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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양의정시녕부원군문정공(전)시장 (領議政始寧府院君文貞公(㙉)諡狀) 205


영의정시녕부원군
문정공(전)시장

領議政始寧府院君文貞公(㙉)諡狀


  공(公)의 휘(諱)는 전(㙉)이요, 자(字)는 극후(克厚)요, 문화인(文化人)으로 호(號)는 우복(愚伏)이니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 대승공(大丞公) 휘차달(車達)은 곧 그 비조(鼻祖)이다. 수대(數代)를 전하여 태학사(太學士)로 치사(致仕)한 시(諡) 문간공(文簡公) 휘 공권(公權)과 태학사로 치사(致仕)한 시(諡) 문정공(文正公) 휘 경(璥)은 다 전조(前朝)의 대신(大臣)이요, 휘 만수(曼殊)에 이르러 우리 태조(太祖)를 섬겨 벼슬이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이르러 무당을 몹시 혁파(革破)한 바 지금까지 무당의 푸닥거리하는 소리에 먼저 공의 휘를 들치고 있다. 오세(五世)를 전하여 의정공(議政公) 휘 예선(禮善)에 이르러 형 감역(監役) 인선(仁善)과 처사(處士) 은선(恩善)과 아우 참판(參判) 지선(智善)과 우후(虞候) 정선(貞善)으로 더불어 다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니 일향(一鄕) 인사(人士)가 그 우물을 효우정(孝友井)이라 이름 하고 정려비(旌閭碑)가 세워졌는데 그 비(碑) 후면(後面)에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효우문전(孝友門傳)을 쓰고 이문간공(李文簡公) 의현(宜顯)이 그 비문(碑文)을 지었다.
  의정공(議政公)이 가정(嘉靖) 신묘(辛卯) 중종26년(中宗) · 1531년 5월19일에 포천(抱川) 왕방산(旺方山) 아래 자작리(自作里)에서 공을 출생하셨는데 공이 어려서부터 영민(穎敏)하여 희희(嬉戯)하지 않고 겨우 말을 배울 적에 문득 문자를 해석하니 숙부(叔父) 참판공(參判公)이 기특히 여겨 문호(門戶)의 희망(希望)을 부치었다. 이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팔구세(八九歲)에 문장(文章)과 식견(識見)이 성인(成人) 같았다. 한편 재종조(再從祖) 문희공(文僖公) 순(洵)의 응제미인도시(應製美人圖詩)에 군왕은 스스로 성색(聲色)을 멀리할지니 그림을 보시면 응당 한번 빈소(嚬笑)에 부치시리라.」는 글귀를 읽고 이르기를 풍자(諷刺)로다 하니 듣는 이들이 크게 놀라며 이르기를「이 아이는 재상(宰相)의 그릇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경술(經術)을 전공하여 학업이 날로 진취(進就)하여 약관(弱冠)에 큰 선비가 되고, 간간이 과거공부를 익히어 나이 22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태학(太學)에 유학하여 풍절(風節)로 사람을 감동시켰다. 명년(明年)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어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있다가 기주관(記注官)으로 옮겨 글씨 씀이 심히 민첩(敏捷)하므로 대제학(大提學) 정공사룡(鄭公士龍)이 천거(薦擧)하여 호당(湖堂)에 선발되니 문원(文苑)의 극선(極選)이었다. 곧 예문관(藝文舘) 검열(檢閱) 겸(兼) 춘추관(春秋舘) 기사관(記事官)에 제수(除授)되고 병진년(丙辰年)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성균전적(成均典籍)에 승진하고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옮겼다가 곧 정언(正言)으로 발탁되고 지평(持平) 장령(掌令)을 거쳐서 홍문관교리(弘文舘校理)를 배(拜)하고 옮겨 응교(應敎)를 제수(除授) 받고 의정부검상사인(議政府檢詳舍人)이 되었더니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전직(轉職)되었다. 