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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청계공(몽정)신도비명 (淸溪公(夢井)神道碑銘) 192


청계공(몽정)신도비명

淸溪公(夢井)神道碑銘

 

  우리 동국(東國)에 당론(黨論)의 투쟁(鬪爭)이 선조(宣祖) 무진년(戊辰年)에 시작(始作)하여 기축(己丑)의 역옥(逆獄)으로 계속하니 고금에 없었던 참화(慘禍)가 되었으니 생살(生殺)과 여탈(予奪)을 주관한 사람이 편파적 감정으로 처리했으니 어찌 그 사람의 의리에 타당성과 원통하고 억울함을 문제시했을 것인가? 아 슬프고 그 애통함을 가히 다 말 할 수 없도다. 나주(羅州)의 고남대징사(故南臺徵士) 청계선생(清溪先生) 류공(柳公) 같은 이가 곧 그때에 호남오원중(湖南五寃中)에 한 분이다. 공의 휘는 몽정(夢井)이요, 자(字)는 경서(景瑞)요, 본(本)은 문화(文化)니 세종조명상(世宗朝名相) 하정문간공관(夏亭文簡公寬)의 육세손(六世孫)이라. 증조(曾祖)는 순행(順行)이니 고양군사(高陽郡事)로 증리조참판(贈吏曹叅判)이요, 조(祖)는 희저(希渚)니 부제학(副提學)이요, 고(考)는 용공(用恭)이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증대사헌(贈大司憲)이요, 비(妣) 하동정씨(河東鄭氏)는 생원(生員) 효손(孝孫)의 따님이라.   중종기축(中宗己丑)에 공이 나주모산촌(羅州茅山村)에서 출생하니 선부군(先府君)이 처음 우거(寓居)한 곳이라. 나서부터 준수하고 용모가 위엄이 있어서 품행과 동작이 법도에 맞으니 그 대대로 전한 가법 때문이라 하겠다. 동향(同鄕)에 나공세찬(羅公世纘)이란 분이 안빈락도(安貧樂道)로 유명하더니 방금 공의 혼인(婚姻) 말이 오고 가는데 부자가 와서 혼인을 요청하거늘 부형이 공의 뜻을 물으니 공이 즐거워 않고 나씨(羅氏)의 사위되기를 원하고 인하여 스승으로 섬겼다. 일찍 친명으로 과거공부를 하더니 선조(宣祖)가 즉위함에 생원진사시험(生員進士試驗)에 장원(壯元)하고 또 대과(大科)에 합격하지 못하므로 다시 과거볼 것을 단념하고 청계동(清溪洞)에 일소재(一小齋)를 구축하고 고요한 집에서 마음을 가다듬어 고인의 위기하는 학문을 연구하고 사우(師友)와 추종하여 계발하고 강론하니 명성이 조정에 알려져 일시의 명현(名賢)이 학행으로 천발(薦拔)되는 이 11인중에 공의 명(名)이 삼번째니 최수우(崔守愚)와 이토정(李土亭)과 정한강(鄭寒岡)과 성우계(成牛溪) 제현(諸賢)이 함께 참여한 것을 연유하여 벼슬에 오르니 능침랑(陵寝郞)으로부터 출발하여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군위현감(軍威縣監)과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와 전라도점마(全羅道點馬)를 역임하고 다시 내직으로 공조(工曹)와 호조정랑(戶曹正郞)이 되고 두 번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고 또 사건으로 인하여 충청도경차관(忠清道敬差官)을 겸임하더니 곧 광흥창수(廣興倉守)에 전임(轉任)되고 고부(古阜)에 부임했다가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승진하니 모든 임무에 진심치 아니함이 없어 신속히 처리하고 임무를 청렴히 하고 귀가했더니 기축(己丑)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임명하거늘 사직문(辭職文)을 올리고 부임치 아니했다.   이때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이 노골화(露骨化)하여 서로 질투하여 모함하는 것이 습관화(習慣化)되었는데 유림(儒林)에 출신 (497) 해서 세도가에 추종하지 않더니 정상(鄭相) 철(澈)이 척리(戚里)로 더불어 교류하여 심(甚)히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옳게 여기지 않아 이따금 말씀에 정(鄭)을 공격(攻擊)한데 정(鄭)이 듣고 감정을 품었더니 역변(逆變)이 사림(士林)에서 일어남에 미쳐서 그 수괴(首魁) 정여립(鄭汝立)이 또 서인(西人)으로부터 동인(東人)에 투족(投足)한 자(者)라. 이에 서인의 무리가 군기(群起)하여 동인의 유명(有名)한 자(者)를 역적에 가담한 자(者)와 교분이 두텁다고 무고(誣吿)로 연좌(連坐)되었는데 정(鄭)이 위관(委官)이 된지라. 공이 드디어 피체(被逮)되어 고문을 당했는데 형벌이 가혹하여 마침내 옥정(獄庭)에서 운명(殞命)하니 그날이 경인7월13일(庚寅)이라. 슬프고 애통함이여, 공이 평소에 공경으로 자신을 경계하더니 옥중(獄中)에서 더욱 근엄하여 일언(一言)도 현란(眩亂)하지 아니하고 임종(臨終)에도 자신과 가정에 대(對)한 일계(一計)가 없으니 공을 잘 아는 옥졸(獄卒)이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죄없는 사람을 혹형(酷刑)함은 비리라 말하니 그때의 광경을 가히 추상할 지로다.   갑오을미(甲午乙未) 몇년 사이에 호남유사(湖南儒士) 나덕윤(羅德潤) 등 수백인이 소(疏)를 지어 오현(五賢)을 설원(雪寃)하려고 궐기(蹶起)하니 오현은 공과 정곤재(鄭困齋) 개청(介清)과 조정곡(曺鼎谷) 대중(大中)과 이동암(李東巖) 발(潑)과 남계(南溪) 길(洁) 형제라. 이아계(李鵝溪) 산해(山海)와 이백사(李白沙) 항복(恒福)과 류서애(柳西厓) 성룡(成龍)과 이오리(李梧里) 원익(元翼) 제대신(諸大臣)이 서로 이어 오현의 설원(雪寃)을 청(請)한데 선조(宣祖)께서 그 실정(實情)을 서로 연이어 건의(建議)함을 살펴 보시고 재가(裁可)에는 이르지 못했더니, 인조(仁祖)가 처음 집정(執政)함에 이르러 제일 먼저 공을 신원(伸寃)하여 복관(復官)하였다. 사림(士林)이 청계사(清溪祠)를 건립하여 공을 향사(享祀)하고 또 선공(先公)이 송산원(松山院)에 추배하니 공론(公論)의 정(定)해지는 것이 그 시기(時期)가 있다고 말함이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대화(大禍)의 여파(餘波)로 후유증이 쉽게 소멸(消滅)되지 아니하니 국가의 은전(恩典)이 아직도 많이 미비하였다.   공의 배(配)는 금성라씨(錦城羅氏)니 그 부(父)는 곧 세찬(世纘)이라, 관(官)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고 시(諡)는 희민(僖敏)이라. 자녀가 사남이녀니 주부(主簿) 형(泂)과 진사(進士) 호(滸)와 호분위(虎賁衛) 양(瀁)과 교위(校尉) 면(沔)과 양종우(梁宗遇)와 이(李) 진(溍)의 부인이라.

