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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학암공(몽정)묘갈명 (鶴巖公(夢鼎)墓碣銘) 194


학암공(몽정)묘갈명

鶴巖公(夢鼎)墓碣銘

 

  고통정대부(故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兼) 경연참찬관(經筵叅贊官)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으로 증숭정대부(贈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판의금부사(兼判義禁府事) 지경연(知經筵) 춘추관(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세자이사(世子貳師) 류공(柳公)이 이미 졸한지 100백 26년에 공의 5대손 직장군(直長君)이 제족(諸族)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 선고(先考)께서 경영하고 시작하여 돌이 묘하에 있으되 묘비문(墓碑文)을 아직도 현각(顯刻)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한이 아닌가?」하고, 드디어 청풍(清風) 김(金) 유(楺)에게 촉탁(囑托)하여 서(序)하고 명(銘)하라 하니 그 서(序)에 이른다.   공은 문화인으로 휘는 몽정(夢鼎)이요 자(字)는 경임(景任)이요 호(號)는 학암(鶴巖)이라. 류씨(柳氏)는 고려(高麗) 대승(大丞) 차달(車達)로부터 고관대작(高官大爵)으로 서로 이어오더니 우리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휘 관(寬)은 우의정(右議政)으로 시(諡) 문간(文簡)인데 청백한 지조로 한 세상에 임하니 세상에서 모두 관직을 부르지 않고 호(號)를 불러 하정(夏亭)이라 하였다. (503) 휘 맹문(孟聞)을 생하니 참판(叅判)이요, 을 생하니 한림(翰林)인데 공의 고조(高祖) 이상이다, 증조(曾祖)는 휘 순행(順行)이니 군수(郡守)요, 조(祖)는 휘 희저(希渚)니 부윤(府尹)이요, 고(考)는 휘 용량(用良)이니 감찰(監察)로 증병조참판(贈兵曹叅判)이요, 비(妣)는 안동권씨(安東權氏)니 감찰(監察) 연(戀)의 따님이라.   공이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스스로 학문을 힘쓸 줄 알아 1576 명종정묘(明宗丁卯)에 생진과(生進科)에 응시하여 다 1등으로 합격하고 명년(明年)에 천거(薦擧)로 사포별검(司圃别檢)에 제수되고 의금부도사(義禁莩事)로 개수(改授)하니 예(例)로 주부(主簿)에 승(陞)하여 사평(司評)으로 옮기다.   1572 선조임신(宣祖壬申)에 모상(母喪)을 당하고 1574 갑술(甲戌)에 예안현감(禮安縣監)이 되었다가 인하여 문과(文科)에 오르고 1577 정축(丁丑)에 교체되어 호조랑(戶曹郞)이 되었다. 1579 기묘(己卯)에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로 중국(中國)에 사신 갔다 돌아와 예조랑(禮曹郞)이 되어 장례원첨정(掌隷院僉正)이 되었다가 예빈판관(禮賓判官)에 교체되고 또 장흥고령(長興庫令)에 전임되다. 1581 신사(辛巳)에 직강(直講)으로 장단부사(長湍府使)를 제수받고 수월(數月)이 못되어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옮기어 특이한 정사(政事)가 있었다. 1584 갑신(甲申)에 비로소 대각(臺閣)에 들어와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군자정(軍資正)으로 체임(遞任)하여 장령(掌令) 겸춘추관(兼春秋館) 편수관(編修官)에 임명되다. 1585 을유(乙酉)에 성주목사(星州牧使)가 되었다가 1587 정해(丁亥)에 체임하고 사예(司藝)가 되어 내자(內資) 내섬(內贍) 상의(尙衣) 제용정(濟用正)을 역임하고 1588 무자(戊子)에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도로 바꾸어 사성(司成)이 되어 왕명을 받들고 변방을 검찰(檢察)할제 관서(關西)에서 소(疏)로 백성의 질고(疾苦)를 감면케 할 것을 청하고 도중에서 장령(掌令)을 배수(拜授)하였다. 1589 기축(己丑)에 봉상정(奉常正)으로 승진하여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임명되고 1590 경인(庚寅)에 돌아와 황해관찰사(黃海觀察使)와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임명함에 다 사양하였다. 