니, 이듬해 나라에서 전교서(典校署)의 명칭을 교서관(校書館)으로 고치고 공을 박사에 승진시켰다.   1486 병오(丙午)에 모친 상을 당하여 1489 기유(己酉)에 복제를 마치고 남부주부(南部主簿)에 임명되었다가 1490 경술(庚戌)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옮겼더니 곧바로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옮기었다. 1491 신해(辛亥)에 영안도도사(永安道都事)로 나가서 공이 연변(沿邊)의 읍성(邑城)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였는데 자비로써 여러 인부(人夫)를 부리고 민첩하게 일을 처리하여 역사를 마치니 백성들이 괴로움을 모르고 변경에서 기쁘게 노래하였다. 이에 감사(監司) 성공(成公) 준(俊)이 공(公)을 매우 중히 여기고 그 사유를 조정에 알려 유임의 명이 내렸으니 특이한 은전이었다. 1494 갑인(甲寅)에 내직으로 들어와 봉상사판관(奉常寺判官)이 되었더니 곧바로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제수(除授)되었다.   연산군(燕山君) 1497 정사(丁巳)에 봉상사첨정(奉常寺僉正)에 승진하여 조봉대부(朝奉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1498 무오(戊午)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는데, 이해에 김종직(金宗直)의 사옥이 일어나 폐주(廢主) 연산군(燕山君)이 종직(宗直)을 육시(戮尸)하라 의논하매 온 조정이 모두 두려워 감히 한 사람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공이 분연(奮然)히 일어나 여러 관료들을 거느리고 항론(抗論)하여 마지않으니, 폐주(廢主)가 노(怒)하여 이산(理山)(초산(楚山)) 고을로 장배(杖配) 하였더니 이듬해 가을에 사면(赦免)되어 돌아왔다.   1501 신유(辛酉) 9월15일에 병환(病患)으로 북부(北部) 관광방(觀光坊)에서 졸(卒)하여 12월17일에 고양(高陽) 관아(官衙)의 남쪽 원당리(元堂里) 술좌진향(戌坐辰向)의 언덕에 장례를 지냈는데 향년 51세였다.   공이 뜻을 돈독히 하여 학문에 힘쓰되 특히 성리서(性理書)를 깊이 연구하여 오묘(奥妙)한 뜻을 탐색하지 않음이 없으니 일시(一時)의 명사(名士)들이 모두 추복(推服)하였다. 단방(端方)하고 정직함은 그 천성이었으니, 일찌기 회시(會試)에 응시하여 강경(講經)을 하려던 즈음에 성균관(成均館)의 관노(官奴)가 시장(試場)을 드나들며 강(講)에 응하는 편장(篇章)을 종이에 몰래 써서 많은 보수(報酬)를 요구하며 파니, 선비들도 또한 이로 말미암아 혹 과거에 급제하여 좋은 벼슬에 오르는 자가 있었다. 공이 정색하고 꾸짖기를「어찌 가히 속임수를 써서 요행으로 출세하기를 바라리요?」하였다. 그 해에 과거에 등제하니 선비들이 그 지조를 중히 여겨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하고 있다.   평소에 청렴하고 신중하니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간섭하지 못하였다. 공이 관직에서 물러나서도 가사를 묻지 않고 오직 서책을 대하여 자제를 가르칠 따름이었다.   가정(嘉靖)(명(明) 세종(世宗)) 1533 계사(癸巳), 중종(中宗) 28년에 예조판서(禮曹判書) 겸지(兼知) 경연(經筵) 춘추관(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에 추증(追贈)되었는바, 감찰(監察) 이하 증직(贈職)은 모두 공의 아들 판서공(判書公)이 영귀(榮貴)한 때문이다.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박씨(朴氏)는 밀양(密陽) 대성(大姓)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우정승(僉議右政丞) 화(華)의 후손이니, 증조(曾祖) 휘 의림(義林)은 신녕현감(新寧縣監)으로 증리조참판(贈吏曹參判)이요, 조(祖) 휘 채(綵)는 처사(處士)로 벼슬하지 않았고, 부(父) 휘 윤손(潤孫)은 벽단병마첨사(碧團兵馬僉使)이며, 모(母) 숙부인김씨(淑夫人金氏)는 수의부위(修義副尉) 인중(仁仲)의 따님이다.   부인이 효성(孝誠)으로 시모(媤母)를 섬기고 근엄(謹嚴)으로 자녀를 가르치며 화목(和睦)으로 종족(宗族)을 대하는 한편 근검한 성품은 늙기에 이르도록 쇠(衰)하지 않았다. 향년이 이미 높고 여러 아들들이 모두 벼슬길에 나갔으며, 특히 판서공(判書公)은 조정(朝廷)의 중신(重臣)으로 좋은 반찬을 갖추어 봉양(奉養)하니 세상에서 그 영화(榮華)를 우러러 마지않았다.   가정(嘉靖) 1536 병신(丙申) 중종(中宗) 31년 10월22일에 수(壽) 89세로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니 동년(同年) 12월초9일에 공의 무덤에 예(禮)로써 장사(葬事)하였다.   오남이녀를 두었으니 장남 환(渙)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요, 차남 함(㴠)은 전설사수(典設司守)이고, 삼남 엄(渰)은 사복사부정(司僕寺副正)이요, 사남은 곧 관(灌)이니 정묘년(丁卯年)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였고, 오남 심(深)은 진용교위(進勇校尉)이며, 장녀는 충의위(忠義衛) 윤(尹) 종(悰)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사인(士人) 조(趙) 위(偉)에게 출가하였다.
 명(銘)에 이르노니, 
 