백방(伯房)의 손(孫)은 극효(克孝)와 극제(克悌)니 다 사과(司果)요, 중방(仲房)의 손(孫)은 극전(克㙉)과 극배(克培)는 모두 진사(進士)이고 사과(司果) 극증(克增)과 극평(克坪)이요, 숙방(叔房)의 손(孫)은 극신(克新)이요, 계방(季房)의 손(孫)은 극팔(克八)이라. 남은 이는 다 기록하지 못하노라.   공의 묘(墓)가 서당동(書堂洞) 고묘하(考墓下) 임좌(壬坐)에 있으니 후손이 묘소(墓所)에 비석(碑石) 세우기를 의론하고 아계리상공(鵝溪李相公)의 손(孫) 대사헌(大司憲) 과암(果菴) 무(袤)가 서술(敍述)한 행장(行狀)을 지참(持叅)하고 내게 종학(從學)하던 동종(同宗) 재호(在浩)의 소개(紹介)로 나를 찾아 (498) 와서 비명(碑銘)을 청(請)하였다. 그윽히 생각컨대 공이 원래 나의 선조(先祖) 문정공(文貞公)으로 더불어 친분(親分)이 있었고 기축년(己丑年)에 함께 화(禍)를 당(當)하였으니 사건(事件)은 다름이 있으나 그 세강(世講)의 처지에 있어서 감히 졸렬(拙劣)하다고 일언(一言)이 없지 못하겠기에 이에 대강(大綱)을 뽑아서 서술(敍述)하고 명사(銘辭)로 끝을 맺으니,  
 신명(神明)의 후예로 중국으로부터 왔도다.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를 섬겼으니 대대로 명덕(明德)이 빛났도다. 
 