1591 신묘(辛卯)에 승지(承旨)가 되고 1592 임진(壬辰)에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에 조회하고 돌아오니 병조참의(兵曹叅議)에 임명되었다. 1593 계사(癸巳)에 또 승지(承旨)가 되어 8월에 선릉(宣陵)(성종(成宗)) 개장시(改葬時)에 부회(赴會)할새 왕이 아직 해주(海州)에 머물러 계시거늘 공이 빨리 돌아와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을 위로하시기를 청하였다. 공이 초여름부터 행역(行役)에 곤피(困疲)함을 보이더니 연안부(延安府)에 돌아와 병이 더욱 심하여 붙잡아 일으켜도 서쪽을 향하여 앉아 복명치 못함을 한탄하며 자리에 도로 누워 졸(卒)함으로 공해청(公廨廳)에서 고복(皐復)하니 향년이 67로 당년 9월 5일이러라. 1595 을미(乙未)에 비로소 충주(忠州) 고곡(羔谷) 지을원(趾乙原)에 반장(返葬)하니 선영을 좇은 것이다.   공이 효도와 우애가 보통사람에 뛰어나 어버이 병환에 분뇨(糞尿)를 맛보고 친상(親喪)을 당하여 예를 (504) 다하고 묘(墓) 곁에서 삼년을 시묘살이 하되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을 집에 이르지 않았고, 선조(先祖)의 제사에는 반드시 청결하고 풍부히 하였으며 백씨(伯氏)로 더불어 우애하고 공경을 더욱 더하여 공사가 아니면 조석으로 떠나지 않았다. 이 마음으로 미루어 왕을 섬김에 그 심력을 다하더니 임진(壬辰)에 사신(使臣)으로 중국에 들어가려다 도이(島夷)(왜적(倭賊))의 변(變)이 급히 일어나 중외(中外)가 흉흉하여 천도할 의론이 있음에 공이 아뢰기를 「표배(表拜)함을 장차 어떻게 하십니까?」하니 주상이 대답하기를 「다만 표자(表咨)만 주어 전진(前進)하라.」 하시니 곧 집에 들어와 가묘(家廟)를 배알(拜謁)하고 신주(神主)를 묻고 처자를 이별하는 순간에 왕의 행차가 이미 동(動)하였는지라. 악소배(惡少輩)들이 때를 틈타 약탈하여 유혈(流血)이 길에 가득한데 공이 옷을 갖추고 서서히 행하여 앞에 당(當)하여도 군도(羣盜)들이 큰소리만 지르고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 표자(表咨)를 찾아 송도(松都)에 이르러 왕을 모시고 보산역(寶山驛)에 도착하니 대신이 청하기를 「우리는 이미 행진(行進)을 정지(停止)할 것을 아뢰었다.」 하니, 모든 관료들이 듣고 다 흩어져 가고자 하거늘, 공이 허락치 않고 이르기를 「이 행렬이 마침내 그치지 않을 것이니 더 앞으로 나아가서 진퇴를 관망함만 같지 못하다.」 하고 용천병참(龍泉兵站)에 이르니 한공응인(韓公應寅)이 중국으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황조(皇朝)에서 바야흐로 우리가 부적(附賊)하였는가? 의심하니 절사(節使)를 보내지 않음이 계책(計䇿)이 아니라.」 하니 조의(朝議)가 과연 공의 행함을 재촉하고 겸하여 미리 내부할 뜻을 진달(陳達)케 하였다. 공이 곧 아뢰기를 「황조(皇朝)의 의론이 자못 깊으니 먼저 내부를 청하면 이는 그 의혹이 더함이라, 부산(釜山) 이후(以後)의 함락(陷落)된 군민을 날마다 요동(遼東)으로 옮기고 인하여 구원을 청하고 신(臣)이 내부의 뜻을 이으면 일이 서차(序次)가 있고 말이 증점(證漸)이 있나이다.」 하니 「상(上)이 곧 가(可)하다.」 하시다. 때에 황조(皇朝)에서 의혹이 풀리지 않다가 공의 옴을 보고 겨우 풀어져 향연을 베풀거늘, 공이 곡(哭)하고 또 사양하되 주최자가 강권(强勸)하니 공이 울면서 아뢰기를 「군부(君父)는 몽진(蒙塵)하여 존망(存亡)을 분간할 수 없는 이때에 신자가 무슨 마음으로 잔치를 향락(享樂)하리요.」 하니, 좌중(座中)이다 척연(慽然)히 여겨 얼굴빛을 고치고 황제(皇帝)에게 여쭙기를 허락하고 잔치는 뒤로 미루더라. 