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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증판서공(몽익)신도비명 (贈判書公(夢翼)神道碑銘) 191


증판서공(몽익)신도비명

贈判書公(夢翼)神道碑銘

 

  호남(湖南)의 나주(羅州) 모산(茅山) 원정리(元井里) 임좌(壬坐)에 우뚝히 높은 사척(四尺)의 무덤은 통정대부(通政大夫) 행군자감정(行軍資監正) 증자헌대부(贈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류공(柳公)의 만년유택(萬年幽宅)이다. 예조참판(禮曹叅判) 신공익전(申公翊全)이 그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더니 오랜 세월에 풍마우습(風磨雨濕)하여 읽을 수 없게 되었거늘 이제 후손 제공(諸公)이 대비(大碑)를 세우려고 합의한바, 종손 근영(根榮)이 온 종중(宗中)을 대표하여 나에게 비문을 청하였다. 내가 자격이 없다고 사양하여 이르기를,「신공(申公)은 상촌(象村) 문정공(文貞公)의 아들로 문장(文章)이 훌륭하고 간중(簡重)하여 미덕을 선양함이 다시 더 할 수 없으니 용렬(庸劣)한 후생이 어찌 감히 집필하리요?」 하되 청함이 더욱 간곡하여 내가 그 글에 의거하여 바로 잡아 서술하는 바이다.   공의 휘는 몽익(夢翼)이요, 자(字)는 경남(景南)이니 문화류씨(文化柳氏)는 고려(高麗)로부터 조선조(朝鮮朝)에 이르러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대대로 연이어 선대세덕(先代世德)이 먼저 비문(碑文)에 자세하기로 다시 되풀이 하지 아니한다.   고(考)의 휘는 용공(用恭)이니 거창군수(居昌郡守)로서 치적(治績)이 드러나 거사비(去思碑)가 있고 송산원(松山院)에 향사(享祀)하며, 비(妣)는 하동정씨(河東鄭氏)니 성균생원(成均生員) 효손(孝孫)의 따님이다.   공이 중종(中宗) 1522 임오(壬午) 10월 정해일(丁亥日)에 출생하니 천자(天資)가 관후(寬厚)하고 인품이 훌륭한데다가 가정교훈을 잘 받아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여묘(廬墓)로 삼년상을 마치고 모든 형제와 제매(娣妹)로 더불어 우애가 극진하니 사람들이 이간(離間)하지 못하고 교유하는 이가 모두 일시에 명망이 있는 인물이러라. 소시(少時)에 면학(勉學)하고 문장을 단련하더니 청련(青蓮) 이공후백(李公後白)이 시로서 벼슬하기를 풍권(諷勸)하되 종시불변(終始不變)하다가 1568 선조무진(宣祖戊辰)에 시사(始仕)하여 내직으로는 사포서(司圃署) 장원서(掌苑署)의 별제(別提)와 전생서(典牲署) 종부사(宗簿寺)의 주부(主簿)와 형조정랑(刑曹正郞) 군자감(軍資監)의 판관(判官)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는데 그 좌랑(佐郞)을 거치지 아니하고 직접 정랑(正郞)에 승진함은 이례적인 선임이었다. 외(外)로는 인동(仁同)과 함안(咸安)과 영덕(盈德)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니 그 함안군수(咸安郡守) 적에 심한 흉년이 들어 군민(郡民)이 병들고 기아(飢餓)가 심하거늘 공이 총력을 기울여 곡물(穀物)을 구입하여 군민을 구제했는데 어사(御史)의 상주(上奏)로 주상(主上)이 의류 한 벌을 특사(特賜)하여 장려(獎勵)하고 읍인(邑人)이 비를 세워 떠난 후 기념을 하였고, 영덕현령(盈德縣令) 적에 이 고을에 토적(土賊)이 심하더니 전부(銓部)(이조(吏曹))에서 특별히 왕명을 받들어 공을 천거하여 부임한지 일년 남짓에 치적(治績)이 일도(一道)에 가장 드러나고 성문(聲聞)이 사방에 유행(流行)하니 사명을 받들고 지나는 자가 다 의례로 존경하고 이웃 고을의 수령(守令)이 공적을 간책(簡册)에 기록하고 본받는 이 많이 있었다. 1591 신묘(辛卯) 3월 신축일(辛丑日)에 재 (493) 직 중에 병졸(病卒)하였는데 유언이 조금도 상실치 아니하고 부녀(婦女)와 유아(孺兒)를 물리치고 편안이 별세하니 향년이 70이었다. 