이렇듯 청환(清宦) 현작(顯爵)을 역임하여 당시(當時)의 여망(輿望)이 더욱 드러나고 그 때에 군현(群賢)이 조정(朝廷)에 병집(並集)하였으니 홍공(洪公) 섬(暹), 박공(朴公) 순(淳), 홍공(洪公) 천민(天民), 정공(鄭公) 유길(惟吉), 김공(金公) 계휘(繼輝), 기공(奇公) 대승(大升), 신공(辛公) 응시(應時) 같은 분들이었다. 모두 일시(一時)의 명망(名望)으로서 공이 더불어 교유(交遊)하면서 무릇 문원(文苑)의 선발(選抜)과 언의(言議)의 책임을 공이 더 주재(主宰)하고 더욱 동쟁(諌爭)에 치력(致力)하여 간사(姦邪)를 배척(排斥)하고 유현(儒賢)을 진출시키며 원왕(冤枉)을 신설(伸雪)하여 조정(朝廷)에서 조처(措處)하는 사건이 다 그 정의를 얻었으니 대개 제현(諸賢)이 차례로 발탁되어 성공한 것은 반드시 공의 힘이었다. 계해년(癸亥年)에 주상(主上)께서 홍공(洪公) 섬(暹)에게 명(命)하여 독서당(讀書堂)에 팔학사(八學士)를 선발(選抜)하였는 바, 모두 극(極)히 명망(名望) 있는 분들이었는데 공이 세 번째였다.   1564 명종갑자년(明宗甲子年) 여름에 공이 홍공(洪公) 섬(暹), 김공(金公) 계휘(繼輝) 등 19인으로 더불어 빈청(賓廳)에 나가니 주상께서 과거에 급제한 형상(形像) 23폭을 그리도록 명하시고 각각 시를 지으라고 하시었다. 공이 칠언률(七言律) 이수(二首)를 제진(製進)함에 상(上)이 비단을 하사하여 쓰게 하셨으니 그 총영(寵榮)이 이와 같았다. 을축년(乙丑年) 1565에 대동(臺諌)으로 더불어 요승(妖僧) 보우(普雨)를 죽이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보우가 사도(邪道)로 궁중(宮中)에 출입하며 불사(佛事)를 널리 베풀어 국력이 많이 소모되었으니 일찌기 그 죄를 바로잡아 대중(大衆)을 현혹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즉시 명하여 보우를 제주도(濟州島)에 귀양 보내었다. 가을에 또 여러 간신으로 더불어 합계로써 간신 윤원형(尹元衡)을 논박(論駁)하여 아뢰기를 「원형이 왕실의 인친(姻親)임을 빙자하고 재상(宰相)의 자리에 거(居)하여 신기(神器)를 농간(弄奸)하고 임금님을 기망(欺罔)하며,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병환(病患)이 심한 때를 당하여 감히 첩(妾)을 대내(大內)에 보내어 의관(醫官)을 호령하고 잡약(雜藥)을 망령되이 시용(試用)하는 (537) 한편, 당인(黨人)을 지방(地方)과 변진(邊鎭)에 널리 파송(派送)하여 수로(水路)와 육로(陸路)로 재물을 운반하여 집이 나라보다 부유하고 몸이 임금 보다 사치하며 해택(海澤)과 양전(良田)을 점유(占有)하여 관청(官廳)에서 종자(種子)를 공급하고 수령(守令)이 농사를 독려하며 노복(奴僕)을 놓아서 남의 처첩(妻妾)을 약탈(掠奪)하고 남의 전토(田土)를 탈취(奪取)하며 살인(殺人)하기에 이르러도 누가 감히 말을 못하오니 청컨대 급히 명(命)하사 귀양보내소서.」 하니 원형(元衡)이 드디어 득죄(得罪)하여 죽었다.    1567 정묘년(丁卯年)에 명종(明宗)이 승하(昇遐)하시고 선조(宣祖)께서 하원(河原)의 사저(私邸)로 부터 들어와서 대통을 이으시니 요행(僥倖)을 바라는 무리들이 호종(扈從)의 공(功)을 망언(妄言)하고 책록(策錄)에 당하여 떼지어 모아 그 이름을 제출하였다. 이 때 궁노(宮奴)가 그 명록(名錄)을 승지(承旨) 박소립(朴素立)에게 주니 소립이 받거늘 공이 책망하여 이르되 『궁노(宮奴)의 사록(私錄)을 사대부(士大夫)가 어찌 가히 받을 것인가?』