 옥(玉)이 형산(荆山)에 있어도 그 빛은 찬란하고, 
 
 칼이 풍악(豐嶽)에 묻혔어도 광채(光彩)는 별을 쏘도다. 
 
 사람이 진실로 선(善)을 쌓음이 있으면, 그 경사(慶事)가 멀리 미치도다. 
 
 어찌 훌륭한 재주를 타고 나서, 그 나이는 인색하게도 짧았던가? 
 
 공(公)이 조정(朝廷)에 있어서는 굳은 마음이 변치 않았고, 
 
 공(公)이 집에 있어서는 그 뜻을 삼가 밝게 살폈도다. 
 
 지조(志操)가 굳고 행실(行實)이 발라 천지(天地)를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었도다. 
 
 그 재덕(才德)을 크게 베풀지 못하고, 후손에게 물려 주었도다. 
 
 자손을 많이 두었으니 하늘의 보답(報答)이 두터웠도다. 
 
 은총(恩寵)이 높고 크게 미쳐 증직(贈職)이 참으로 높았도다. (484) 
 
 관작(官爵)을 하사(下賜)함이 무엇인가? 빛나고 빛나는 고관(高官)이로다. 
 
 저 아름다운 부인이여! 실로 공(公)의 어진 배필(配匹)이로다. 
 
 시서(詩書)로 아들들을 가르침은 진실로 내조(內助)에 인함이로다. 
 
 나무 심는데 비유할진대, 북돋고 또 물주는 것 같도다. 
 
 가문(家門)의 명성(名聲)을 능히 떨쳐, 그 덕(德)을 덜지 않았도다. 
 
 원당산(元堂山)이 두텁고 두터우며, 표석(表石)이 높고 높도다. 
 
 행적(行蹟)을 이 비(碑)에 새기니 천년토록 없어지지 않으리라.

대제학소세양찬

 

司憲府掌令觀齋柳公廷秀墓碣銘

 