공이 병부(兵部)에 주기(奏記)함에 지극히 충근(忠勤)하되 난리의 상황을 자상히 진달(陳達)하고, 소리내어 울면서 구원하기를 청하여 여러날 그치지 않으니 상서(尙書) 석공(石公) 성(星)이 감탄하여 여러 관리들에게 말하기를 「이 글을 사매(四枚) 등사(騰寫)하여 오라.」하고 곧 여러 공경(公卿)에게 내어 보이니 대개 석성(石星)이 원병(援兵)으로 나가기를 결심한 때문에 (505) 공과 함께 견고(堅固)히 약속하고자 함이라.   그러나 의론이 분분하여 결정을 못지으니 공이 곧 주기(奏記)하여 득실을 반박하고 논평하여 이르기를 「일이 완급이 있으니 잘 도모한 이는 그 급한 바를 먼저하고, 시기가 이해가 있으니 멀리 보는 이는 그 기틀을 잃지 않는다.」고 하였다. 며칠 후에 석성(石星)이 공에게 글을 부쳐 이르기를 「군(君)이 진(晋)나라 공자(公子)의 호언(狐偃)과 월(越)나라 구천(句踐)의 범려(范蠡)와 초(楚)나라 소왕(昭王)의 신포서(申包胥)가 아닌가? 이제 군병(軍兵)을 이끌고 귀국경(貴國境)에 들어가고자 하니 무엇으로 먼저 할고? 적로(賊虜)가 믿고 있는 근거지(根據地)가 어디며 의거(倚據)하면서 각축전(角逐戰)을 벌일 곳이 어디며 전향(轉餉)은 마땅히 어느 곳을 택(擇)하며 나누어 수비(守備)하는 것은 마땅히 어느 땅에 웅거하며 어느 곳이 상류(上流)가 되며 어느 곳이 험준(險峻)하고 중요하며 물과 풀을 어디서 가져 오며 성곽(城郭)은 어디가 견고하며 지역은 어디가 약한지 일일이 분석하여서 대답(對答)하라.」 하므로, 공이 또 주기(奏記)하여 대략 아뢰기를 「병(兵)을 이끌고 적(賊)을 토벌함이 평양(平壤)으로 먼저함만 같음이 없나이다. 저 도적(盜賊)이 좌우도(左右道)를 약탈치 않고 바로 경성(京城)으로 직주(直走)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평양(平壤)으로 진격하려 하니 이제 평양과 경성이 이미 회복(回復)되면 적(賊)이 의각(猗角)할 바가 없으니 파죽지세(破竹之勢)를 이루리다. 군량(軍糧) 운반은 소모사(召募使)가 가히 전담(專擔)할 것이요, 분수(分守)인즉 기미를 살펴서 움직일 것이요, 죽령(竹嶺)과 조령(鳥嶺)과 차령(車嶺)과 금탄(金灘)과 경강(京江) 일대(一帶)가 험요(險要)가 될 것이요, 금탄(金灘)이 또한 상류(上流)가 되고 수초(水草)는 그 중(中)에 생산하고 성곽(城廓)의 굳음이 왕성보다 나음이 없으므로 급히 경성을 회복함이 지금에 제일 상책이라.」 하니 석성(石星)이 보고 크게 기뻐하여 비답하여 이르기를 「화포(火砲)등 여러 기구도 또한 청하여야 한다.」 하고 옥하관부사(玉河館副使) 시윤제(施允濟)로 하여금 공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발병(發兵)하는 것이 일이 중대(重大)하고 외교(外交)에도 대혐(大嫌)이 되니 그 주자(奏咨)를 기다림이 가하니 비제중(批題中)에 역자(亦字)를 가히 깊이 체험(體驗)하라.」하였다. 공이 드디어 일의 수말(首末)를 갖추어 조정(朝廷)에 치주(馳奏)함에 또 지체될까 염려되어 병부(兵部)에 고(吿)하여 대패(大牌)를 얻어 조정(朝廷)에 보내었다. 조정에서 비로소 이에 사신을 보내어 주청(奏請)하여 이르기 공의 힘이라 하더라. 그러나 다시 포록(褒錄)을 보지 못하니 아는 이가 애석히 여기었다.   공이 더욱 몸지킴에 엄하더니 정여립(鄭汝立)이 당시 명망이 있었는데 그의 우거(寓居)한 집이 공으로 더불어 한 마을이라. 공이 마음으로 비겁(鄙劫)히 여겨 한번도 방문치 않았더니 여립(汝立)이 역적이 됨에 (506) 이르러 공의 종제(從弟)인 몽정(夢井)은 사련(辭連)되어 피체(被逮)되었지만 공은 홀로 초연히 물들지 않으니 사람들이 비로소 감복하였다. 오랜 뒤에 주상께서 전(前)에 봉사한 공(功)을 추념(追念)하여 특히 이조참판(吏曹叅判)과 판서(判書)를 증(贈)하고 뒤에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으로 또 지금 관작을 증직하였다. 부인 김씨(金氏)는 예안(禮安) 대성(大姓)으로 참봉(叅奉) 응천(應千)의 따님인데 공과 동년생(同年生)으로 졸(卒)함은 공보다 8년을 먼저 졸(卒)하였다. 자손록(子孫錄)은 보첩(譜牒)에 나타나다.
 명(銘)에 이르노니, 
 