 담담(潭潭)한 하정(夏亭)이여, 바른 이학(理學)을 전(傳)하였으니 
 
 무산(無傘)한 근심은 민(民)과 사물이 다 혜택(惠澤)을 입었도다. 
 
 진실로 공(公)의 태어남은 근원이 결백하고 유파(流派)가
맑도다.  
 과거가 어찌 영광(榮光)인고 유일(遺逸)로 발탁되었도다. 
 
 가장 통탄(痛嘆)하는 바는 도를 굽히고 벼슬을 구하는 것이다. 
 
 내직으로는 습유(拾遺)가 되고 외직으로는 자목(字牧)이 되어 
 
 처지(處地) 따라 조처(措處)하니 학문의 힘이 아닌가? 
 
 국가에서는 훌륭한 선비로 칭하고 민(民)은 청백(清白)을 칭송했도다. 
 어찌 고명(高明)을 요귀(妖鬼)가 그 틈을 엿볼 줄 알았으리요.  
 참소(譖訴)하는 소리가 높음을 자고(自古)로 통상(痛傷)하는 바라. 
 
 하물며 무슨 명목으로 역적이라 지적(指摘)했는고? 

  말하면 무엇하리 입만 더러워질걸, 막야(鏌鎁)(명인(名釰))같은 그 독(毒)이로다. 
 
 천도가 신명(神明)하여 영광이 구천(九泉)에 미쳤도다. 
 
 이에 사(詞)를 작(作)하니 청풍(清風)이 참으로 목목(穆穆)하도다.

문소후인김황근찬

 

清溪柳公夢井神道碑銘

 

吾東方黨論之爭起自 穆陵初載而繼之以己丑逆獄爲古今未有之慘禍則生殺予奪壹視所主之好惡安問其人之當理與寃抑哉噫吁可勝道哉若羅州故南臺徵士清溪先生柳公卽其時所稱湖南五寃之一也謹按公諱夢井字景瑞本文化人  世宗朝名相夏亭文簡公寬六世孫也曾祖順行高陽郡事贈吏曹叅判祖希渚副提學考用恭司憲府監察贈大司憲妣河東鄭氏生員孝孫女 中廟己丑公生于羅州之茅山村先府君之始奠居也生而秀嶷有容儀執德制行動中規矩亦其世傳之柯則然也同鄕有羅公世纘以安貧樂道名方公議娶有富人者要之爲婿父兄微問公意嚮公不肯而願就羅氏委禽因從而師事之嘗以親命治擧子業  宣廟卽位初登司馬試兩場第一等及竟不雋於大科則遂不復事退搆一小齋清溪洞靜室澄坐沉潛乎古人爲己之學問則追隨師友啓發刮劘聲譽交馳一 (495) 時名賢以學行被薦拔者十一人公名居第三而崔守愚李土亭鄭寒岡成牛溪諸賢同與焉由是登仕自陵寝郞出六爲工曹佐郞外補軍威縣監歷慶尙道都事全羅道點馬復入爲工曹戶曹正郞再除司憲府持平又因事兼忠清道敬差官還授廣興倉守出宰古阜陞南原府使凡其所在無不盡心剖決風生涖察廉明不以非義干一毫所治三邑民皆樹碑以頌聲績戊子解紱還家己丑召拜光州牧使呈辭不赴時則東西黨分已形傾軋且成習矣公自以出身儒林不趨權貴而見鄭相澈與戚里交通甚密心不韙之往往發於論對鄭聞而銜之及逆變起於縉紳則其爲首魁鄭汝立又是自西而投東者也於是西人之徒群起誣搆東人有名者連坐以附賊交厚而鄭爲委官公遂被拿鞫刑訊劇酷閱歲而竟殞於獄庭庚寅七月十三其日也噫其痛矣公平居敬以自勅在獄尤加莊厲不一言迷眩臨終亦無及身家一計吏隷之知其爲人者至有私自出涕而言其受罪之非理伊時光景可追想也甲午乙未幾年間湖南儒士羅德潤等數百人糾疏齊龥請伸五賢之寃五賢者公及鄭困齋介清曺鼎谷大中李東巖潑南溪洁兄弟也而李鵝溪山海李白沙恒福柳西崖成龍李梧里元翼諸大臣相繼獻議 宣廟昭察其情實而未及斷裁至 仁祖初政首命伸理復官而士林建清溪祠以享公又追配於先公之松山院其亦可謂公論之有時而定者非歟顧恨大禍之餘釁蘗未易消盡隱愍之典尙多未備也公配錦城羅氏其父卽世纘官至大司憲諡僖敏也有子男四女二男泂主簿滸進士瀁虎賁衛沔校尉女適梁宗遇李溍伯房孫克孝克悌並司果仲房孫克㙉克培俱進士克增司果克坪叔房孫克新季房孫克八餘不盡錄公墓在書堂洞考墓下壬坐後孫方謀賁儀于阡以鵝溪李相公之孫大司憲果菴袤所記狀行介同宗在浩從余學者來示余請爲之題窃念公與我先祖文貞公雅有契分而又同坐己丑之禍雖所遇之有不同而其在世講之地不敢以訥拙而無一言迺撮其槩而叙之繼爲銘以互足之曰 神明之裔來自中國歷事羅麗代奕名德潭潭夏亭寔傳理學無傘之憂民物其澤允也公生源潔流湜貢擧奚榮遺逸是擢最所痛絶枉道賭得內而拾遺外而字牧隨遇施措罔非學力國稱思皇民頌清白豈意高明鬼伺其隙萋錦哆箕自古攸矧伊何名指以黨逆言之汚口鏌鎁其毒天道神明九原可作爰庸作詞清風穆穆 (496)