하고 공이 드디어 명록을 불살라 버렸다.    1568 선종무진년(宣宗戊辰年)에 퇴계(退溪) 이문순공(李文純公) 황(滉)이 왕명을 받고 입견(入見)하여 고유신(故儒臣) 조광조(趙光祖)를 마땅히 포증(褒贈)하기를 극언(極言)하니 상이 여러 신하에게 물었는데 공이 대답하기를 『고(故) 대사헌(大司憲) 조광조(趙光祖)는 중간에 끊어졌던 학문을 창도(倡導)하고 경전(經傳)을 발휘(發揮)하여 크게 사문(斯文)에 공로(功勞)가 있고 하물며 인묘(仁廟)께서 그 관작(官爵)을 회복하셨으니 상께서 계술(繼述)하여 포증(褒贈)하심이 마땅하니이다.』하니, 상께서 응종(應從)하셨다.  1569 기사(己巳)년에 상이 대원군(大院君)에게 친히 제사 지내려고 하실 적에 홍문관(弘文館)에서 불가하다고 아뢰거늘 공이 간관(諫官) 백인걸(白仁傑)로 더불어 계주(啓奏)하기를 『계통(繼統)의 의(義)가 비록 중(重)하나 사은(私恩)도 또한 경홀(輕忽)하게 못할 것이니 전하(殿下)께서 대원군(大院君)에게 친제(親祭)하심이 예(禮)에 어김이 없습니다.』하니 상이 응종(應從)하셨다.   1573 계유년(癸酉年)에 품계가 승진되어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이어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배(拜)하였다. 갑술년(甲戌年) 봄에 상께서 병환이 계시어 오래 신하들을 접견하지 못하시니 공이 승정원(承政院)에 있어서 율곡리선생(栗谷李先生)으로 더불어 아뢰기를 「선대왕(先大王)께서 비록 정양(靜養)하실 때를 당해서도 군신(群臣)으로 하여금 침실(寝室)에 들어와 일을 말하게 하셨으니 군신은 부자와 같은 바 어찌 부모가 병환이 있는데 자식이 모시지 못하겠습니까? 내외(內外)에서 신(臣) 등(等)이 자주 피소(被召)함을 보면 주상(主上)의 병환이 심하지 않은 줄 알것이요, 또한 족히 그 기대를 위안할 것입니다」하였다. 일찌기 주연(晝筵)에 입대(入對)하여 우계(牛溪) 성선생(成先生) (538) 혼(渾)을 소입(召入)하기를 청(請)하여 아뢰기를 『혼(渾)의 학문이 통명(通明)하여 진실로 연석(筵席)에 초치(招致)하면 도움이 반드시 많을 것이나 다병(多病)하여 사무(事務)를 맡기기는 어려우니 경연관(經筵官)의 임무를 띠고 입시(入侍)토록 하여 자문(咨問)을 갖추소서』 하니, 주상(主上)께서 응종(應從)하셨다.   1575 을해년(乙亥年)에 도승지(都承旨)에 승진되고 곧바로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임명되어 승문원(承文院), 제학(提學)을 겸하였다. 그때에 상께서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상(喪)에 거(居)하시어 애통함이 예(禮)에 과도(過度)하시고 인산(因山)에 미쳐 상이 예관(禮官)에게 이르시기를 『하관(下棺)할 때에 내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망곡(望哭)하고자 하니 그 일을 제신(諸臣)으로 하여금 의론하여 주달(奏達)하라.』고 하시니 공이 또 이선생(李先生)으로 더불어 아뢰기를 몸소 산릉(山陵)에 나가심은 예(禮)의 상법(常法)이요, 병(病)이 있어서 대행하게 함은 예의 변통입니다. 오례의(五禮儀)에 다만 그 상법을 말하고 대행하는 예의는 말하지 않았으니 상께서 이미 몸소 산릉(山陵)에 나가지 못하시면 가히 망곡(望哭)하는 절차(節次)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상의 하교가 예에 합당하오니 가히 전(傳)하여 성법(成法)이 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응종(應從)하셨다. 1576 병자년(丙子年)에 병조참판(兵曹參判)을 배(拜)하여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겸직하였다.   