 오직 공(公)이 실행(實行)이 있었으니 효(孝)와 충(忠)이로다. 
 
 효는 집에서 베풀었고 충은 나라에 드러났도다. 
 
 이리 같은 저 도이(島夷)가 본국(本國)을 병탄(幷呑)하려 할 제, 
 
 공이 중국(中國)에 공소(控訴)하되 칠일(七日)동안 황제(皇帝)의 뜰에
주달(奏達)하니  
 황제가 그 성의를 보아 드디어 구원(救援)을 허락했도다. 
 
 논공(論功)을 거듭하면 공이 아마도 수위(首位)가 되겠으나 
 
 빠지고 기록이 없어도 마침내 스스로 말하지 않으니, 
 
 상(上)이 그 공로(功勞)를 생각하여 천관(天官)을 주셨도다. 
 
 후손들이 대대로 이어 효로써 명망이 드러났도다. 
 
 삼대(三代)를 정려(旌閭)하니 그 가문이 빛나고 빛나도다. 
 
 지극한 행실로 전가(傳家)하니 세상이 모두 부러워 하더라. 
 
 고곡(羔谷)의 서(西)쪽이요, 노령(魯嶺)의 북(北)쪽에, 
 
 공의 무덤에 큰 비(碑)가 있으니 나의 명(銘)이 참람(僭濫)치 않으리로다.