대총재(大冢宰)(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追贈)하니 대개 특례(特例)러라.   배위(配位)가 셋이니 함양박씨(咸陽朴氏)는 증통례(贈通禮) 두정(斗精)의 따님이요, 청안리씨(清安李氏)는 두남(斗南)의 따님이요, 여흥민씨(驪興閔氏)는 덕구(德龜)의 따님이라. 봉증(封贈)은 공의 품계에 따라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이다. 민부인(閔夫人)이 안으로 장경(莊敬)한 심성을 쌓고 밖으로 유순한 태도를 가져 전실(前室)의 일녀(一女)와 측실(側室)의 자녀를 다 자기 자식같이 부양하고 비복(俾僕)을 은혜로 거느려서 가정이 화목하였다. 그리고 부인의 본생부모(本生父母)가 일찍 돌아가시고 후사가 없거늘 그 제사를 스스로 받들더니 임종(臨終)에 아들 준(浚)더러 일러 말하기를 「사친(私親)의 사당을 여기에 임시 모셨지만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니 내가 죽은 후에 네가 마땅히 이어 제사(祭祀)하되 선인의 묘하(墓下)에 제각(祭閣)을 건립(建立)하라.」 하셨으니 그 예를 안다 할지로다. 선조(宣祖) 1606 병오(丙午)에 졸하니 묘는 합부하다.   남(男)에 장(長)은 속(洬)이니 문과(文科) 현감(縣監)으로 증좌찬성(贈左贊成)이요, 차(次)는 준(浚)이니 판관(判官)으로 증좌승지(贈左承旨)니 민씨(閔氏) 소생이며, 여(女)에 장(長)은 현감(縣監) 최응우(崔應虞)에게 출가하니 이씨(李氏) 소생이며, 차(次)는 현감(縣監) 이응명(李應蓂)과 진사(進士) 황정열(黃廷悅)에게 출가하니 민씨(閔氏)의 소생이며, 측실(側室)의 남(男)은 부장(部長) 식(湜)과 득(淂)이요, 여(女)는 손인갑(孫仁甲)에게 출가하니 첨사(僉使)로 임진란(壬辰亂)에 절사(節死)하다. 장방(長房)은 무사(无嗣)하야 종자(從子) 성오(誠吾)로 계자(系子)하니 좌랑(佐郞)으로 영의정(領議政)을 증직(贈職)하고, 차방(次房)은 사남(四男)이니 곧 성오(誠吾)와 신오(愼吾)와 진사(進士) 창오(昌吾)와 생원(生員) 형오(亨吾)라. 내외(內外) 증현손(曾玄孫)이 수백명인데 혹 문과(文科)로 혹 음사(蔭仕)로 청렴하고 현달한 분이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평론(評論)에 이르기를 「공이 대성화주(大姓華冑)로 유훈을 잘 지키고 선조(先祖)의 미덕을 계승하였으니 마땅히 출세하여 크게 등용되었을 것인데 돌아보건대 애석하게도 운명이 불행하여 벼슬은 겨우 일개(一個) 군읍(郡邑) 수령(守令)에 불과(不過)하였다.」 그 전(前) 비명(碑銘)에 이르기를 「근원(根源)이 깊어 유파(流派)가 마땅히 길지만 박옥(璞玉)이 흙에 묻혔으니 빛이 드러나지 않았도다. 오직 후손에 가히 징거(徵據)할지니 여경(餘慶)이 그 창성할 것인바, 명(銘)을 지어도 부끄러울게 없으니 석사(碩士)가 묻친 곳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실록(實錄)이라. 후세에 가히 증거할지니 다시 무엇을 첨가(添加)하리요? 이에 감히 그 누락된 것을 보완(補完)하여
 명(銘)을 지어 이르노니 
 
 과거공부를 아니하고 산수를 즐겼도다. (494) 
 
 청련(青蓮)이 출세를 권(勸)해도 마침내 허락지 아니했도다. 
 