1577 정축년(丁丑年)에 특명으로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처음에 간당(奸黨) 윤원형(尹元衡) · 이(李) 기(芑) 등이 류(柳) 관(灌) · 류인숙(柳仁淑) · 윤(尹) 임(任) · 계림군(桂林君) 유(瑠) 등을 구살(搆殺)하고 또 공의왕후(恭懿王后)가 유(瑠)와 음모(陰謀)했다고 무고(誣告)하거늘 공의왕후(恭懿王后)가 항상 통분(痛忿)히 여기었다. 율곡리생(栗谷李生)이 류(柳) 관(灌)과 류인숙(柳仁淑) 제인(諸人)을 마땅히 복관(復官)시키고 이(李) 기(芑) 등을 마땅히 삭훈(削勳)하여야 한다고 역설하기를 무릇 40번이나 계주(啓奏)하였다. 이때에 공의왕후(恭懿王后)가 와병(卧病)하사 여러번 시약청(侍藥廳)에 언교(諺敎)를 내리어 그 실상을 말씀하시고 정신(廷臣)이 또 다투어 주청(奏請)하였으나 수월(數月)을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공이 종용(從容)이 아뢰기를 「을사년(乙巳年)의 화(禍)는 오로지 윤원형(尹元衡)으로 연유하여 원형이 이미 득죄(得罪)하였는데 제현(諸賢)의 복관(復官)을 어찌 아깝게 여기리이까? 만일 자전(慈殿)의 환후(患候)가 이로 인하여 더욱 위독하심이 있으면 장차 어찌 하시겠습니까? 신 같은 불초로서도 진실로 그 불가함을 알겠는데 하물며 임금님의 효성으로서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하니, 이로 인하여 류(柳) 관(灌), 류인숙(柳仁淑), 윤(尹) 임(任), 유(瑠) 등을 복직 시키는 한편 이(李) 기(芑) 등의 관작을 추탈하고 공신(功臣) 호(號)를 삭탈하였다. 얼마 안되어 대비(大妃)께서 세상을 떠나시니 대신(大臣)들이 상의 복제(服制)를 제쇠장기(齊衰杖朞)로 정하거늘, 공이 간쟁(諫爭)하기를「상께서 명묘(明廟)의 계통(系統)을 계승(繼承)하심이 지중(至重)하시니 마땅히 삼년복(三年服) (539) 으로 하여야한다.」고 하니 상이 응종(應從)하셨다.   1579 기묘년(己卯年)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승진(陞進)하여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겸(兼)하였다. 고사(故事)에 국상을 당(當)하면 태묘(太廟)의 축(祝)에 애손(哀孫) 모(某)라고 칭(稱)하였는데 공이 상소하여 그 실례(失禮)임을 말하여 아뢰기를 「신상(新喪)에는 애(哀)라고 칭함이 마땅하나 태묘(太廟)에는 애라 칭함이 부당하나이다. 지금 전하(殿下)께서 태묘(太廟)에 애증손(哀曾孫)이라고 칭하시면 이는 신상(新喪)으로 섬기심이니 선왕(先王)의 예에 길흉(吉凶)의 시행(施行)이 다르고, 종묘(宗廟)의 예에 종고(鍾鼓)가 갱장(鏗鏘)하나니 어찌 비애(悲哀)한 일로 다르겠습니까?」하였다. 그 때에 좌통례(左通禮) 황정욱(黃廷彧)이 또한 아뢰니, 주상이 대신들에게 하문하시고 응종(應從)하시었다.   공이 을축년(乙丑年)부터 이에 이르기 15년 동안에 무릇 조정(朝廷) 대사(大事)를 공이 참여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고, 알면 일찌기 말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며, 말하면 일찌기 윤허를 얻지 못함이 없었다. 그러나 매양 타인 앞에 나서지 않으므로써 세상에서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으나 실지로 주간(主幹)하였다. 당시 호서(湖西)의 풍속(風俗)이 매우 우완(愚頑)하거늘 조정(朝廷)에서 민망(民望) 있는 이를 선택(選擇)하더니 경진년(庚辰年)에 공으로 감사(監司)를 임명하니 사람들이 혹 위로하였으나 공이 태연히 이르기를「인신(人臣)이 되어 진실로 국가에 유익하다면 일읍(一邑)의 수령이라도 짐짓 사양하지 않을 터인데 하물며 방백(方伯)이겠는가?」