리조참판김유찬령중추부사민진원전

 

鶴巖柳公夢鼎墓碣銘

 

故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叅贊官春秋館修撰官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貳師柳公旣卒之百有二十六年公五代孫直長君謀於族曰吾先考營作石在墓下而麗牲之刻尙闕豈非恨歟遂屬清風金楺序而銘之其序曰公文化人也諱夢鼎字景任號鶴巖柳氏自高麗大丞車達簪轂相襲入我 朝有諱寬右議 (501) 政諡文簡以清操臨一世世不以官而號曰夏亭云生諱孟聞叅判生諱翰林於公爲高祖曾祖諱順行郡守祖諱希渚府尹考諱用良監察 贈兵曹叅判妣安東權氏監察戀之女公少孤自知劬學丁卯中司馬試兩場俱一等明年薦授司圃别檢改義禁都事例陞主簿遷司評壬申丁內艱甲戌爲縣禮安臟文科丁丑遞叙爲戶曹郞己卯以承文校理朝 京還爲禮曹郞掌隷院僉正遞爲禮賓判官又遞爲長興庫令辛巳用直講除長湍府使未數月移牧羅州有異政甲申始入臺閣爲正言遞爲軍資正拜掌令兼春秋館編修官乙酉出牧星州丁亥遞爲司藝歷內資內贍尙衣濟用等正戊子又拜掌令旋遞爲司成承 命檢邊關西疏請蠲民疾苦道拜掌令己丑由奉常正陞拜義州庚寅歸爲黃海觀察使東萊府使俱免辛卯爲承旨壬辰以 聖節使朝 京還除兵曹叅議癸巳又爲承旨八月赴會 宣陵葬時  上尙駐海州公請亟還蹕以慰  宗社生靈公自夏初示歸致延安府疾益革扶起向西坐以不得復 命爲恨反席而卒皐復于公廨享年六十七寔九月初五日也乙未始返葬忠州羔谷趾乙之原從先兆也公孝友絶人親病嘗糞臨喪盡禮廬墓側三年不到家祭先必潔而豐與伯氏愛踰於敬非公冗朝暮守不離推以事君竭其心力壬辰專對行未發而島夷警急中外洶洶有去豳議公奏曰拜表將何爲 上答曰只䝴表咨前進卽歸謁家廟瘞神版別孥累而羽旄已動矣惡少乘時搶掠血流殷途公具服徐行而前羣盜咋不敢犯遂入槐院討表咨進至松都扈駕到寶山驛大臣請曰吾已啓停行矣僚屬聞之皆欲散去公不許曰此行終不可已不如且前以觀進退至龍泉站韓公應寅自京還曰  皇朝方疑我附賊不送節使非計也朝議果促公行兼令預陳內附意公卽奏曰 皇朝之議殊深而先請內附是益其惑也釜山以後諸所陷郡逐日咨移遼東仍以請救而臣以內附意繼之事有序而言有漸矣上立可之時 皇朝疑未解見公至而頗釋此設享儀公哭且辭主事者强之公泣曰 君父蒙塵存亡未分臣子何心宴樂爲坐皆慽然改容許白 上後宴公奏記兵部極陳忠勤被兵狀號哭請授累日不止尙書石公星感歎語衆胥曰寫此文四本來卽分示諸公間盖石公決意赴援故欲其同堅也然而議紛紛未定公卽奏記駁論失得曰事有緩急善圖者先其所急時有利害遠見者不失其幾居數日石公抵公書曰君非晋公子之狐偃乎越句踐之范蠡乎楚昭王之申包胥乎今欲提兵入境以何爲先賊虜 (502) 所恃根本在何猗角在何轉餉當從何處分守當據何地孰爲上流孰爲險要水草于何取城誰堅地孰弱悉剖露以對公又奏記略曰提兵討賊莫若先平壤伊賊不掠左右直掉京城爲根本而進穴平壤今平壤與京城旣復則賊無所猗角而破竹之勢成矣轉餉則召募可辦分守則相幾而動竹嶺鳥嶺車嶺金灘京江一帶爲險要金灘又爲上流而水草産其中城堅無過王城故曰急復京城爲今之上算也石公覽之大悅批曰火炮諸具亦可請也使玉河館副使施允濟語公曰發兵事重嫌於外交須其奏咨乃可批題中亦字可深軆之公遂具事首末馳奏於朝而恐其淹滯吿兵部得大牌以送 朝廷始乃遣使奏請曰公之力也復不見褒錄識者恨之公尤嚴於守己鄭汝立有時名其寓舍與公同巷公心鄙之不一訪迨汝立作逆公從弟夢井辭連被逮公獨超然不浼人始服焉久之 上追念前奉使功特 贈吏曹叅判判書後以宣武原從勳又贈今官夫人金氏禮安大姓叅奉應千之女生與公同年卒先八年子孫錄見譜牒銘曰 維公有行曰孝與忠孝施於家忠著於邦獍彼島夷封豕長鯨公控大邦七日奏庭帝監其誠遂決天討論功復復公盖爲首闕而亡錄竟不自言上念乃勞錫貤天官繩繩後昆用孝嗣聞綽楔三代輝映厥門至行傳家世罔不欽羔谷之西魯嶺之陰公墓有石我銘不僭

