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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평안병사공(비)신도비명 (平安兵使公(斐)神道碑銘) 197


평안
병사공(비)신도비명

平安兵使公(斐)神道碑銘

 

  평안병사(平安兵使) 문화류공(文化柳公)의 묘소가 옛적 관할(管轄)로 양근(楊根) 동종면(東終面) 가소촌(可巢村)에 있는데 이는 그 선조(先祖) 하정상공(夏亭相公)의 만년유택(萬年幽宅)이 양평군(楊平郡)의 왕충리(王忠里) 후록(後麓)에 있어 그 후손으로 상공(相公)의 묘하(墓下)에 사는 이가 날로 더욱 많아지고 손세(孫勢)가 더욱 번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가소(可巢) 한 지역이 하정상공(夏亭相公)의 후손의 세장(世庄)이 되고 세장의 좌우 산등성이 또한 세조(世兆)(세장천(世葬阡))가 되었으니 진실로 사리와 형세가 그러한 것인데 산등성이에 류씨(柳氏)의 산소가 없는 곳이 없고 산소에는 묘비가 없는 곳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공씨(孔氏)의 공림(孔林)에 비교하고 있으니 아아! 성대하도다.   그러나 모든 일이 모두 갖추어지기 어렵듯이 묘소에 묘비가 없는 곳이 있으니 그 후손된 자로서 그 품은 한과 쌓인 슬픔이 과연 어떻겠는가? 2006 병술(丙戌) 여름에 어느 분이 서울에 (512) 서 찾아와 글을 부탁하면서 나에게 읍(揖)하고 말하기를 「저는 류씨(柳氏)인데 선조 병사공(兵使公)이 가소(可巢)의 세조(世兆)에 안장(安葬)된지 햇수가 오래되고 대수도 여러 대가 되었으나 아직껏 묘비가 세워지지 못했으니 그 통한이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제가 여러 후손 중에 한 사람으로서 그 통한을 씻기 위해서 왔으니 도와주시기 바랍니다.」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더욱 그 명가의 위선하는 기풍이 아직도 쇠하지 않은 점이 있는 것을 흠앙(欽仰)하며 생각건대 명가의 명가 됨이 어찌 그 이유가 없겠는가? 내 비록 글은 못하지만 가히 그 일에 도움이 된다면 아끼지 않겠으나 후일 이 글을 보는 이는 혹 난쟁이가 천균(千均)(삼만근(三萬斤))의 무거운 책임을 맡았다고 이르지 않을는지?   공의 휘는 비(斐)요, 자는 사화(士華)니 문화류씨(文化柳氏)이다. 류씨(柳氏)의 고려(高麗)와 조선(朝鮮) 때에 성황(盛況)함은 당(唐)나라 때 이씨(李氏)와 같아 규조(圭組)(관작(官爵))가 대대로 이어 우리나라 여러 성씨(姓氏)들의 우러러보는 바가 되었다. 이제 그 가첩(家牒)에 기재된 바와 국사에 기록된 바에 의하여 기술하는 바, 이는 노팽(老彭), 곧 전술(傳述)할 따름이지 창작하지 않는다는 뜻을 은근히 취함이다.   류씨(柳氏)는 고려(高麗) 때 대승공(大丞公) 휘 차달(車達)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고려(高麗)의 건국에 공(功)이 있어 그로 인하여 명가가 되었다. 