聞韶后人金榥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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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199  월파류공팽로묘갈명 (月坡柳公彭老墓碣銘) 207     편집인 2012/11/26  [1116]  
198  월파공(팽로)사적 (月坡公(彭老)事蹟) 206     편집인 2012/11/26  [962]  
197  양의정시녕부원군문정공(전)시장 (領議政始寧府院君文貞公(㙉)諡狀) 205     편집인 2012/11/26  [1227]  
196  함경병마절도사류공(경선)묘갈명 (咸鏡兵馬節度使柳公(敬先)墓碣銘) 204     편집인 2012/11/26  [956]  
195  풍기공(경장)묘지명 (豐基公(敬長)墓誌銘) 203     편집인 2012/11/26  [1035]  
194  승문박사공(경인)묘갈명 (承文博士公(敬仁)墓碣銘) 202     편집인 2012/11/26  [1037]  
193  송호공(정)일문사의사적 (松壕公(汀)一門四義事蹟) 201     편집인 2012/11/26  [1047]  
192  자헌대부공조판서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령의정류공 200     편집인 2012/11/26  [1154]  
191  승지공(혼)약사 (承旨公(渾)略事) 199     편집인 2012/11/26  [899]  
190  계휴정공 (위) 약사 (繼休亭公(湋)略事) 198     편집인 2012/11/26  [924]  
189  평안병사공(비)신도비명 (平安兵使公(斐)神道碑銘) 197     편집인 2012/11/26  [1101]  
188  증판서공(몽필)묘표 (贈判書公(夢弼)墓表) 196     편집인 2012/11/26  [840]  
187  증참의공(몽주)묘갈명 (贈參議公(夢周)墓碣銘) 195     편집인 2012/11/26  [1064]  
186  학암공(몽정)묘갈명 (鶴巖公(夢鼎)墓碣銘) 194     편집인 2012/11/26  [1199]  
185  남재공(몽삼)묘갈명 (南齋公(夢參)墓碣銘) 193     편집인 2012/11/26  [933]  
 청계공(몽정)신도비명 (淸溪公(夢井)神道碑銘) 192     편집인 2012/11/26  [1147]  
183  증판서공(몽익)신도비명 (贈判書公(夢翼)神道碑銘) 191     편집인 2012/11/26  [1030]  
182  추담류선생자방유적비문 (楸潭柳先生子房遺蹟碑文) 190     편집인 2012/11/26  [1026]  
181  추담공(자방)묘표 (楸潭公(子房)墓表) 189     편집인 2012/11/26  [1043]  
180  사헌부장령관재공(정수)묘갈명 (司憲府掌令觀齋公(廷秀)墓碣銘) 188     편집인 2012/11/2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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