하고 부임(赴任)하니 백성들이 서로 경계하여 개과천선(改過遷善)하고 열군(列郡)이 평안(平安)하여 모두 비석을 세워 그 은혜(恩惠)를 칭송(稱頌)하였다.   1581 신사년(辛巳年)에 내직으로 들어와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더니 1585 을유년(乙酉年)에 특명으로 우의정(右議政)을 배(拜)하였다. 1587 정해년(丁亥年)에 사은사(謝恩使)로 천조(天朝)에 다녀오고 1589 기축년(己丑年)에 좌의정(左議政)에 승진하였더니 이 해 여름에 영의정(領議政)에 승진되었다. 당시 큰 흉년이 들고 재앙(災殃)과 이변(異變)이 자주 나타나거늘, 공이 근심하여 여러번 글을 올려 면직(免職)을 빌고 한편 수치(修治)하는 정책(政策)을 진달(陳達)하였다.   그 해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이 반란(叛亂)을 일으키니 상이 공에게 체포(逮捕)를 위임하셨다. 공이 아뢰기를 「여립(汝立)은 큰 역적(逆賊)으로 체결함이 다 날래고 사나우며 참언(讖言)을 지어 내고 거짓말을 퍼뜨려서 팔도(八道)가 광혹(誑惑)되었으니 신(臣) 등이 감히 독단(獨斷)하지 못하겠으니 정국(庭鞫)을 청하나이다.」하여 상이 응종(應從)하셨다. 여립(汝立)이 모반(謀叛)의 계획이 패한 줄 알고 산곡간(山谷間)에 도망하여 숨거늘, 공이 급히 비관(秘關)을 발송(發送) (540) 하여 크게 국중을 수색(搜索) 끝에 진안(鎭安) 죽도(竹島)에서 발견했는데 관군(官軍)이 미처 체포하기 전에 스스로 목찔러 죽거늘 그 무리 변사(邊汜)을 차살(䂨殺)하고 그 무리 박춘룡(朴春龍)과 그 아들 옥남(玉男)을 함께 사로잡아 복주(伏誅)하는 등 공이 계주(啓奏)하여 모두 작살하였다.   공이 본래 기질이 있더니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급(急)한 때를 당하여 수월(數月)을 휴식(休息)하지 못하다가 옥사가 다 재결(裁決)되자 질병(疾病)이 급작히 위독하였다. 자질을 돌아보며 이르되「하늘이 종사(宗社)를 도와 주시어 죄인(罪人)을 이에 다스렸으니 내 가히 눈을 감겠다.」하시고 졸하시니 향년이 59세이었다.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주상(主上)께서 진도(震悼)하시어 삼일(三日)을 철조(輟朝)하시고 사제(賜祭)하시었다.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고을 남쪽 향적산하(香積山下) 해좌원(亥坐原)에 안장(安葬)하였다. 후에 영평(永平) 금주산(錦柱山) 자좌(子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1590 경인년(庚寅年) 8월에 평난공신(平難功臣)으로 녹훈(錄勳)하여 철권(鐵券)을 추사(追賜)하고 시녕부원군(始寧府院君)을 증봉(贈封)하였다.   공은 용모가 온화하고 상냥하며 의지(意志)가 강방(剛方)하고 지행(至行)이 있었다. 친상(親喪)을 당하여 삼년을 여묘(廬墓)하고 상사(喪事)와 제사(祭祀)는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를 행하였다. 형제간에 매우 화락하여 음식을 반드시 함께 하고 무이산(武夷山) 속에 있는 전토(田土)를 백형(伯兄)에게 양여(讓與)하여 경작(耕作)토록 하고 자신은 소흘봉(蘇屹峯) 앞에 모려(茅廬)를 구축(搆築)하였는데 심히 질박하여 풍우(風雨)를 가리지 못할 정도였다. 조사(朝士)들이 을해년(乙亥年) 이후로 부터 동서당(東西黨)으로 나뉘어 시끄럽게 지껄였으나 공은 홀로 편주(偏主)하는바 없었고, 벼슬을 내놓고는 문득 각건(角巾)을 쓰고 시골에 돌아와서 경적(經籍)으로 스스로 즐기었다. 문장(文章)이 담박(澹泊)하여 반드시 육경(六經)에 근거하였으므로 양양(洋洋)하게 성세(盛世)의 휘음(徽音)이 되었었다. 여러번 전주(銓注)를 관장(管掌)하였으나 출척(黜陟)을 공의(公議)에 따랐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이 간섭하지 못하였다. 