 노년(老年)에 시사(始仕)하니 미미(微微)한 말직(末職)이라. 
 
 훌륭한 문벌(門閥)로 위(位)가 덕(德)에 불급(不及)하였도다. 
 
 한 번 군수(郡守)에 임명(任命)되니 민(民)이 부모같이 존경하고. 
 
 시절(時節)이 대황(大荒)을 만나서 평야(平野)에 아사자(餓死者)가 많았도다. 
 
 곡물(穀物)로 구제(救濟)하니 사또가 와서 우리가 소생(蘇生)했다 하였도다. 
 
 여인은 양잠(養蠶)하여 길쌈하고 남정(男丁)은 경전(耕田)하여 씨 뿌리니. 
 
 누구의 공(功)인들 그보다 더할까? 
 
 유민(流民)이 사방에서 운집(雲集)하니 정적(政績)이 더욱 빛나도다. 
 
 성명(聲名)이 조정(朝廷)에 들리니 왕의 포창(褒彰)이 빛나고 빛나니. 
 
 진정(眞正)으로 우리 공을 먼 옛날 훌륭한 관리(官吏)라 부르도다. 
 
 명석(名碩)이 대대로 계승(繼承)하니 멀어질수록 더욱 창성(昌盛)하리로다. 
 저 원정(元井)을 바라보니 공의 묘(墓)가 분명하도다.  
 신공(申公)의 묘비명(墓碑銘)이 백세에 향기로우리라.

 

贈吏曹判書柳公夢翼神道碑銘

 