몇 대를 전하여 휘 공권(公權)은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시호 문간(文簡)인데 필명(筆名)이 있었고, 그의 아들 휘 언침(彦沉)은 예부상서(禮部尙書) 섭상장군(攝上將軍)인데 뛰어난 공훈(功勳)으로 일세(一世)에 빛났으며, 그의 아들은 휘 순(淳)이니 한림학사(翰林學士)이고, 그의 아들은 휘 성비(成庇)니 문산군(文山君)으로 시호 충성이요, 2대를 전하여 휘 안택(安澤)은 삼사판관(三司判官)인데 아들의 영귀(榮貴)로 증령의정(贈領議政)이며, 그의 아들은 휘 관(寬), 호 하정(夏亭)이니 영릉(英陵)(세종(世宗)) 때 이름난 재상(宰相)으로 시호 문간(文簡)인데 사람들이 손수 우산을 바치고 비를 피했다고 말하는 바, 세상에서 이를 문간공(文簡公)의 일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 분의 아들은 휘 계문(季聞)이니 문과(文科)에 급제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시호 안숙(安肅)이며, 그의 아들은 휘 권(睠)인데 문과에 급제 직제학(直提學)이니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는 휘 종손(終孫)이니 사복사정(司僕寺正)으로 증좌찬성(贈左贊成)이며, 왕부(王父)(조(祖))는 휘 오(塢)니 첨정(僉正)이며, 부(父)는 휘 희진(希津)이니 함흥판관(咸興判官)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순절하여 충신(忠臣)의 정려(旌閭)를 얻고 충의(忠義)의 업적이 우리 동국(東國)에 널리 알려진 분으로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이다. 이 분이 순천박씨(順天朴氏) 참봉(參奉) 세웅(世雄)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강릉(康陵)(명종(明宗)) 1566 병인(丙寅)에 가소(可巢) 세장(世庄)(세거지(世居地))에서 공을 출생하였는데 바로 상공(相公)의 묘소 아래이다. (513)   공께서 태어나 곧바로 목릉(穆陵)(선조(宣祖))의 시대를 당하여 무예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일찌기 벼슬길에 올라 곧바로 뛰어난 도략(韜略)(병법(兵法))이 좌우의 인정을 받아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그 후 의주판관(義州判官)을 거쳐 드디어 북방 변경으로 옮겨 종성부사(鍾城府使)가 되었는데 공이 임소(任所)에 따라 정성을 다하여 각각 훌륭한 평판(評判)이 있었고 사람들이 이르기를 「하정상공(夏亭相公)의 후손이 있다.」하였다. 특히 의주부윤(義州府尹)과 종성부사를 차례로 역임하였는데 이 두 고을은 모두 북방의 국경에 위치한데다 험악한 지역으로서 그 중요함을 말하건대 한(漢)나라에서 홍구(鴻溝)를 차지한 것과 같고, 그 요긴함을 말하건대 촉(蜀)나라에서 형주(荆州)를 얻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매양 이 고을의 관장(官長)을 선임함에 이르러 삼가고 또 삼가며, 중히 여기고 또 중히 여기는 것이 진실로 예전부터 관례(慣例) 아닌 관례이었는데 공은 이 곳의 책임을 맡음이 길에서 지푸라기 줍듯 쉬었으니 이는 공의 도략(韜略)이 묘당(廟堂)(조정(朝廷))에 중히 알려진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공이 하차(下車)(부임(赴任))하던 처음부터 그 오랑캐를 방어할 모든 기구(機具)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음으로 인하여 노후(老朽)됨이 무방비(無防備)에 가깝고, 유실됨이 다시 제조해야 하는 절박함을 염려하여 무사한 때를 틈타서 모두 수선하였다. 