사람이 기개(氣概)가 있으면 혹 파격(破格)으로 등용하였으니 공이 병조판서(兵曹判書)로 계실 때에 무인(武人) 손효순(孫孝舜)을 길에서 만났는데 하마(下馬)하지 않거늘 공이 힐책(詰責)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무인으로서 대사마(大司馬)에게 대항(對抗)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사실 몰랐습니다.」 하고 언모(言貌)가 매우 헌쾌(軒快)하거늘, 공이 용서하고 탁용(擢用)하여 곤수(閫帥)에 이르렀고, 이충무공(李忠武公) 순신(舜臣)이 처음에 하료(下僚)로서 피곤하였으나 정개(貞介)로 소문이 있거늘, 공이 시험하고자 면대(面對)하고 전통(箭筒) 하나를 구(求)하니 이공(李公)이 말하기를 『매우 쉬우나 공께서 재상(宰相)으로서 구하심이 옳지 않고 소인이 드리는 것도 또한 옳지 않다.』고 하는지라. 공이 크게 기뻐하고 당일로 천거하여 등용 (541) 하니 이공(李公)이 이로 인하여 유명하게 되니 사람들이 그 조감(藻鑑)을 탄복하였다.   배위(配位) 정경부인(貞敬夫人) 김씨(金氏)는 본관이 안동(安東)으로 현령(縣令) 업(嶪)의 따님인데 어질고 법도가 있어 공을 보좌함에 어기는 말이 없더니 졸(卒)함에 공묘(公墓)에 합부(合祔)하였다. 이남삼녀를 두셨으니 장남(長男) 희서(熙緒)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유성군(儒城君)을 습봉(襲封)하고 임해군(臨海君) 진(珒)의 적해(賊害)한바 되었는데 그 후에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책록(策錄)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차남(次男) 유서(裕緒)는 진사(進士)로서 족숙(族叔) 절도사(節度使) 경선(敬先)의 후(后)로 출계(出系)하였는데 임진란(壬辰亂)에 왜적에게 살해(殺害)한바 되었다. 여(女)의 장(長)은 군수(郡守) 이(李) 통(通)에게 출가하고, 차(次)는 현령(縣令) 권(權) 준(晙)에게 출가하고, 차(次)는 찰방(察訪) 김성진(金聲振)에게 출가하였다. 희서(熙緒)는 일남사녀를 두었으니 남(男) 은 고성군수(高城郡守)요, 여(女)의 장(長)은 위률(衛率) 류(柳) 철(澈)에게 출가하였으니 관향(貫鄕)이 다르고, 차(次)는 사인(士人) 신(申) 숙(塾)에게 출가하고, 차(次)는 감역(監役) 권복길(權復吉)에게 출가하고, 차(次)는 승지(承旨) 이유성(李惟聖)에게 출가하였다. 증손(曾孫)과 현손 이하(以下)는 능히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이 조정(朝廷)에 출사(出仕)한지 38년에 행한 모책(謀策)과 건의(建議)는 모두 옛적 명신(名臣)도 하기 어려운 바였으며, 그 경연에 출입하며 법규가 간절하고 잠언(箴言)이 유익하여 성총(聖聰)을 계도(啓導)하고 인물을 등용함이 더욱 많았기 때문에 임금의 지우(知遇)를 특별히 받아 영상(領相)의 중임(重任)에 이르고, 당시의 여론(輿論)이 또한 현상(賢相)이라고 하였으니 당시에 가모(嘉謨)와 대절(大節)이 마땅히 백세에 빛날 것이 많을 것인데 공이 남보다 뛰어난 명성(名聲)을 싫어하여 매양 그 명예에 가까운 것을 스스로 숨김으로써 나타나지 않음이 많았다. 이제 수백년 후에 구문(舊聞)을 주어 모은 바 진실로 그 하나 둘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적(事蹟)은 국사에 있고 그 언행은 다 당시 명현(名賢)들의 전기(傳記)에 있으며 그 덕업과 행의(行誼)는 조야(朝野)에 지금까지 장송(莊誦)하고 있는데 자손이 미약(微弱)하여 이제야 비로소 시호(諡號)의 은전(恩典)을 청하오니 아아! 또한 늦었으나 오직 태상씨(太常氏)의 채택(採擇)함을 기다리노라.

예조판서김리익찬

 

領議政始寧府院君文貞柳公㙉諡狀

 