湖南之羅州茅山元井里負壬而崇四尺者通政大夫行軍資監正 贈資憲大夫吏曹判書柳公之藏 (491) 也禮叅申公翊全銘其墓歲久磨泐殆不堪讀今後孫諸彦謀竪大碑長後孫根榮以闔宗意請余爲文余以匪其人辭之曰申公以象村文貞之子文章典雅簡重而稱揚德美無復餘蘊眇末後生何敢泚筆耶請益勤余乃就其文而檃栝序之公諱夢翼字景南文化之柳遠自高麗至國朝世襲圭組先系世德詳載先碑不復疊焉考諱用恭宰居昌治績著有去思碑享松山院妣河東鄭氏成均生員孝孫女公以中宗壬午十月丁亥生天姿寬厚器宇宏遠內行克修遭內外艱廬墓終制與諸昆季娣妹友愛篤至人無間言所交遊皆一時勝流少力學績文青蓮李公後白以詩諷勸竟不撓宣廟戊辰始仕內而歷司圃署掌苑署别提典牲署宗簿寺主簿刑曹正郞軍資監判官僉正其不階佐而卽陞正郞盖極選也外而歷仁同咸安盈德其守咸安歲大無民瘵阻饑公竭力販糴俾護奠居繡衣褒奏 上特賜表裏獎之邑人竪石以寓去後思其宰盈德者是邑屢經匪人銓部承特簡敎擧公以授下車踰年治最一道聲流四方使价之過者咸加禮焉傍邑宰至有紀公績簡册爲式者焉辛卯三月辛丑病卒于官遺命小不爽屛婦孺怡然觀化享年七十後追 贈大冢宰盖特例也配凡三咸陽朴氏贈通禮斗精女淸安李氏斗南女驪興閔氏德龜女封贈俱視公秩閔夫人內蘊莊敬外持柔婉視前室一女洎側室子女皆猶己出御婢僕以恩閨壼穆如也夫人本生親早世无嗣自奉其祀臨終謂子浚曰私親之廟權安於此非其所也我歿後汝當襲祀立廟于先人墓下云其知禮也夫 宣廟丙午卒墓祔男長洬文科縣監 贈左贊成次浚判官贈左承旨閔氏出女長適崔應虞縣監李氏出次適李應蓂縣監黃廷悅進士閔氏出側室男湜部長次淂女適孫仁甲僉使壬辰亂節死長房无嗣以從子誠吾子之佐郞贈領議政次房四男長卽誠吾次愼吾次昌吾進士次亨吾生員內外曾玄多至累百而或文科或蔭仕歷清顯者不可殫記其論曰公大姓華冑服遺訓而趾前媺宜若需世大施而顧坐數奇僅見其一班者稱循良郡邑間耳其銘曰而源之深流宜長而璞之委瑩未章可徵惟後餘慶其昌銘而無愧碩士之藏此公實錄而可徵來後復何贅焉乃敢補其闕而銘之曰 不治擧業澗阿樂只青蓮諷勸竟莫之起老年始仕婆娑散職喬木世家位不充德一佩郡符民視父母時値大無野多餓莩乃販乃糴侯來我蘇女職蚕繅男服田畝伊誰之功莫居其右流氓四集政績彌彰聲聞于天聖褒皇皇允矣我公殆古循良名碩繩武彌遠彌昌瞻彼元井惟公之藏申公之銘百世芬芳 (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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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199  월파류공팽로묘갈명 (月坡柳公彭老墓碣銘) 207     편집인 2012/11/26  [1116]  
198  월파공(팽로)사적 (月坡公(彭老)事蹟) 206     편집인 2012/11/26  [962]  
197  양의정시녕부원군문정공(전)시장 (領議政始寧府院君文貞公(㙉)諡狀) 205     편집인 2012/11/26  [1227]  
196  함경병마절도사류공(경선)묘갈명 (咸鏡兵馬節度使柳公(敬先)墓碣銘) 204     편집인 2012/11/26  [955]  
195  풍기공(경장)묘지명 (豐基公(敬長)墓誌銘) 203     편집인 2012/11/26  [1034]  
194  승문박사공(경인)묘갈명 (承文博士公(敬仁)墓碣銘) 202     편집인 2012/11/26  [1036]  
193  송호공(정)일문사의사적 (松壕公(汀)一門四義事蹟) 201     편집인 2012/11/26  [1047]  
192  자헌대부공조판서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령의정류공 200     편집인 2012/11/26  [1153]  
191  승지공(혼)약사 (承旨公(渾)略事) 199     편집인 2012/11/26  [899]  
190  계휴정공 (위) 약사 (繼休亭公(湋)略事) 198     편집인 2012/11/26  [923]  
189  평안병사공(비)신도비명 (平安兵使公(斐)神道碑銘) 197     편집인 2012/11/26  [1100]  
188  증판서공(몽필)묘표 (贈判書公(夢弼)墓表) 196     편집인 2012/11/26  [839]  
187  증참의공(몽주)묘갈명 (贈參議公(夢周)墓碣銘) 195     편집인 2012/11/26  [1063]  
186  학암공(몽정)묘갈명 (鶴巖公(夢鼎)墓碣銘) 194     편집인 2012/11/26  [1199]  
185  남재공(몽삼)묘갈명 (南齋公(夢參)墓碣銘) 193     편집인 2012/11/26  [932]  
184  청계공(몽정)신도비명 (淸溪公(夢井)神道碑銘) 192     편집인 2012/11/26  [1147]  
 증판서공(몽익)신도비명 (贈判書公(夢翼)神道碑銘) 191     편집인 2012/11/26  [1029]  
182  추담류선생자방유적비문 (楸潭柳先生子房遺蹟碑文) 190     편집인 2012/11/26  [1025]  
181  추담공(자방)묘표 (楸潭公(子房)墓表) 189     편집인 2012/11/26  [1043]  
180  사헌부장령관재공(정수)묘갈명 (司憲府掌令觀齋公(廷秀)墓碣銘) 188     편집인 2012/11/2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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