이로써 그 전력은 가히 산을 뽑는데 비할 만하고 기세는 가히 세상을 뒤덮는데 견줄 만하게끔 군대(軍隊)의 위용(威容)이 다시 씩씩해지고, 병영(兵營)의 위엄이 다시 떨치었다. 이에 그 성곽(城廓)과 격대(擊臺)와 포루(砲樓) 등에 이르기까지도 점점 그 능력이 회복되고 또한 그 사용도 예리하게 되는 등 무릇 공의 하는 일이 후일에 선정의 자료가 되지 않는 것이 적었다. 1608 무신(戊申) 9월에 영흥부사(永興府使)로 옮기었다.   인조(仁祖) 1624 갑자(甲子)에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옮겨 이듬해 8월 모친의 병환으로 인하여 상소로서 사직을 청하니 장릉(長陵)(인조(仁祖))께서 비답(批答)에 허락하지 않고 이르시기를 「전후로 올린 소장(疏章)이 효심에서 나온 것이니 마땅히 윤허해야 할 일이나 다만 추운 겨울이 멀지 않고 오랑캐의 침범을 헤아리기 어렵다.」 하시고 소관(所管) 관서(官署)에 명하여 그의 모친의 처소(處所)에 약재(藥材)를 후하게 보내어 존휼(存恤)의 의(義)를 돈독히 하도록 하셨으니, 조정(朝廷)에서 공을 의지함이 보통 사람과 달랐음이 이와 같았다.   1630 경오(庚午)에 평안병사(平安兵使)로 옮기어 또 오랑캐를 방어할 계책(計策)을 계주(啓奏)하였는데 어느 한가지도 훌륭한 약석(藥石)이 아닌 것이 없으므로, 보는 이마다 불에 머리를 대고 이마를 그을리듯 고초(苦楚)를 겪은 끝에 얻은 것임을 중히 여기었다. (514)   아아! 공께서 날래고 씩씩한 호신(虎臣)(무신(武臣))의 재목으로 당당한 무업(武業)의 가문에서 태어나 심성은 추수(秋水) 같고 지조(志操)는 설죽(雪竹) 같아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은 터럭만큼도 어긋남이 없었고, 낮은 벼슬부터 높은 벼슬에 이르기까지 몸은 더러운 태도가 없었으니 이제 그 전후 모든 사행(事行)을 증거하여 볼진대 참으로 문간공(文簡公)의 심법(心法)에 욕됨이 없었고, 안숙공(安肅公)의 가풍(家風)을 잘 계술(繼述)하였다고 이르겠다. 졸일(卒日)은 전하지 않는다.   공께서 남양홍씨(南陽洪氏) 판서(判書) 세공(世恭)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삼남이녀를 낳았는데 장남 정설(廷卨)은 청양현감(靑陽縣監)이요, 차남 정익(廷益)은 통제사(統制使)인데 출계(出系)하여 진사(進士) 증형조참판(贈刑曹參判) 극신(克新)의 후사(後嗣)가 되고, 삼남 정직(廷稷)은 상호군(上護軍)이며, 장녀는 이념(李稔)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부사(府使) 황(黃) 연(埏)에게 출가하였다. 또 삼남(三男)이 있으니 정필(廷弼)과 정남(廷南)과 정립(廷岦)이다.   손(孫)에 숙(琡), 수(琇), 현(玹), 인(璘)과 감찰(監察) 채우서(蔡禹瑞), 증대사헌(贈大司憲) 심지문(沈之汶), 김(金) 인(磷)의 처(妻)는 청양군수(靑陽郡守)의 소생이요, 영(瑛), 기(琦), 선(璿), 찬(璨)과 홍성주(洪聖疇), 박재창(朴再昌)의 처(妻)는 상호군(上護軍)의 소생이며, 정필(廷弼)은 무후(無後)하고, 은 정남(廷南)의 소생이요, 구(球)는 정립(廷岦)의 소생이다. 나머지는 매우 번성하여 능히 다 기록하지 못한다. 이미 서문(序文)이 있으니 마땅히 명사(銘辭)가 있어야 하겠기로 이에 명사(銘辭)에 이르노니,  
 류씨(柳氏)가 우리 동국(東國)에 있어 성황한 명족(名族)이 되었거니, 
 