刑曹判書柳公灌自述其先考妣行狀請余銘其墓余於判書公友也敢以文拙辭謹按柳氏文化縣望族高麗太祖征南時有諱車達多出車乘以通糧道賜三韓功臣號文化之柳自此顯有諱璥當高宗朝誅權臣崔竩復政王室官至僉議中贊諡文正卽公之九代祖也高祖諱亮魁洪武壬戌科入本朝策佐命勳官至議政府右議政封文城府院君諡忠景曾祖諱佐典祀令祖諱尙榮司憲府監察 贈兵曹叅議考諱霔衿川縣監 贈吏曹叅判叅判娶戶曹叅判辛繼祖之女以景泰辛未十一月初二日生公公諱廷秀國俊其字少孤力學習擧子業中成化甲午進士登癸卯文科補典校署副正字翌年改署爲校書館例陞博士丙午丁內艱己酉服闋拜南部主簿庚戌移司諫院正言俄遷刑曹佐郞辛亥出爲永安道都事公監築沿邊邑城慈以使衆敏以幹事功就緒而民不知勞邊境歡謡監司成公俊甚器之具由上其事命仍任異數也甲寅入爲奉常寺判官㝷拜吏曹正郞丁巳陞奉常寺僉正階朝奉戊午拜司憲府掌令是年金宗直史獄起廢主議戮宗直屍擧朝危懼莫敢開一口公奮然率諸僚抗論不已主大怒杖配理山郡翌年秋會赦放還辛酉九月十八日病卒于北部觀光坊第十二月十七日葬于高陽治南元堂里戌坐辰向之原享年五十一公篤志苦學尤邃於性理之書無不探賾藴奥一時名流咸所推服至於端方正直其天性也嘗試會圍將講經成均館奴出入試塲潛寫應講篇章于紙邀求厚酬士亦由此或有取第躋美仕者公乃正色叱之曰豈可行詐而僥倖以爲發身之地乎其年登第士林重其操守至今傳以爲美談居官淸愼人不敢干以私公退不問家事對黃卷訓子弟而已嘉靖癸巳追 贈禮曹判書兼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自監察以下 贈典皆以判書公貴也配貞夫人朴氏密陽大姓三重大匡僉議右政丞華之後也曾祖諱義林新寧縣監 贈吏曹叅判祖諱綵以處士不仕父諱潤孫碧 團兵馬僉使母淑夫人金氏修義副尉仁仲女也夫人孝以事姑嚴以敎子弟和以待宗族勤儉之性到老不衰享年旣高諸子蜚揚簪組而判書公以朝廷重臣備極滫隨之養世羡其榮嘉靖丙申十月二十二日考終于正寢壽八十九十二月初九日從葬公塋禮也生五男二女男長渙司憲府監察次涵典設司守次渰司僕寺副正次卽灌登丁卯科次深進勇校尉女長適忠義衛尹悰次適士人趙偉銘曰 玉在荆磎其中燁然劔埋豐嶽光射星纒人苟有善其慶也綿胡賦之才而嗇其年公在于朝斷斷不貳公在于家斤斤其志操堅履正俯仰無愧不大厥施乃遺于後錫類繩繩天報之厚恩視白眉贈爵攸崇爵之伊何赫赫秩宗彼美婉孌實惟公配詩書敎子允由內治譬如種樹有㙲且漑式闡家聲不損厥德元堂膴膴石表峨峨刻銘紀行千古不磨

大提學蘇世讓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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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199  월파류공팽로묘갈명 (月坡柳公彭老墓碣銘) 207     편집인 2012/11/26  [1116]  
198  월파공(팽로)사적 (月坡公(彭老)事蹟) 206     편집인 2012/11/26  [962]  
197  양의정시녕부원군문정공(전)시장 (領議政始寧府院君文貞公(㙉)諡狀) 205     편집인 2012/11/26  [1227]  
196  함경병마절도사류공(경선)묘갈명 (咸鏡兵馬節度使柳公(敬先)墓碣銘) 204     편집인 2012/11/26  [955]  
195  풍기공(경장)묘지명 (豐基公(敬長)墓誌銘) 203     편집인 2012/11/26  [1034]  
194  승문박사공(경인)묘갈명 (承文博士公(敬仁)墓碣銘) 202     편집인 2012/11/26  [1036]  
193  송호공(정)일문사의사적 (松壕公(汀)一門四義事蹟) 201     편집인 2012/11/26  [1047]  
192  자헌대부공조판서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령의정류공 200     편집인 2012/11/26  [1153]  
191  승지공(혼)약사 (承旨公(渾)略事) 199     편집인 2012/11/26  [899]  
190  계휴정공 (위) 약사 (繼休亭公(湋)略事) 198     편집인 2012/11/26  [923]  
189  평안병사공(비)신도비명 (平安兵使公(斐)神道碑銘) 197     편집인 2012/11/26  [1100]  
188  증판서공(몽필)묘표 (贈判書公(夢弼)墓表) 196     편집인 2012/11/26  [839]  
187  증참의공(몽주)묘갈명 (贈參議公(夢周)墓碣銘) 195     편집인 2012/11/26  [1063]  
186  학암공(몽정)묘갈명 (鶴巖公(夢鼎)墓碣銘) 194     편집인 2012/11/26  [1199]  
185  남재공(몽삼)묘갈명 (南齋公(夢參)墓碣銘) 193     편집인 2012/11/26  [932]  
184  청계공(몽정)신도비명 (淸溪公(夢井)神道碑銘) 192     편집인 2012/11/26  [1147]  
183  증판서공(몽익)신도비명 (贈判書公(夢翼)神道碑銘) 191     편집인 2012/11/26  [1030]  
182  추담류선생자방유적비문 (楸潭柳先生子房遺蹟碑文) 190     편집인 2012/11/26  [1026]  
181  추담공(자방)묘표 (楸潭公(子房)墓表) 189     편집인 2012/11/26  [1043]  
 사헌부장령관재공(정수)묘갈명 (司憲府掌令觀齋公(廷秀)墓碣銘) 188     편집인 2012/11/2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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