吏曹叅判金楺撰領中樞府事閔鎭遠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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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199  월파류공팽로묘갈명 (月坡柳公彭老墓碣銘) 207     편집인 2012/11/26  [1116]  
198  월파공(팽로)사적 (月坡公(彭老)事蹟) 206     편집인 2012/11/26  [962]  
197  양의정시녕부원군문정공(전)시장 (領議政始寧府院君文貞公(㙉)諡狀) 205     편집인 2012/11/26  [1227]  
196  함경병마절도사류공(경선)묘갈명 (咸鏡兵馬節度使柳公(敬先)墓碣銘) 204     편집인 2012/11/26  [955]  
195  풍기공(경장)묘지명 (豐基公(敬長)墓誌銘) 203     편집인 2012/11/26  [1034]  
194  승문박사공(경인)묘갈명 (承文博士公(敬仁)墓碣銘) 202     편집인 2012/11/26  [1036]  
193  송호공(정)일문사의사적 (松壕公(汀)一門四義事蹟) 201     편집인 2012/11/26  [1047]  
192  자헌대부공조판서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령의정류공 200     편집인 2012/11/26  [1153]  
191  승지공(혼)약사 (承旨公(渾)略事) 199     편집인 2012/11/26  [899]  
190  계휴정공 (위) 약사 (繼休亭公(湋)略事) 198     편집인 2012/11/26  [923]  
189  평안병사공(비)신도비명 (平安兵使公(斐)神道碑銘) 197     편집인 2012/11/26  [1100]  
188  증판서공(몽필)묘표 (贈判書公(夢弼)墓表) 196     편집인 2012/11/26  [839]  
187  증참의공(몽주)묘갈명 (贈參議公(夢周)墓碣銘) 195     편집인 2012/11/26  [1063]  
 학암공(몽정)묘갈명 (鶴巖公(夢鼎)墓碣銘) 194     편집인 2012/11/26  [1198]  
185  남재공(몽삼)묘갈명 (南齋公(夢參)墓碣銘) 193     편집인 2012/11/26  [932]  
184  청계공(몽정)신도비명 (淸溪公(夢井)神道碑銘) 192     편집인 2012/11/26  [1147]  
183  증판서공(몽익)신도비명 (贈判書公(夢翼)神道碑銘) 191     편집인 2012/11/26  [1029]  
182  추담류선생자방유적비문 (楸潭柳先生子房遺蹟碑文) 190     편집인 2012/11/26  [1025]  
181  추담공(자방)묘표 (楸潭公(子房)墓表) 189     편집인 2012/11/26  [1043]  
180  사헌부장령관재공(정수)묘갈명 (司憲府掌令觀齋公(廷秀)墓碣銘) 188     편집인 2012/11/2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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