 명족(名族)은 무엇을 이르는가? 덕의(德義)와 관작(官爵)이 있음이로다. 
 
 혁혁한 유주(儒州) 고을이여! 전후(前後)로 인물이 많았거니, 
 
 묻노니 누가 으뜸이었던가? 하정(夏亭)이 가장 뛰어났도다. 
 
 드높은 그 업적이여! 칭송이 팔역(八域)에 넘쳤거니, 
 
 수산(手傘)이 가장 으뜸으로 세상에서 비길게 드물도다. 
 
 성하고 성한 류씨(柳氏)의 성세(姓勢) 둘째 아닌 첫째이거니, 
 
 충의(忠義)와 효우(孝友)의 가풍(家風)으로 잠영(簪纓)이 끊이지 않았도다. 
 
 굳세고 강한 공이시여! 그 가운데 한 분으로서, 
 
 높은 관작(官爵)과 훌륭한 덕의 빛나고 빛났도다. 
 
 하정상공(夏亭相公)을 본받고 안숙공(安肅公)을 계술(繼述)하였으니, 
 
 어찌 관작(官爵)을 이르지 않고 덕의를 이르지 않겠는가? (515) 
 
 천품의 미덕을 닦아 인간의 작록(爵祿)을 얻었거니, 
 
 낭관(郞官)으로 시작하여 병사(兵使)로 끝을 맺었도다. 
 
 임무가 풍속을 살피고 국가를 보위함에 있었거니, 
 
 가장 주상(主上)의 권고(眷顧)를 얻은 것은 도략(韜略)의 특이함이로다. 
 
 오랑캐 방어(防禦)의 계책으로 약석(藥石) 아님이 없었으며, 
 
 오직 임소(任所)에 따라 마음과 힘을 다했도다. 
 
 다만 묘비(墓碑)가 서지 못한 바 이것이 부끄럽더니, 
 
 문중(門中)의 의논이 이에 미쳐 새긴 비석이 휘황하도다. 
 
 이 곳을 지나는 이는 누군들 공경하지 않겠는가?

병술삼월

월성정동휘근술

 

平安兵使柳公斐神道碑銘

 

平安兵使文化柳公之墓在舊轄楊根東終面可巢村者寔以其先祖夏亭相公萬年幽宅在郡之王忠里後麓而其後昆之從相公墓下居者日益衆而勢益蕃由是可巢一域仍爲夏亭相公後昆世庄而庄之左原右嶝又仍爲世兆者固理勢之有然而無原無墓無墓無碑人有擬於孔氏之孔林嗚呼盛矣然而事難全幸墓有不碑者則其後孫之含恨茹痛果何如哉丙戌夏有人自洛來謁文者揖余而言吾柳姓而先祖兵使公之窆此可巢世兆者年多世累而碑未見樹痛恨孰甚於此不佞以諸孫之一爲祛其痛恨而來願有相焉余聞其言益欽其名家爲先之風尙有未衰者名家之爲名家曷可無由余雖不文不可吝其有相也後日見者倘不曰僬僥之任千鈞也歟公諱斐字士華文化氏氏於麗鮮如李於唐而圭組繼世爲吾東諸姓之望今依其家牒所載國史所記而述之蓋竊比老彭之義也柳氏昉於高麗大丞公諱車達而功於建國仍爲名家傳至諱公權政堂文學諡文簡有筆名生諱彦沉禮部尙書攝上將軍元功茂烈照耀一世生諱淳翰林學士生諱成庇文山君諡忠成再傳諱安澤三司判官以子貴贈領相生諱寬號夏亭英陵名相諡文簡人言手傘庇雨世無不知此爲文簡事者生諱季聞文刑判諡安肅生諱睠文直提學是爲公高祖曾祖諱終孫司僕正贈左贊成王父諱塢僉正父諱希津咸興判官壬亂殉節得忠臣之旌忠業雷于吾東贈兵曹參判是聘順天朴氏參奉世雄女以康陵丙寅擧公于可巢世庄卽相公墓下也公生當穆陵世因武決科早釋其褐旋以龍韜虎略見認左右爲刑曹佐郞歷義州判官遂遷北塞爲鍾城府使公隨任盡虔各有令聞人曰夏亭相公有後云特於義州府尹鍾城府使次第以歷蓋以兩府共在北陲且兼天險言其重則漢之有鴻溝言其要則蜀之得荆州以故每選其任愼之又愼重之又重固是前日匪例之例而公則得之容易如拾道芥蓋以其韜略之見重廟堂耶然而公初下車慮其防胡諸具因經壬燹而老焉朽焉隣於無備流焉失焉迫於再造者逮其無事繕焉修焉而力可擬於拔山氣可埒於蓋世軍容復壯兵威更振至其城郭也擊臺也砲樓也漸復其能且銳其用者凡 (511) 公之所爲鮮不爲後日甘棠之資戊申九月移永興府使仁祖甲子移義州府尹翌年八月因母病上疏請辭職長陵批而不許曰前後疏章出於孝心事當允之但寒節不遠狄侵難料又命該所厚送藥材於其母所邇其存恤之意朝之依公有非尋常者如此也庚午移平安兵使且所奏禦胡之䇿無一非藥石觀者重其得於焦頭爛額之餘也噫公以矯矯虎臣之材生堂堂業武之門而心埒秋水操均雪竹自初至終心無毫髮之差自卑至高身無淟涊之態今據其前後諸事以觀之儘可謂無忝文簡心法善述安肅家風者也卒日不傳公娶南陽洪氏判書世恭女生三男二女男長廷卨靑陽縣監次廷益統制使出爲進士贈刑參諱克新之嗣次廷稷上護軍女長適李稔次適府使黃埏又有三男廷弼廷南廷岦孫曰琡琇玹璘若監察蔡禹瑞贈大司憲沈之汶金磷妻靑陽出瑛琦璿璨若洪聖疇朴再昌妻護軍出廷弼無後廷南出球廷岦出餘彬彬郁郁不能盡述也旣有序宜有銘乃銘曰 柳在吾東蔚爲名族名族云何有德有爵奕奕儒州前後磊落問誰拇者夏亭卓卓巍巍其業譽溢八域最是手傘世罕其匹熾熾姓勢匪乙而甲忠孝家風簪纓不絶桓桓維公其中之一以爵以德且彬且郁憲章夏相繼述安肅盍曰有爵盍曰有德天爵之修人爵之得始自郞官兵使爲末務在察俗任在衛國最得上眷韜略之特禦胡有策無非藥石唯隨所在殫心戮力但碑不立是愧是恧門議所到煌煌其刻行過路此疇敢不式