公諱㙉字克厚文化人號愚伏高麗開國功臣大丞諱車達卽其鼻祖也傳至太學士致仕諡文簡公諱公權太學士致仕文正公諱璥皆前朝大臣至諱曼殊事我  太祖官至議政府左議政痛革淫祠至今巫賽之謠先擧公諱焉五傳而至議政公諱禮善與兄監役仁善處士恩善弟叅判智善虞候貞善皆篤孝友鄕人名其井而碑之其後蓬萊楊士彦傳李文簡宜顯識其面議政公以嘉靖辛卯五月十九日擧公于抱川旺方山下公幼穎不嬉戱才學語便解文字叔父叅判公奇之屬門戶之望自是劬學不已八九歲藻識如成人讀再從祖文僖公洵應製美人圖詩至君王自是疎聲色展畵惟應寄一嚬之句而曰諷矣哉聞者大驚曰此兒公輔器也自是攻經術學業日進弱冠成大儒間習功令年二十二中司馬遊於學風節動人明年擢第登槐院權知副正字遷記注載筆甚敏大提學鄭公士龍薦授湖堂文苑極選也尋除藝文舘檢閱兼春秋舘記事官丙辰中重試陞成均典籍遷騎郞尋擢正言歷授持掌拜弘文舘校理移授應敎爲議政府檢詳舍人轉東銓郞歷官清顯時望益著時群賢並集于朝若洪公暹朴公淳 (533) 洪公天民鄭公惟吉金公繼輝奇公大升辛公應時皆一時之望而公與之翺翔凡文苑之選言議之責公皆主之而尤致力於諫爭斥姦邪進儒賢雪寃枉至使 朝廷擧措皆得其正盖諸賢迭發而成之者必公也癸亥 上命洪公暹選讀書堂八學士皆極望也公居第三甲子夏公與洪公暹金公繼輝等十九人詣賓廳  上命畵擧子登第狀二十三幅令各賦詩公進七言律二首 上賜絹書之其寵榮如是乙丑與諸臺請誅妖僧普雨曰普雨以左道出入宮禁廣設佛事國力殆渴宜早正其罪毋使惑衆 上卽命竄普雨濟州秋又與諸諫臣合啓論奸臣尹元衡曰元衡托肺腑之親居上台之位竊弄神器欺罔 天聰當 文定王后大漸之時敢以妾送 大內號令醫官妄試雜藥廣布其黨於方鎭舟運陸輸家富於國身侈於 主壅海澤占良田官給種守督農縱奴掠人妻妾奪人田土至殺人而莫敢誰何請亟 命竄謫元衡遂得罪而死丁卯 明宗昇遐 宣祖由河原之邸入承大統僥倖之徒妄言扈從功當錄至坌集授其名宮奴以其名錄授承旨朴素立素立受之公責之曰宮奴私錄士大夫寧可袖乎公遂箚裂焚之戊辰退溪李文純滉承召入見極言故儒臣趙光祖當褒贈 上詢于諸臣公對曰故大司憲趙光祖始倡絶學發輝經傳大有功於斯文况 仁廟復其官 上宜繼述而褒之 上從之己巳 上將親祭 大院君弘文舘言不可公與諫官白仁傑啓曰繼統之義雖重私恩亦不可輕 殿下親祭 大院君於禮無違 上從之癸酉進階同副承旨拜弘文舘副提學甲戌春 上有疾久不接臣隣公在喉院與栗谷李先生啓曰 祖宗朝雖當靜攝之時令群臣入臥內言事君臣猶父子安有父母有疾子不得侍乎中外見臣等數被召知 上疾未甚亦足慰其望嘗入對晝筵請召牛溪成先生渾曰渾學問通明誠能致之筵席裨益必多多病難以任事許令帶 經筵官入侍以備諮問 上從之乙亥進都承旨尋拜禮曹叅判兼承文院提學時 上居仁順王后喪哀號過禮及因山  上謂禮官曰下玄宮時予欲率百官望哭其令諸臣議聞公又與栗谷李先生奏曰躬詣 山陵禮之常也有疾攝行禮之變也五禮儀只道其常不言攝行儀 上旣不得躬詣 山陵不可無望哭之節  上敎合於禮可傳爲成法 上從之丙子拜兵曹叅判兼都摠府副摠管丁丑特拜大司憲初奸黨尹元衡李芑等搆殺柳灌柳仁淑尹任桂林君瑠等且誣 恭懿王后陰主瑠謀 恭懿王后常痛之栗谷先生力言灌仁淑諸人當復官芑 (534) 等當削勳凡四十啓是時 恭懿王后不豫屢下 諺敎于侍藥廳言其狀廷臣又競請之屢月不得 允公從容奏曰乙巳之禍專由元衡元衡旣得罪諸賢復官何靳之有有如 慈候因此益篤將如之何如臣不肖固知其不可况 聖孝乎由是復灌仁淑任瑠職奪芑等官罷功臣號未幾 大妃薨大臣定 上服齊衰杖期公爭以爲 上承 明廟之統爲重當服三年 上從之己卯陞資憲大夫禮曹判書兼藝文舘提學故事當 國哀 太廟祝稱哀孫某公上疏言其失曰新喪當稱哀 太廟不當稱哀今 殿下於 太廟稱哀曾孫是新喪事之也先王之禮吉凶異施 宗廟之禮鍾鼓鏗鏘豈宜以悲哀之事間之乎時左通禮黃廷彧亦言之 上詢于大臣而從公公自乙丑至是十五年之間凡朝廷大事公無不與知知未嘗不言言之未嘗不得請然每逡巡於人不令世知某也實主之時湖西俗甚嚚朝廷擇民望庚辰以公爲監司人或唁之公夷然曰爲人臣苟有益於國一邑宰固不敢辭况方伯乎旣至民相戒遷善列郡晏然皆立石頌其惠辛巳入爲正憲判兵曹乙酉特拜右議政丁亥以謝恩使赴天朝己丑陞左議政是歲夏進上相時大歉災異屢現公憂之屢章乞免仍陳修治之策冬鄭汝立謀叛  上委公逮捕公奏曰汝立大逆也締結盡梟獍造讖興訛八方誑惑臣等不敢獨斷請庭鞫 上從之汝立知其謀敗亡匿山谷間公急發秘關大索國中於鎭安之竹島得之官軍未及捕植劒自斃其黨邊汜斫殺之其黨朴春龍及其子玉男並就擒伏誅公奏皆磔之公素嬰奇疾値按獄事急數月不得休告獄旣决疾因猝革顧子姪曰天佑 宗社罪人斯得吾可以瞑目矣卒享年五十九訃聞 上震悼撤朝三日 賜祭月日葬于縣南香積山下亥坐之原({後移葬于永平錦柱山子坐原})庚寅八月錄平亂勳追 賜鐵劵 贈始寧府院君公貌和易而志剛方有至行丁親憂廬墓者三年喪祭用朱文公家禮處兄弟怡怡然飮食必與之同有田於武夷山中讓伯兄耕自搆茅廬於蘇屹峰前甚樸素不蔽風雨朝士自乙亥以後譁然於東西公獨無所偏主解官輒角巾還鄕以經籍自娛爲文澹泊必根於六經洋洋爲盛世音屢掌銓注黜陟循公議人不敢干以私人有氣槩或破格而用之公在西銓時武人孫孝舜於路不下馬公詰之對曰安有武人抗大司馬者乎實不知也言貌甚軒快公舍之擢用至閫帥李忠武舜臣初困於下羈以貞介聞公欲試之面求一箭筒李曰甚易而公以宰相求之非小人獻之亦非公大悦卽日薦用之李公由是知名人服其 (535) 藻鑑貞敬夫人金氏籍安東縣令嶪之女賢有度佐公無違言及卒祔公墓有二男三女長熙緒中文科官刑曹叅判襲儒城君爲臨海君珒所賊害後錄靖難勳  贈左贊成次裕緒進士出爲族父節度使敬先后壬辰爲倭賊所殺女長適郡守李通次適縣令權晙次適察訪金聲振熙緒有一男郡守四女長適衛率柳澈異貫也次適士人申塾次適監役權復吉次適承旨李惟聖曾玄以下不能悉記公立朝三十八年其所猷爲建白卽皆古名臣所難若其出入經幄䂓切箴益開導 聖聰臧否人物者尤多故特被 聖朝之知遇至畀以上相之重而時論亦歸之賢相在當時嘉謨大節宜其有焜耀百世者而公惡矯激之名每自秘其近譽者是以多不顯今於數百載之下掇拾舊聞固不得其一二然其事國乘也其言皆時賢傳記也其德業行誼皆朝野之至今莊誦者也而子孫微弱今始請節惠之典吁亦晚矣惟俟太常氏釆焉

禮曹判書金履翼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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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199  월파류공팽로묘갈명 (月坡柳公彭老墓碣銘) 207     편집인 2012/11/26  [1117]  
198  월파공(팽로)사적 (月坡公(彭老)事蹟) 206     편집인 2012/11/26  [963]  
 양의정시녕부원군문정공(전)시장 (領議政始寧府院君文貞公(㙉)諡狀) 205     편집인 2012/11/26  [1227]  
196  함경병마절도사류공(경선)묘갈명 (咸鏡兵馬節度使柳公(敬先)墓碣銘) 204     편집인 2012/11/26  [956]  
195  풍기공(경장)묘지명 (豐基公(敬長)墓誌銘) 203     편집인 2012/11/26  [1035]  
194  승문박사공(경인)묘갈명 (承文博士公(敬仁)墓碣銘) 202     편집인 2012/11/26  [1037]  
193  송호공(정)일문사의사적 (松壕公(汀)一門四義事蹟) 201     편집인 2012/11/26  [1047]  
192  자헌대부공조판서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령의정류공 200     편집인 2012/11/26  [1154]  
191  승지공(혼)약사 (承旨公(渾)略事) 199     편집인 2012/11/26  [899]  
190  계휴정공 (위) 약사 (繼休亭公(湋)略事) 198     편집인 2012/11/26  [924]  
189  평안병사공(비)신도비명 (平安兵使公(斐)神道碑銘) 197     편집인 2012/11/26  [1101]  
188  증판서공(몽필)묘표 (贈判書公(夢弼)墓表) 196     편집인 2012/11/26  [840]  
187  증참의공(몽주)묘갈명 (贈參議公(夢周)墓碣銘) 195     편집인 2012/11/26  [1064]  
186  학암공(몽정)묘갈명 (鶴巖公(夢鼎)墓碣銘) 194     편집인 2012/11/26  [1199]  
185  남재공(몽삼)묘갈명 (南齋公(夢參)墓碣銘) 193     편집인 2012/11/26  [933]  
184  청계공(몽정)신도비명 (淸溪公(夢井)神道碑銘) 192     편집인 2012/11/26  [1148]  
183  증판서공(몽익)신도비명 (贈判書公(夢翼)神道碑銘) 191     편집인 2012/11/26  [1030]  
182  추담류선생자방유적비문 (楸潭柳先生子房遺蹟碑文) 190     편집인 2012/11/26  [1026]  
181  추담공(자방)묘표 (楸潭公(子房)墓表) 189     편집인 2012/11/26  [1044]  
180  사헌부장령관재공(정수)묘갈명 (司憲府掌令觀齋公(廷秀)墓碣銘) 188     편집인 2012/11/2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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