丙戌三月

月城鄭東暉謹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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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199  월파류공팽로묘갈명 (月坡柳公彭老墓碣銘) 207     편집인 2012/11/26  [1116]  
198  월파공(팽로)사적 (月坡公(彭老)事蹟) 206     편집인 2012/11/26  [962]  
197  양의정시녕부원군문정공(전)시장 (領議政始寧府院君文貞公(㙉)諡狀) 205     편집인 2012/11/26  [1227]  
196  함경병마절도사류공(경선)묘갈명 (咸鏡兵馬節度使柳公(敬先)墓碣銘) 204     편집인 2012/11/26  [956]  
195  풍기공(경장)묘지명 (豐基公(敬長)墓誌銘) 203     편집인 2012/11/26  [1035]  
194  승문박사공(경인)묘갈명 (承文博士公(敬仁)墓碣銘) 202     편집인 2012/11/26  [1037]  
193  송호공(정)일문사의사적 (松壕公(汀)一門四義事蹟) 201     편집인 2012/11/26  [1047]  
192  자헌대부공조판서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령의정류공 200     편집인 2012/11/26  [1154]  
191  승지공(혼)약사 (承旨公(渾)略事) 199     편집인 2012/11/26  [899]  
190  계휴정공 (위) 약사 (繼休亭公(湋)略事) 198     편집인 2012/11/26  [924]  
 평안병사공(비)신도비명 (平安兵使公(斐)神道碑銘) 197     편집인 2012/11/26  [1100]  
188  증판서공(몽필)묘표 (贈判書公(夢弼)墓表) 196     편집인 2012/11/26  [839]  
187  증참의공(몽주)묘갈명 (贈參議公(夢周)墓碣銘) 195     편집인 2012/11/26  [1063]  
186  학암공(몽정)묘갈명 (鶴巖公(夢鼎)墓碣銘) 194     편집인 2012/11/26  [1199]  
185  남재공(몽삼)묘갈명 (南齋公(夢參)墓碣銘) 193     편집인 2012/11/26  [932]  
184  청계공(몽정)신도비명 (淸溪公(夢井)神道碑銘) 192     편집인 2012/11/26  [1147]  
183  증판서공(몽익)신도비명 (贈判書公(夢翼)神道碑銘) 191     편집인 2012/11/26  [1030]  
182  추담류선생자방유적비문 (楸潭柳先生子房遺蹟碑文) 190     편집인 2012/11/26  [1026]  
181  추담공(자방)묘표 (楸潭公(子房)墓表) 189     편집인 2012/11/26  [1043]  
180  사헌부장령관재공(정수)묘갈명 (司憲府掌令觀齋公(廷秀)墓碣銘) 188     편집인 2012/11/2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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